28_고전 읽기
"지혜는 늘 빈 공간에 맺힌다. 책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 채우는 노력이라고 해도 좋다. 작가들끼리의 잡담은 더러 소중할 때도 있긴 하지만 많은 경우 기력을 고갈시키고 만다. 게다가 책을 너무 많이 읽는 것도 아주 나쁘다."
(도러시아 브랜디)
작가 도러시아 브랜디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생활 속에 여백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친한 사람들과의 수다는 물론 책을 너무 많이 읽는 것도 좋지 않고, 박물관이나 극장, 음악회에 가는 것보다는 며칠이고 말없이 지내보라고 권합니다. 브랜디의 말은 게으름뱅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종류의 대책 없는 무위無爲 (아무것도 하지 않음)가 아니라 일종의 ‘의도된 예술적 혼수상태’에 대한 것입니다. 이런 의식적인 ‘멍 때림’은 글을 쓸 때 도움이 됩니다. 의식적으로 생각을 비워 놓는 여유를 심리적으로 부여함으로써 무의식이 일하게 하는 겁니다. 이런 상황은 학습이론에서도 인정하고 있으며, 놀라운 성취를 이루어낸 학자들 가운데도 이런 ‘의도된 혼수상태昏睡狀態’의 덕을 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문체, 자기만의 어조語調를 찾는 것입니다. 자기만의 리듬을 찾는 것과 동일한 과정이지요. 글쓰기가 준비될 때까지는 각종 참고자료를 찾거나 사전답사에 나서는 것도 좋습니다. 필요한 정보를 긁어모아 놓으면 글 쓰다가 필요할 때 곶감 뽑아 먹듯 선택해서 사용할 수 있거든요. 이런 글쓰기의 준비과정으로 ‘고전 읽기’를 권할 수도 있습니다. 고전은 인류가 시도한 수많은 창작물의 보물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전은 스토리텔링에 매우 유용하지요. 고전 속에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한 마디를 품고 있을 때도 많습니다. 역사서 속 예화 한 토막은 독자가 관심을 잃을 때쯤 나타나 글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독자의 정신을 깨어나게 만들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온갖 상징과 사례가 널려 있습니다. 서양에 그리스·로마 신화가 있다면, 동양에는 『자치통감과資治通鑑』, 『요재지이聊齋志異』가 있습니다. 특히 『요재지이』는 동양의 『아라비안나이트』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풍부한 기담奇談으로 유명합니다. 1980년대 영화팬의 가슴을 달군 왕조현 주연의 『천녀유혼』은 『요재지이』의 『섭소천傳』에 나오는 스토리죠. 『장자莊子』도 스토리텔러들이 선택할만한 동양고전입니다. 『장자』는 현실을 벗어난 이야기를 통해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게 만들어줍니다. 조금 물러나서 보아야 제대로 보입니다. 현실도 마찬가지로 그렇습니다. 인문학 스토리는 독자에게 현실보다 크고 상상보다 화려한 영토를 떠돌아다니는 자유를 허락합니다.
써야 할 글과 같은 장르의 글을 읽는 것은 글을 쓰는 동안은 피하는 것이 득이 될 때가 많습니다. 쓰고 있는 글의 문체가 앞서 읽은 글의 문체를 자꾸 따라가기 때문이지요. 다른 사람의 문체를 흉내 내면 자기만의 글이 나타나지 않아 갑갑해지기 때문에, 도러시아 브랜디는 그래서 글을 쓰기 전에 책을 읽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업무가 글을 쓰는 것인데 글을 읽지 않기는 어렵습니다. 이럴 때는 가능한 한 ‘나만의 문체’를 오염시키지 않을 건조한 글을 읽거나, 쓰려는 글과는 전혀 다른 장르의 글을 읽는 것이 좋습니다. 고전은 그런 조건에 대부분 부합합니다. 고전을 읽되 부담을 가지지 말고 유희遊戲처럼 즐겨야 합니다. 그렇게 한참을 노닐다 보면 비로소 글 쓸 준비가 갖춰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