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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 Feb 06. 2022

[그럼에도 우리는 ③] 라이너스의 담요

- 음악하는 두 여자와 열아홉 살 고양이 두 마리의 이야기

라이너스의 담요

 

4년 전, 완전히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했다.
이전 집에서 살 때, 우리는 항상 오로와 조로가 내다보는 창 밖에 살아 움직이는 풍경이 있기를 바랐다. 적벽돌을 쌓아 올린 옆집 외벽이 아니라. 또한 동거인과 나는 직업 특성상 집에서 작업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공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집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익숙한 생활 반경에서 조금 멀어지는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가격 대비 좋은 집을 구하는 게 우선이었다. 결국 우리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짙어지던 정든 동네를 떠났다.


이사를 결심하고 난 어느 날, 우리는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을 떨며 오랜 친구가 살고 있는 동네로 걸음을 옮겼다. 지하철과 좀 떨어져 있고 가파른 언덕도 올라야 했지만 그만큼 공기도, 풍경도 좋았다. 몇 번 놀러 갔다가 그 동네에 관심이 생겼고 얘기를 들은 친구는 진작부터 안면을 튼 부동산 하나를 소개해줬다. 하지만 그날따라 부동산 사장님이 보여주는 집들은 저렴하긴 했으나 그 외의 조건들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창문이 커도 옆 건물과 너무 붙어있어서 열어놓을 수 없다거나 볕이 안 들어서 곰팡이 냄새가 집안에 배어 있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너덧 군데쯤 돌아다니다가 이내 포기하는 심정으로 다음에 다시 오겠노라고 말하고 발길을 돌렸다. 헛헛한 마음으로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다가 어렵게 시간을 낸 게 아까워 무작정 눈에 들어온 역에 내렸다. 처음 가 본 동네였다. 알 수 없는 기운을 따라 3번 출구를 선택해서 올라갔더니 바로 코 앞에 작은 부동산이 있는 게 아닌가. 딸랑이는 도어벨 소리를 내며 들어간 우리는 계약 가능한 금액과 원하는 조건을 얘기했고 열심히 들어주시던 직원 한분이 딱 맞는 집이 하나 있다며 앞장섰다. 찰랑거리는 불광천을 건너고 한가해 보이는 버스 종점을 지나 도착한 집. 그날 우리는 그 집을 계약했다.


새로운 집에는 아주 크고 햇빛이 잘 들어오는 창문이 있었다. 두 겹의 창문이 들어찬 나무 창틀이 한 뼘만큼 넓어서 오로와 조로가 사이좋게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다. 창 앞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손때 묻은 캣타워와 새로 산 청록색 소파를 나란히 뒀다. 고양이들이 창틀까지 올라가는 안정적인 통로가 되어주리라.


부엌 쪽에 나 있는 작은 창문 앞에는 그와 어울리는 조그만 나무 의자와 미니 선풍기를 하나씩 가져다 놓고 흡연공간으로 명명했다. 나름대로 운치 있었다. 그렇게 우리 넷은 모두에게 처음인 새로운 공간을 공평하게 나눠 쓰기 시작했다. 반복되는 습관도 생겼다. 오로와 조로는 아침이 되면 침실 문 앞에 나란히 앉아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나와 동거인 중 한 명이 방문을 열면 침대로 와서 반갑다고 골골송을 부르다가 베개 위에 누워있거나 창틀 위에 앉아 그루밍을 했다. 밤에는 각자의 자리에서 잠을 자고 아침이 되면 함께 모여 체온을 느끼는 의식은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하게 하는 일종의 부적 같았다.


이전 집에서 쌓아두기만 했던 주황색 쌍둥이 의자도 동거인과 나의 책상 앞에 하나씩 꺼내놓았다. 예전에 운영하던 작은 바(Bar)를 정리하며 동업하던 친구와 마음에 드는 가구, 장식품 등을 나눴는데 그때 내가 골랐던 물건이다. 시트 부분과 등받이는 진한 주황색으로 칠해져 있는 나무였고 전체 프레임은 하얗게 도색된 철제였다. 70년대 독일 빈티지였는데 학교 의자처럼 생겼지만 그보다 곡률이 커서 부드러운 인상을 주었고 앉았을 때 품이 넉넉했다. 값비싼 보물도 아니었고 기능이 뛰어나거나 극강의 편안함을 갖춘 의자도 아니었지만 희한하게 나의 애착물이 되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 곁에 있던 한 쌍의 의자들은 이런저런 생활의 변화 끝에 지금은 광주에 내려가 지인이 운영하는 카페 겸 서점 안에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오로에게도 ‘라이너스의 담요’ 같은 애착 의자가 하나 있었다. 의자를 움직여서 다른 장소로 옮기려 하면 오로가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어디로 가져가는지 지켜보다가 의자가 새로 놓인 공간으로 쪼로로 달려가곤 했다. 동거인이 오랜 시간에 걸쳐 사용했던, 일종의 사무용 회전의자인데 천갈이를 할 수 없는 구조라서 세월의 흔적이 많이 묻어 있었다. 청결을 위해 비슷한 새 의자를 사주려고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봐도 그와 같이 등받이 아랫부분이 막혀 안정감을 줄 수 있는 디자인은 없었다. 그 의자에서 잠들었던 오로를 아침에 만나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로 손에 얼굴을 부비곤 했다. 햇살 아래 반짝이는 털이 얼마나 포근하고 부드럽던지. 몇 년의 시간이 더 흐른 요즘, 오로는 그 의자에 통 올라가지 않았다. 왼쪽 다리 한쪽이 간혹 불편해 보였는데 그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대형폐기물 신고를 하고 대문 앞에 내놓았는데 오가며 들여다보니 연두색 패브릭으로 되어 있는 좌판 부분에 여전히 오로의 털이 수북하다.


초여름, 창가


너와 나 무늬


그 해 가을에 타투를 했다. 목 뒤쪽과 등이 이어지는 어느 지점에 내가 느끼는 오로와 조로의 아우라를 한데 섞어 담아낸 고양이를 그려 넣고 싶었다. 타투이스트 작가의 작업실에서 한 차례 상담을 하고 이후 온라인으로 레퍼런스와 스케치를 공유하며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았다. 동거인의 지인이기도 한 작가는 인상적인 스토리, 대담한 구조, 꾹꾹 눌러 담은 듯한 색감을 쏟아내는 회화 작업을 이어왔다.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것들을 발견하는 특별한 눈을 가진 분이었다. 작업실에 놓여있던 아름답고 구슬픈 ‘파란사자인간’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작가님은 꼼꼼하게 나의 생각을 잘 읽어주셨고 끝내 마음에 쏙 드는 고양이 한 마리가 내 몸에 이식되었다. 나는 더 이상 그 존재를 직접 마주할 수 없지만 그는 내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같이 살아갈 것이다. 이전에 방콕 카오산로드의 작은 타투샵에서 새겼던 양쪽 팔의 삼각형들, 앞으로 그려질 다른 그림들도 함께.


등 뒤의 고양이


오로와 조로에게는 각각의 개성 있는 무늬가 있다.

오로에겐 눈과 눈 사이의 칠흑같이 검은 화살촉 무늬와 코 아래 마릴린 먼로 같은 매력점이 있다. 조로는 부드러운 붓에 먹을 잔뜩 찍어서 그린듯한 비대칭 콧수염을 지녔다. 이 무늬들은 매일매일 조금씩 다르게 보여 그 자체가 살아있는 것 같기도 하고 오로, 조로가 짓는 다양한 표정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무늬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어디에서든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이 있다는 건 특별한 일로 느껴진다. 검은 털 사이로 새하얀 털이 돋아나는 나이가 되었지만 무늬들은 여전히, 아니 더욱 매력적이다.


동거인의 손목과 팔에도 타투가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번져가는 검은 고양이 한 마리와 몸을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는 선. 눈부신 아침 햇살을 가릴 때나 한여름 버스 안에서 손잡이를 잡을 때, 그 무늬들은 아름답게 꿈틀거리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꼭 외형적인 무늬가 아니어도 갖고 태어났거나 혹은 하나씩 덧대어 만들어진 그만의 특징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강한 빛을 낸다. 어쩌면 그 빛의 색깔, 온도와 모양새에 따라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이 달라지는지도 모르겠다. 고양이도 사람도.


조로의 콧수염과 오로의 매력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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