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ay

by 홍진희

빛조차 빠져나갈 수 없는 완벽한 어둠. 거대한 블랙홀이 빛을 빨아들이듯 절벽 아래 어둠은 지승을 아래로 아래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지승은 바닥을 향해 추락하는 게 아니라 어둠 속으로 흡수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기분도 잠시. 빠르게 어둠 속으로 잠식되어 가던 지승의 뒷덜미를 무언가가 거칠게 낚아챘다. 곧이어 몸이 덜컹거리더니 반동과 함께 오른쪽 겨드랑이에 둔탁한 고통이 느껴졌다.

비스듬히 엎드린 자세로 공중에 멈춰 선 몸. 더듬더듬 자신을 낚아챈 등 뒤의 존재를 만져보니 절벽에서 튀어나와 위로 솟은 나뭇가지였다. 용케도 배낭의 오른쪽 어깨끈이 나뭇가지에 걸려 추락을 막아준 것이다. 아래는 어둠이 여전히 지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뜻밖의 상황에 어떤 대책을 세울 새도 없이 배낭의 어깨끈이 투둑 소리를 내며 헐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놀란 지승이 나무를 붙잡자 나뭇가지에서도 균열음이 들려왔다.

이 나무에 매달려 살아날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지만, 나무가 부러지면 살아나갈 확률이 전혀 없다는 건 분명했다. 그러자 다급해진 지승의 머릿속에 배낭 사이드포켓에 끼워둔 랜턴이 떠올랐다. 등 뒤의 사이드포켓을 만져보니 다행히 랜턴이 떨어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초조한 지승의 손길을 따라 랜턴의 불빛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이곳저곳을 비추던 랜턴이 한 곳에 멈춰 섰다. 지승의 발밑 아래 절벽을 뚫고 튀어나온 또 다른 나무. 발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지금 매달려있는 나무보다 지승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 것처럼 더 튼튼해 보이긴 했다. 문제는 하나. 과연 저 나무를 잡을 수 있느냐. 만약 실패한다면이라는 가정은 존재할 수 없었다. 잡으면 살고 놓치면 죽는다, 두 가지 결론뿐이었다. 그다음은 없다. 솔직히 나무를 붙잡는다 해도 과연 그다음을 기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이 높이에서 자력으로 절벽을 올라가는 건 불가능했고, 전자기기가 작동하지 않는 곳이니 구조요청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대로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추락하고 싶지는 않았다.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살기 위해 발버둥 처보고 싶었다.

아래쪽 나무를 붙잡기 위해서는 안타깝지만 배낭은 포기해야 했다. 랜턴의 고리를 바지의 허리춤에 단단히 고정 후 조심스레 배낭에서 팔을 빼 철봉에 매달리듯 나뭇가지에 완전히 의지해 매달리자 아까보다 더 큰 균열음이 들렸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하나, 둘. 반동을 이용해 몸을 흔들며 아래쪽 나무에 착지할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이제 손을 놓고 발아래 나무를 붙잡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타이밍 적절하게도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나무가 부러졌다.

지승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살기 위해 눈앞의 나무를 향해 최선을 다해 팔을 뻗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나 쉽지,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기껏 나무를 잡는 건 성공했지만 추락의 가속도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저 아래 어둠은 강한 힘으로 지승을 끌어당겼고, 간신히 나무를 잡았다 생각하는 순간 지승의 손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미끄러지고 말았다.

끝이다. 이제 바닥까지 추락해 산산이 부서지는 미래만이 지승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야수를 만났음에도, 야수의 사냥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아내고도 지승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다. 죽음을 앞에 둔 지승을 제일 먼저 덮친 건 두려움보다 더 큰 허무였다.


모든 걸 덮어버릴 것 같던 묵직한 허무가 돌연 끔찍한 고통의 등장과 함께 밀려나버렸다. 고통은 오른쪽 다리에서 먼저 시작되었다가, 그 충격에 뒤로 넘어지며 부딪힌 팔꿈치와 등, 그리고 전신으로 이어졌다. 벌써 끝났나? 그 깊던 어둠이 이렇게 빨리 끝날 수 있는 걸까?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한동안은 손도 까딱할 수 없었다. 움직이는 걸 포기한 채 어둠 속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에 가려진 달이 보였다. 한참 동안 달을 보던 지승은 문득 깨달았다.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3미터가량 위에 절벽을 뚫고 뻗어 나온 나무의 형태가 보였다. 조금 전 지승이 매달리려다 놓쳤던 나무였다. 나무와의 거리로 보아 아마도 절벽에 튀어나온 큰 바위에 운 좋게 떨어진 것 같았다. 잠시 후 자리를 잡고 앉아 주위를 비춰보니 바위가 생각보다 넓었다. 바위 아래를 내려다보니 여전히 까마득한 어둠뿐이었다. 이 바위가 아니었다면 지승은 저 아래에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상태로 존재하고 있었을 거다.

천운이라 생각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절벽 위로 올라가지 못하면, 저 아래로 떨어져 한 번에 숨이 끊어지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겪다 천천히 죽어갈지도 모른다. 어쩌면 머지않아 이 바위 위에서 고립된 자신을 견디지 못하고 제 발로 뛰어내릴지도 모르고.

어차피 전자기기가 작동하지 않는 곳이었지만 절박한 상황이 되자 배낭 안에 있던 핸드폰이 못내 아쉬웠다. 누군가 이 절벽 아래의 지승을 찾아낸다는 건 절벽 아래 추락하다 바위 위에 떨어져 살아남은 것만큼의 기적이 또 한 번 이루어져야 가능할 것 같았다. 구조를 기다리느니 저 돌벽을 타고 오르는 방법을 찾는 게 차라리 현실성이 있는 방법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어쨌든 아직 살아있으니 뭐든 해보자는 심정으로 랜턴을 켜고 암벽 쪽으로 다가서는데, 암벽 한쪽 구석의 검은 덩어리가 지승의 눈에 띄었다. 흙더미가 뭉쳐있는 것 같기도 하고 풀들이 자란 흔적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별거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암벽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원인 모를 긴장과 공포가 자꾸만 지승의 발목을 잡아끄는 것 같았다. 어쩌면 본능이 지승에게 전하는 경고일지도 몰랐다. 거친 화강암과 흙으로 이루어진 암벽과는 너무도 이질적인 형체와 질감을 가진 저 검은 덩어리의 실체는 이곳에서 지승이 가장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을 존재일지 모른다는 경고.

어느새 두 눈은 어둠에 익숙해져 있었다. 암벽에 기대어 있는 검은 덩어리가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다는 걸 인식할 정도로. 그리고 낡고 바랜 옷가지 사이로 보이는 것들이 사람의 뼈라는 것도.


자신보다 먼저 이 바위에 추락한 시신을 마주한 지승의 다리가 맥없이 풀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그 바람에 랜턴의 불빛이 꺼지며 주위는 다시 어둠에 휩싸였다. 들리는 건 오직 자신의 거친 숨소리뿐, 보이는 건 아득한 어둠뿐이었지만 지승은 저 어둠 너머 자신의 미래와 다름없는 존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생과사가 넘나드는 곳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왔고 시신을 본 게 처음이 아니었지만 왠지 바로 앞의 백골사체를 마주하는 건 두려웠다. 차라리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이 이 순간에는 더 필요한 것 같았다. 그렇게 자신의 숨소리만 의식하며 어둠을 응시하던 그때 갑자기 작은 불빛이 번쩍였다. 환각인가? 헛것을 본 게 아니라는 듯 또다시 불빛이 반짝이며 익숙한 기계음까지 들렸다.

그럴 리가 없다 생각하면서도 지승은 다시 랜턴을 켜고 불빛이 보이던 곳을 향해 비추었다. 핸드폰. 불빛은 분명 백골사체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핸드폰에서 나오고 있었다. 사체의 상태로 보아 핸드폰은 아주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사체의 손에 붙들려 있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전원이 들어오다니 지승이 미쳐서 환각을 보는 게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정신이 이렇게 빨리 무너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따지고 보면 충분히 미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왕 미쳤다면 여기서 더 미친 짓을 하는 것도 별 문제는 아니지 않나?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두려움도 이미 사그라들었다. 그러자 혹시 모를 기회를 놓칠지 모른다는 초조함에 재빨리 전원이 켜진 핸드폰을 잡아 뺐다. 하지만 사망 직전까지 부여잡고 있었는지 사체의 오른손에 들린 핸드폰은 쉽게 빠지지 않았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이 사람에게도 핸드폰은 죽기 직전 마지막 희망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지승도 마찬가지였다. 애써 연민과 불편한 감정을 억누르며 지승은 손가락 뼈를 으스러지지 않게 조심히 펴내고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역시나 전원이 들어와 있었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제일 먼저 할 일은 119를 누르는 거였다. 기적처럼 구형 핸드폰의 전원이 들어왔듯이 기적처럼 전화가 연결되길 바랐다. 하지만 아무리 통화 버튼을 눌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믿지 못할 지금 상황이 기적이라 생각했었는데 사실 더 큰 좌절을 주려는 신의 저주 같은 건 아니었을까? 안 될 걸 알면서도 119와 112에 연달아 몇 번이고 전화를 걸어봤지만 모두 허사였다.

"씨발!"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아닌 어쩌면 존재하는 모든 것을 향한 것일지도 모를 분노가 터져 나왔다. 차라리 핸드폰이 없었다면 이런 강한 분노를 느끼지 않았을 터였다. 망할 핸드폰만 아니었다면. 지승이 화를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바닥에 던져버리려는 순간 핸드폰의 화면이 눈에 띄었다. 핸드폰 주인이 생전에 연락을 했던 통화 목록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핸드폰은 처음 봤을 때부터 화면에 통화목록을 띄우고 있었다. 방금 전원이 켜진 핸드폰에서 가능한 일인가? 그것보다 조금 전 전화를 걸었던 119와 112 번호는 어째서 통화목록에 뜨지 않는 거지? 하지만 이미 하루 동안 지승은 믿을 수 없는 일들을 너무도 많이 겪었다.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오래 남을 여유 따위가 없었다. 확실히 자신이 미친 거라 여기면서도 지승은 통화목록 제일 첫 번째 번호 옆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물론 전과 달리 어떤 기대도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토록 바랐던 신호음. 처음으로 신호가 울렸다.

제발 착각이 아니기를. 누구라도 좋으니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던 그때 신호음이 끊겼다. 곧이어 들리는 상대방의 떨리는 숨소리. 분명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할 말과 해야 할 말들이 많았지만 당장 지승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도와주세요."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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