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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 Oct 14. 2023

[전하고 싶은 음악⑨] 새 이름을 갖고 싶어 - 시와

서로를 불러주는 마음을 담아


갖고 싶어 새로운 이름
다르게 살아보고 싶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시작하는 듯 새로운 인생

지어줄래 새로운 이름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이제부터 만나는 사람은
새 이름으로 부르게 될 거야


“혜숙아.”


아버지가 지어주신 내 이름은 ‘은혜 혜(惠)’, ‘맑을 숙(淑)’의 한자를 쓴다. 어릴 때 나는 내 이름이 싫었다. 뚜렷하게 성별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싫었고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특히 어르신들의 이름 같아서 또래 친구들의 이름과 너무 다르게 들리는 것도 싫었다. 이름에는 죄가 없다는 걸 알지만 나는 다르게 불리고 싶었다.


나이가 들면서 새로 시작한 다양한 모임 활동을 통해 닉네임을 만들던 시기가 있었다. 여러 닉네임을 전전하다가 한 가지 이름으로 오랜 기간 정착하게 됐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 마음대로 정한 이름에 익숙해지면서 오히려 본명에 대해서도 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음악을 만들고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을 때 나는 본명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첫 번째 앨범, EP를 만드는 시기가 되었고 처음으로 음악가로서의 예명을 고민했다. 역시나 성별 전형성이 높은 이름이라는 게 가장 마음에 걸렸던 탓이다. 앞으로 살아갈 음악가로서의 삶과 나의 음악에 잘 어울리는 이름을 찾아보고 싶었다.


어제 처음 만난 분이 내게 물었다.

“‘이호’라는 활동명은 어떻게 짓게 되었어요?”


수십 번은 설명했을 이야기를 다시 꺼내며 늘 그렇듯 10여 년 전 그날이 떠올랐다. 그 당시 ‘무대륙’이라는 공간에서 주방 스텝으로 일하고 있었다. 사장님을 비롯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배려로 일하는 중간에 짬을 내어 기타 연습을 할 수 있었고 홍대 앞에서 음악을 하던 친구들이 삼삼오오 놀러 올 때면 함께 안부를 나눌 수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서너 명의 친구들이 와서 커피를 마셨는데 주방과 멀찌감치 떨어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터라 나는 그들이 온 줄 몰랐다. 한참 후에 주방 창에 다가와 인사를 하는 친구를 보고 나서야 그 자리에 가서 인사를 나눴다. 나를 보더니 그중 한 녀석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누나, 나 누나한테 어울리는 이름 생각났어.”


그즈음 나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괜찮은 예명 없냐며 여러 가지 이름에 대한 의견을 묻곤 했다.


“오! 뭔데, 뭔데?”

“이호!”

“이호? 느낌 괜찮은데? 무슨 뜻이야?”

“우리가 아까 여기 도착했을 때 누나가 주방에 있는지 몰랐거든? 그런데 좀 전에 어마어마한 재채기 소리가 들렸잖아. 그래서 알았지. 누나가 일하고 있다는 걸.”

“아~ 그런데? 이름이랑 무슨?”

“그 재채기 소리가 ‘이~호’야.”


요즘은 좀 변했지만 그 당시 내 재채기 소리는 정말 ‘이~~호!’였다. 우리들은 깔깔대며 웃었다. 그러다가 속으로 이호라는 단어를 계속 되뇌어봤다. 처음엔 장난처럼 들리던 이름이 왠지 입에 잘 붙었다. 그리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밖으로 뱉어내게 되는 ‘재채기’의 의성어를 이름으로 갖게 된다는 건 늦깎이 음악가인 나에게 잘 어울린다 여겨졌다. 얘기를 꺼냈던 친구는 농담 반, 진담 반이었지만 나는 그 이름이 썩 마음에 들었고 얼마 뒤부터 이호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상이 생긴 것 같았고 한 뼘 자유로워진 것 같았다. 그 이후에 새로 만나게 된 사람들은 나를 ‘혜숙’이 아닌 ‘이호’로 부르기 시작했다.


https://youtu.be/tfBsYzzw5VQ?si=bmZSYB3F89r1-38q

△ [올댓뮤직 All That Music] 시와(siwa) - 새 이름을 갖고 싶어(Begin Again)


망설여 보낸 시간 버리고 싶은 습관
혼자서 자꾸만 키워가는 걱정

새 이름만 있다면 다시 태어난 듯이
새로운 시간을 새로웁게 살 거야


2019년, 시와의 단독 공연에서 ‘새 이름을 갖고 싶어’라는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마음 한 구석을 들킨 것 같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지속적으로 음악을 하면서 먹고살기 위한 방편이라 믿으며 온갖 일을 벌이거나 수락했는데 정작 음악작업에 할애하는 시간은 턱없이 적어졌다. 그래서 즐거웠던 음악 ‘일’이 점점 스트레스로 다가왔고 스스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만 커졌다.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해서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음악활동을 해도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빨리 앨범을 내야겠다는 강박이 생겼다. 그래서 믿고 맡길 수 있는 든든한 음악가에게 프로듀서를 의뢰하고 1집을 만들기도 결정했다. 틈나는 대로 기타를 잡아 새로운 곡을 만들었고 때가 되면 녹음실에 들어가 노래를 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곤한 날에도 고집을 부려 녹음을 강행했고 그런 날이면 노래를 하다가 자주 울었다. 그때 나는 고요한 녹음실에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헤드폰에서 음악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고 가장 서글펐다. 2018년 8월, 그렇게 만든 나의 첫 정규앨범 <colour>가 세상에 나왔을 때, 정작 나는 그 음악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열심히 홍보하지도 않았고 라이브를 준비하지도 않았다. 나는 이상하게 작아져 있었다. 그런 상태로 지내던 터에 ‘새 이름을 갖고 싶어’를 만났고 내 얘기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흐른 어느 날, 일하러 나가는 아침 버스 안에서 새삼스럽게 그 앨범을 들었다. 그제야 나의 어떤 마음들이 모여 앨범이 되었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었고 어떤 소리를 내고 싶었는지 들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새 이름이 아니라 새 마음이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실패와 두려움, 망설임을 등에 지고도 단단하게 내 길을 딛고 걸어갈 마음 말이다.


△ 시와(siwa) - 새 이름을 갖고 싶어(Begin Again) 앨범 커버


갖고 싶어 새로운 이름
다르게 살아보고 싶어
이제부터 만나는 사람은
새 이름으로 부르게 될 거야

만약 내가 시간을 돌려
모든 선택을 다시 한다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시작하는 듯 새롭게


우리들의 이름은 본인 스스로 소리를 내어 발음하는 일보다 타인에 의해 불리는 일이 훨씬 많기에 나는 나의 이름을 말하기보다 듣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들을 때마다 점점 더 그 이름과 내가 동일시된다. ‘나’를 나타내는 언어적 표현인 셈이다.

물론 이름이 바뀐다는 건 나를 부르는 소리, 지칭하는 언어가 달라지는 것일 뿐 고유한 나의 존재는 여전히 여기에 그대로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정체성에 모순, 위배되거나 들을 때마다 괴로워지는 이름은 개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에는 힘이 있다는 것, 말은 추상적 존재이지만 그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의 물리적 힘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와는 내가 음악가로 살아가기 전, ‘부엉이버스’라는 작은 공간을 운영하고 있을 때 공연으로 섭외했던 사람이다. 음원이나 비디오로 만나는 것도 좋지만 시와의 라이브를 보고 나면 누구나 그 밀도 높은 공기를 기억하게 될 거다. 기회가 된다면 꼭 그의 공연에 가보길 권한다. 최근, 2023년 8월에 발매한 싱글 <꿈속의 새>는 2017년 꿨던 꿈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곡이라고 한다. 오랜 시간 동안 품고 있다가 세상에 나온 특별한 노래를 들으며 역시 시와는 한결같은 면과 변화무쌍한 면을 동시에 갖고 있는 음악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https://youtu.be/44wXcsK6rTc?si=TXScHvtY3qzsBJmZ

△ [MV] 시와(Siwa) - 꿈 속의 새(tear drop) / Official Music Video


불과 20년 전만 해도 대한민국 법원에서는 부모가 지어주신 이름을 함부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유교적 관념에 따라 개명 허가사유를 매우 좁게 해석했다. 2005년에서야 개인의 인격, 행복추구권 등을 강조하는 사회적 흐름을 좇아 불법적, 탈법적 의도가 개입된 게 아니라면 원칙적으로 국민 모두의 개명을 허가하게 된다. 내 주변에도 스스로의 이름을 만들어 개명하고 불리고 있는 친구들이 꽤 많다. 분명 그들의 삶은 이전보다 자신 있게 빛나 보인다. 시와도 나도, 다른 모든 사람들도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는 이름을 갖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불러주면 좋겠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지탱해 주는 세상이면 좋겠다.




*시와(Siwa) | Instagram @withsi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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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여다보고 안아주는 노래를 만들고 부른다. '시와'는 지금은 사라진 홍대 앞 맥주 바의 이름이었다. 그곳에서 조용히 노래하기를 바라던 마음을 담아 음악가로서의 이름을 지었다. 이제는 노래로 누군가의 마음을 안아줄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특수교사로 일하며 음악치료를 수업에 적용해 보려 공부하다 음악가의 길로 접어들었고 2007년 EP <시와,>를 시작으로 2022년 2월 <잠 못 이루는 당신에게>까지 정규앨범 4장, 미니앨범 4장, 18곡의 싱글을 발매했다. 2022년 10월 책 <<나는 노래하는 시와로 산다>> 출간. 2023년 8월 더블싱글 <꿈속의 새> 발매.


*<새 이름을 갖고 싶어>는 각종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창원 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 소통> 69호(2023년 가을호)에 전게(前揭)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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