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 짧고 굵은 폭발음에 암흑 속에 가라앉아있던 의식이 꿈틀거렸다. 그 소리를 이정표 삼아 지승은 몽롱하게 여기저기 부유하는 정신을 한 군데로 집중해 보려 노력했다.
간신히 무겁게 내려앉은 눈을 깜빡여 봤지만 눈꺼풀 근육의 움직임만 느껴질뿐 시야에 들어오는 거라고는 여전히 어둠뿐이었다.
덫, 그건 분명 덫이었다. 양쪽으로 선 큰 나무 두 그루를 연결한 가늘고 질긴 끈. 궁지에 몰려 정신없이 도망치는 짐승의 퇴로를 방해하는 용도로 간혹 쓰이고는 하던 걸 지승은 어릴적 아버지를 따라 간 산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그 덫에 자신이 당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지만.
정신을 잃기 전 덫에 걸려 경사 아래로 굴러떨어졌던 기억이 떠오르자 이제야 깨달았냐는듯 온몸의 신경들이 고통을 호소해 왔다. 끙끙 신음을 흘리며 겨우 몸을 일으키는 동안 서서히 시야는 어둠에 익숙해져 갔다. 의식이 완전히 또렸해지자 여기저기서 자기주장을 하던 고통들이 뒤통수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덫에 걸려 떨어질 때 머리를 크게 부딪힌 모양이었다. 더듬더듬 뒤통수를 만져보니 피가 나오다 멈춘 듯 찐득한 피가 묻어났다. 상처는 깊지 않은 것 같았지만 이렇게 깜깜한 밤이 되도록 기절해 있던걸 보니 제법 큰 충격이었을 거다. 뇌진탕 증상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증상이 있다한들 딱히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상황을 따져보니 혼자 힘으로 하산하긴 글렀고 경찰을 부르는 것 밀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지승이 있는 곳은 용악산이었다. 이 사실이 배낭을 뒤져 핸드폰을 찾으면서도 계속 지승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입산이 금지된 산을 멋대로 올라왔으니 그에 따른 처벌을 받을 거라는 게 겁이 나는 게 아니었다. 진짜 두려운 건 핸드폰이 있어도 자신의 상황을 알릴 수 없는 처지가 되는 거였다. 바로 지금처럼. 역시나 예상대로 핸드폰에는 어떤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 이런 것쯤은 이 저주받은 산에 오를 때 각오한 일이었다. 다만 이런 식으로 자신이 위기에 빠질 거라는 걸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을 뿐.
일이 이렇게 꼬인 이상 무리하게 하산을 시도하다 더 큰 위험에 처할 필요는 없었다. 차라리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산을 벗어날 방법으르 찾는 게 현명할 거란 판단이 들었다. 순간 지승이 생각에 찬물을 끼얹듯 또 한 번의 커다란 소음이 산을 울렸다. 위협적이지만 낯설지는 않은 소리. 오랜 과거 어디쯤에서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소리였다. 어쩌면 지승을 이 산으로 불러들인 원인이 만들어 낸 소리일지도 몰랐다. 소리의 출처를 찾아 나서기에 몸 상태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상태도 아니었다. 산 속의 밤은 길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느니 작은 단서 하나라도 찾으러 다니는 게 어쩌면 이 긴 밤을 보내기가 더 수월할 것도 같았다. 기껏 저주 받은 산까지 올라와서 이런 꼴만 당하고 아무 소득도 없이 내려간다는 게 솔직히 억울하지 않은가. 어둠 속 소리가 났던 방향을 응시하던 지승이 끝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소리의 근원지에 다가갈수록 땅울 뚫고 자라난 억센 풀들의 키가 점점 더 높아졌다. 덕분에 눈을 뜨고도 감은 것과 다름이 없는 상태의 지승은 오직 감각에 의존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처지였다. 이럴 바엔 그냥 포기하고 돌아설까. 발길이 갈팡질팡하던 그때 근처에서 짐승인지 사람의 것인지 구별하기 힘든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본능적으로 지승이 숨소리를 죽였다. 풀숲 사이에 몸을 숨기고 귀를 기울이니 5미터가량 앞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풀들 사이로 가만히 응시하자 어둠 속에 어렴풋이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키가 크진 않았지만 풍채가 거대한 사람이었다. 지승이 있는 방향에서 등을 돌린 채 큰 어깨를 구부정히 숙이고 바닥의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 덕에 지승은 실루엣에게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3미터 남짓 거리의 실루엣의 측면 쪽으로 다가가자 실루엣의 주인이 손에 쥔 물건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사냥용 엽총이었다. 아마도 지승을 여기까지 이끈 소리의 근원일 것이다.
실루엣은 이 물건의 위험성 따위는 전혀 못 느끼는 어린 아이처럼 엽총으로 바닥의 무언가를 툭툭 두들겨도 보고 찔러도 보다가 들어올려보려는 시도까지 하고 있었다. 얇고 긴 엽총으로 들어올리기는 무리인 무게인지 바닥의 무언가는 엽총 끝에 살짝 딸려오다가도 금세 툭하고 바닥으로 떨어지고는 했다. 어쩐지 바닥에 무엇이 있는 건지 꼭 확인을 해야만 할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달빛이라도 좀 비추면 좋으련만 곧 비가오려는지 구름이 너무 짙었다. 본능이 보내오는 위험 신호에도 불구하고 지승의 발은 실루엣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또다시 바닥에 있던 무언가가 엽총 끝에 딸려올라왔다. 이번에도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금방 바닥으로 툭 떨어져버렸지만 그 형체는 분명 파악할 수 있었다. 축 늘어진 사람의 손.
놀랐다거나 두렵다는 감정 따위를 느끼기도 전에 저절로 뒷걸음이 쳐졌다. 그런데 뒷걸음치던 왼쪽발에 산에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물건이 밟히며 우지끈 부숴지는 소음을 만들어냈다. 이 장소에 왜 리모콘이 있는 거지? 대체 무엇을 컨트롤하는 용도길래? 아무렴 어떤가. 중요한 건 리모콘의 용도 따위가 아니라 바닥으로 향해있던 엽총의 총구가 지승에게로 옮겨왔다는 것이었다.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달빛을 가리고 있던 구름들이 서서히 걷혔다. 구름이 걷힌 달빛에 지승을 향해 총구를 겨누던 실루엣의 실체가 명확히 드러났다. 이제보니 거대한 풍채라 생각했던 몸은 짐승 가죽을 여러겹 둘러 만들어낸 것이었다. 어느 한 짐승이 아닌 닥치는 대로 잡은 사냥 전리품의 가죽을 닥치는 대로 두른 몸. 그리고 멧돼지 얼굴 가죽으로 만든 가면을 뒤집어쓴 얼굴. 지승은 이 기괴한 차림을 한 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야수......."
지승이 자신을 알아보자 멧돼지 가면의 두 눈 구멍 사이로 비치던 안광이 흔들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지승이 달리기 시작했다. 야수의 총구를 피해.
'탕!'
귀청을 뚫을 듯 큰소리가 울릴 때마다 총알에 맞은 나무 파편들이 튀어 오르며 지승의 얼굴과 몸에 상처를 입혔다.
아직 살아있다. 아직 야수의 전리품이 되진 않았다. 어떻게든 이 산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희망이 있을 거다. 빼곡히 들어섰던 풀들이 점차 듬성듬성해지고 있었다. 우선은 이 풀들이 무성한 숲을 빠져나가자. 그리고 야수를 따돌린 후 날이 밝으면 경찰을 부르자. 저 멀리 커다란 고목들이 보였다. 곧게 뻗지 못하고 뒤틀린 모습이 불길해 보였지만 깊이 생각할 틈 따위는 없었다. 총소리가 멀어진 걸 보니 저 나무 근처 숲에서 몸을 숨기면 따돌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드디어 풀숲이 끝나고 고목들이 나타난 순간……
지승을 기다리고 있던 건 검은 구멍이었다. 도망치는 내내 간절히 바랐던 헛된 희망을 비웃듯 끝이 보이지 않는 깊고 어두운 구멍. 뒤틀린 고목들의 역할은 지승과 같은 사냥감을 숨겨주는 것이 아닌, 희망을 품고 찾아오는 사냥감들이 정말에 빠져 갇히게 될 절벽을 가려주는 것이었다.
그제야 지승은 깨달았다. 자신이 야수에게서 도망치던 게 아니었음을. 그저 야수의 사냥감 몰이에 장단을 맞춰주고 있던 것뿐이었다는 걸.
그 예상이 정답이라는 듯 여유롭게 숲을 헤치고 나온 야수가 다시 한번 지승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이렇게 끝나고 마는 건가. 검은 낭떠러지만큼이나 검은 총구의 구멍을 보며 지승의 머릿속에는 야수를 알고 난 지난 15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방아쇠를 쥔 야수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숲에서 또 낯선 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두 사람을 향해 접근하는 소리가. 위협적인 속도에 야수는 뒤를 돌아봤고 그 찰나가 지승에게는 유일한 기회였다. 야수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아차 싶은 야수가 다시 재빨리 지승을 향해 몸을 돌리며 방아쇠를 당겼지만 이미 늦었다. 사냥감이 되기를 거부한 지승의 몸은 이미 절벽 아래 검은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