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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적어도 되고 안되고는 내가 결정하고 싶어서유

그지 사회 초년생이 아프리카 우물 모금을 한 이유 2

친구의 부고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 가게 되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철이 든 뒤 내 주위의, 또래의 죽음을 접하는건 처음이었다. 막 친한 친구는 아니었다. 그래도 '언제 한 번 밥 먹자' 하고 지나갔던 친구가 이제 세상에 없다는게 기분이 이상했다. 아직도 실감은 잘 나지 않는다.


장례식에 다녀온 뒤, 나에게도 죽음이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류시화 작가의 책에서 본, 류시화를 인도로 떠나게 만들었다는 영화가 생각났다. 어떤 책에서 본건지는 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류시화 작가가 대학생일 때, 언젠가 인도에 가야지 가야지 하고 생각만 하면 미루던 중 본 영화라고 했던 것 같다. 아래는 그 내용을 어설프게 기억해 본덧이다.


배경은 어느 유대인 마을이었다. 이들은 각자 미루는게 있었다. 신발을 고쳐야 하는데, 어디어디를 가야하는데 등등.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괜찮아, 언젠가는 할거야'라고 말하며 미루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나치 독일군이 마을에 쳐들어 왔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잡혀갔고, 순식간에 가스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죽게된 마을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언제나 할 수 있었는데, 난 항상 미루기만 했어. 그 때 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 뒤에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류시화는 이 영화를 본 뒤 바로 인도로 떠났고, 그 후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작가가 되었다.


나도 계속 고민만 하다가 '시도라도 해볼걸 그랬네'라면서 후회하는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마침 일하는 곳에서는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이렇게 쌓은 경력이 정말 도움이 될까? 하고 고민 되던 차에 회사의 일이 밀려서 12시까지 야근을 하는 것에 대한 해결책으로 대표가 '잡지 한달치를 미리 만들어 놓고, 펑크날 것 같으면 그걸 발행하자' 라고 하는걸 듣고 일을 그만뒀다.


때마침 의도치 않게 배수의 진이 쳐졌다. 일을 그만 둔김에 마침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리먼 브라더스 사태가 터지면서 취업문도 좁아졌다.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작이나 해보자 라는 생각에 우선 미술학원을 끊었다. 그동안 돈 쓸 시간이 없어서, 돈을 아끼느라 반년치 월급이 거의 그대로 남아있었던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리고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내가 후원을 하던 NGO에서 번역 봉사를 할 사 람을 찾는다기에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역시나 알바하느라, 돈버느라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그동안 이곳에 한 달에 한 번 기부하는 것 말고는 봉사활동이라는걸 해 볼 여유가 없었다. 일단 얼마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해보고 싶었던것들을 하나씩 해보자 라고 생각하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이들 편지 같은 훈훈한 것을 번역하는거려나...? 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주어진 일은 기대한 것과 조금 달랐다. 나에게 주어진 일은 어려운 단어가 나오는 기후 변화에 대한 리포트였다... 이 번역본이 어떻게 쓰이는지는 알 수 없었고, 일 주일에 한 번 9시부터 5시까지 어딘가에 앉아 일을 하고 돌아오다보니 1주일에 한 번은 그냥 직장에 나가는것 같았지만, 나름 영어 공부한다 생각하고 갔다.


그렇게 일같은 봉사활동을 이어가던 중, 전 세계에서 아이들이 죽는 가장 큰 이유가 '설사병'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했다. 깨끗한 물이 있으면 예방이 가능한거였다.


우리가 쉽게 구할 수 있는 물이 병의 원인이자 치료법이라니...

이를 보고 문득 디자이너들의 엽서를 만들어 팔아 기부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 때 페이퍼(PAPER) 라는 잡지의 바자회에서 사진을 팔아 기부한 데에서 떠올린 아이디어였다.


때는 2007년, 당시 ‘바자회에 참가 하려면 뭐든 팔 걸 가져와라’ 라는 공지에 그 동안 취미로 여기저기 다니며 찍은 사진을 가져가 팔았다. 사실 ‘내 사진이 설마 팔리겠어?’ 싶어 좌판을 깔아 놓고 돌아다니려고 했는데, 예상외로 사진은 다 팔렸고 장사를 하는 동안 바자회는 끝나버렸다.


바자회도 못 보고 열심히 번 돈도 모두 기부하고 와야 했지만, 평범하다 생각했던 내 사진이 인정받는 기분이 들었다. 당시 사진 작가가 되는것도 잠시 꿈꿨지만 '먹고 살기 힘들거야' 하고 시작도 안 해보고 포기했던 터라 그 아쉬움이 조금은 가시는듯 했다.


그리고 그 돈이 어딘가 필요한 곳에 쓰인다고 생각하며 좋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엽서로 만들면 더 잘 팔리지 않을까? 이 들의 홍보 대신 모금을 하자. 목표를 정하면 더 좋을 것 같으니 아이들의 설사병을 예방할 수 있는 식수펌프 하나 만들 수 있는 돈만 모아보지 뭐.’ 그렇게 아프리카에는 깨끗한 물을 선물하고, 모금하는 사람들의 홍보에도 도움이 되는 일을 만들어 보자는 웰던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NGO에 가서 물어보니 식수 펌프는 200만 원이 아닌 1,000만 원이 넘었다.


내가 물었다. “으아니, 왜 그렇게 비싼 거예요?”


답이 돌아왔다. “아, 아프리카에서 만드는 식수펌프는 좀 더 비싸요. 일단 지하수가 다른 대륙보다 깊숙이 흘러 물이 있는 곳을 탐지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요. 그래서 물이 있는지 뚫어보고 없으면 다른 곳을 뚫는 식으로 하다 보니 찾는 데에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 거든요. 게다가 이를 시추하려면 중장비가 필요한데, 아프리카는 그런 인프라를 갖춘 곳이 잘 없어요. 그래서 다른 지역보다 만 드는 데에 비싼 편이에요.”


설명을 들으니 이해는 갔지만 비싼건 변하지 않았다. 일단 거의 포기했다. 1000만원은 지금도 큰 돈이지만, 당시 내 통장에는 100만원도 있을까 말까였다. 당장 학원비랑 생활비도 벌어야 하는데 내가 누굴 돕냐.


그런데, 주위에서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말이 들려왔다. “그래, 네가 이런 걸 어떻게 해. 니 돈 1000만원이나 벌어.”


처음에는 나도 ‘그렇지, 내가 어떻게 해.’ 라고 생각하고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겠거니 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문득 ‘이래서 안돼 저래서 안돼, 우리집은 가난하니까 안돼, 우린 이 대학 출신이니 직장에 가면 과장까지 밖에 못 올라가, 니가 그런걸 어떻게 해 등등. 왜 다들 처음부터 선을 긋고 안 된다는 이야기를 먼저 할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동안 내안에 쌓인것들이 갑자기 터지는 기분이 들었다.


왠지 이러다가 어려워 보이는 일을 만나면 시작해 볼 생각도 안하고 바로 포기하는 사람이 되지는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없고를 남이 결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남이 아니라 내가 결정할 일이었다.


안된다고 시작도 하기전에 선을 긋는 대신, 어떻게 하면 되게 만들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연습이라도 하면 어떨까?

안되어도 좋으니, 적어도 '아 안되는거였구나' 라고 하고 싶어서, 그래서 이 무모한 모금을 해 보기로 했다.



지금이라면 다시 그렇게 무모하기는 안할것 같지만, 당시에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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