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7일(1)

by 홍진희

자정을 넘긴 인평시는 정지된 모노톤의 풍경사진처럼 보였다. 듬성듬성 선 가로등의 미미한 주황빛이 이 도시가 아직 살아있다고 호소하고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불빛마저 생기 없는 사진처럼 보일 뿐이었다. 모든 게 멈춰있는 도시에 균열을 내며 성급하게 달리는 차 한 대. 운전석의 해인은 자꾸만 힘이 들어가는 액셀 위 오른발에 신경을 쓰며 애써 초조함을 달랬다.


"아빠를 찾은 것 같아요."

순규에게 전화를 건 해인의 첫 말이었다. 무작정 꺼낸 말에 순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뒤늦게 해인이 방금 전 남자와의 통화에 대해 이야기하려 하자 경찰서로 오라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을 뿐.


지난밤 11시 49분. 그토록 기다려 온 전화였는데도 해인은 선뜻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해지된 핸드폰 화면에 뜬 '아빠'라는 단어가 현실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실 테이블에 강우의 사망신고서를 놓아둔 상태로, 죽었을 거라 믿었던 아빠가 죽은 것과 다름없는 핸드폰에 전화를 걸어왔다는 게 스스로의 정신상태를 의심할 정도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해인은 핸드폰만 해지했을 뿐 혹시나 올 강우의 소식 때문에 번호를 바꾼 적은 없었다. 실제로 강우가 전화를 걸었어도 울려야 할 건 이 낡은 핸드폰이 아니라 거실 가방에 넣어둔 현재 사용 중인 핸드폰이어야 했다. 하지만 과거 강우의 전화를 놓치고 15년을 후회와 자책 속에 살았다. 해인의 정신에 문제가 생기거든 이해할 수 없는 기계의 오류가 생겼든 결국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있을 수가 없었다.


"도와주세요."

어느 날 갑자기 강우가 전화를 걸어와 도움을 요청할지 모른다는 상상을 하고는 했지만, 현실에서 도움을 요청한 상대는 강우가 아닌 낯선 남자였다.

"누구세요? 어떻게 이 번호로 전화를 걸었어요?"

해인은 강우의 핸드폰을 해지하지 않았다. 그러니 강우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면 당사자인 강우이거나 강우의 핸드폰을 손에 넣은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어느 쪽이든 강우의 실종을 해결하는데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가느다란 희망이 피어오르는 동시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이 상황이 지난 15년 동안 해인이 겪었던 고통과는 또 다른 상처를 남기지는 않을지 두려움이 일었다.

강우의 실종 후, 해인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이타적이고 타인의 고통에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됐다.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이 야수를 추적하다 실종된 형사의 신변을 걱정했고, 혼자 남겨진 고등학생 딸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고통을 지루한 삶의 활력을 불어넣는 자양분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뉴스에 야수의 검거소식과 함께 강우의 실종 소식이 전해진 후 셀 수 없이 많은 제보들이 있었다. 경찰뿐 아니라 공개된 적 없는 해인의 전화번호까지 알아낸 사람들이 강우의 행방을 알고 있다며 연락을 해오는 일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더러 도움이 될만한 제보도 있었고 착각이나 오해에서 비롯된 제보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관심을 끌기 위한 거짓 제보이거나 피해자를 조롱하는 악의적인 가학행위였다. 기대를 품었다 실망하고 좌절하는 일이 수없이 반복되자 어느 순간 해인은 야수만큼이나 악의에 가득한 전화기 너머 익명의 제보자들을 증오하게 되었다. 그들 중 상당 수가 어디선가 마주쳤을 땐 선량한 얼굴을 하고 있을 거라는 걸 알기에 늘 사람을 경계하고 의심하는 버릇이 생긴 건 덤이었다. 그러니 강우의 번호로 온 전화라 해도 마냥 기대가 생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용악산에서 조난을 당했어요. 경찰이나 119에 신고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는데 올라오는 길에 낡은 암자를 봤으니까 암자 근처 절벽을 수색해 달라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떨어지기 전 검고 큰 나무들을 봤어요. 일반적으로 보던 나무들이 아니고 이리저리 뒤틀려 있는 특이한 나무였으니까 수색을 하면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상대는 해인의 질문에 대한 답변 대신 빠른 속도로 자신의 이야기만을 늘어놓았다.

"이 번호로 어떻게 전화를 걸었냐고요."

해인의 차갑고 날 선 말투에 남자가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흥분한 듯 이야기를 쏟아내던 남자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절벽 아래에서 시신을 발견했어요. 사망한 지는 상당히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데 손에 이 핸드폰을 쥐고 있었습니다."

강우의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던 시신. 그 말을 듣는 순간 해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해인이 아무런 말이 없자 초조하기라도 한 건지 남자의 말이 조금 빨라졌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이 산에서 야수를 만났어요. 야수한테 쫓기다가 이 절벽 아래로 떨어진 겁니다."

그럼 그렇지. 남자의 말에 해인은 헛웃음이 크게 나오는 걸 감출 수 없었다. 악질적인 장난을 치고 싶어 하는 자가 아직도 남아있었나 보다.

"그거 참 신기하네요. 오늘 병원에 실려간 야수를 용악산에서 만났다니. 축지법이라도 쓴 걸까요?"

그 말에 잠시 말이 없던 남자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현명우가 또 병원에 있나요?"

아무래도 남자는 장난을 멈추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봐요. 어떤 수작을 부려서 이 번호를 얻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나한테 이런 장난쳤던 사람들 전부 처벌받았어요. 당신이라고 다를 거 같아?"

"대체 어느 누가 이런 장난을 칠 수 있는데요? 야수가 용악산에 있다는 말이 믿기지 않는 건 알지만 제 눈으로 똑똑히 봤단 말입니다. 저 말고도 피해자가 또 있었고요. 야수가 누군가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빨리 경찰에 알려야 돼요."

정말 억울한 듯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지금까지 거짓 제보를 했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질이 나쁜 인간이라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급하면 나한테 전화를 할 게 아니라 경찰에 직접 연락을 했어야죠."

어떤 시시한 변명을 할지 기대하고 있던 해인에게 남자는 변명 대신 질문을 던졌다.

"이 핸드폰 주인의 따님이신 거죠?"

해인은 굳이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는데 남자도 딱히 대답을 원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저라고 왜 경찰이나 119에 먼저 연락을 안 했겠어요. 당연히 제일 먼저 했죠.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연결이 되는 건 이 번호 하나뿐이었어요. 저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되는데 정말로 우리 딸이라고 저장된 이 번호만 유일하게 연결된 거라고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이미 해인은 해지된 핸드폰으로 연락이 오는 믿을 수 없는 상황을 경험 중이었다. 이 사실이 평소였다면 당장 끊었을 전화를 붙잡고 남자의 계속되는 이야기를 듣게 만드는 이유였다.

"시신이 여기 아주 오랫동안 있던 것처럼 보여요. 백골화가 된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 사망 원인이나 시점은 제가 짐작할 수 없지만 입고 있던 티셔츠가 운동복 같은데…… 노스캅이라고 적힌 글씨가 보여요."

축구를 좋아했던 강우는 인평경찰서가 소속된 경기북부경찰청의 축구 동호회의 회원이었다. 바쁜 와중에도 어찌나 열심이었는지 축구에 관심이 없던 해인도 강우가 자주 입던 동호회 유니폼 때문에 팀의 이름을 외울 정도였다. 해인은 강우의 유니폼 가슴 언저리에 적인 '노스캅'이라는 영어로 된 글자를 보며 누군지 몰라도 팀명을 지은 사람이 촌스러운 작명센스를 가졌다고 늘 생각했었다. 강우가 실종되던 날에도 그 유니폼을 입고 집을 나섰다는 걸 해인은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언론에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믿어지진 않지만 확인해 볼 가치가 있는 일 아닌가.

"좋아요. 경찰에 신고해 줄게요. 만약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끝까지 찾아내서 벌을 받게 할 거니까 각오하는 게 좋을 거예요."

해인의 협박에 남자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바라는 겁니다. 무슨 수를 써서든 경찰이 절 찾아주는 거. 제 이름은 이지승이고 서울 세진대병원에서 외과 전공의니까 병원에 연락해 보면 신원을 확인해 줄 겁니다. 정 못 믿으시겠다면 주민번호라도……."

남자의 말이 갑자기 뚝 끊어졌다. 황당한 해인이 다시 전화를 걸어보려 했지만 이용할 수 없는 네트워크라는 익숙한 경고 메시지만 다시 화면에 등장했다. 시계를 보니 정확히 자정. 남자와 통화를 하는 사이 어느새 6월 27일이 되어있었다. 마치 꿈을 꾼 기분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한 시가 급했다. 해인은 생각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고 즉시 순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막 3시를 넘어가는 시각. 이 시각에 당직자를 제외한 강력반 팀원 다섯 명 전원이 모여있는 경우는 인평경찰에서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거기에 서장까지 모인 건 야수가 활동했던 15년 전 이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 시각에 모두를 불러 모으려면 중차대한 사건이어야 함이 분명했다. 물론 용악산에서 조난을 당한 사람이 강우의 시신을 발견했다면 그건 중차대한 일이 맞다. 게다가 강우의 번호로 전화를 했다면 조사를 해볼 만한 가치도 있었다. 하지만 감옥에 있는 야수에게 쫓기다 조난을 당했고 심지어 해지한 지 12년이 지난 핸드폰으로 전화를 받았다는 소리를 한다면 믿을 수 있는 경찰이 과연 있을까? 예상은 했지만 남자와 통화했던 내용을 전달하면 할수록 불신이 배어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해인은 역시 통화를 했던 구형 핸드폰을 가져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인아, 안 그래도 이슈저널에서 네가 현명우 얘기하는 거 봤다. 나도 화가 나서 미치겠는데 너는 더했겠지. 그래. 스트레스가 심한 건 이해하는데 그렇다고 꿈인지 현실인지도 구별 못하면 안 되는 거잖아. 네가 이렇게 정신 놓고 사는 거 알면 강우 형님 속이 어떻겠냐?"

강력반 반장인 민하는 신참 시절부터 강우의 파트너로 함께 근무했던 후배였다. 강우의 동기이자 이제는 서장이 된 순규와 민하는 해인이 어린 시절부터 보아왔기에 아직까지도 삼촌이라 부르고 연락을 하며 지내는 사이였다. 그나마 다른 경찰들보다 해인을 바라보는 순규와 민하의 시선에 짜증이 덜하다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일 거였다. 해인 역시 강우가 실종된 후 두 사람이 강우의 빈자리를 채워주기 위해 노력했다는 걸 알고 있기에 민하의 타박이 서운하다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

"삼촌 설마 저를 꿈이랑 현실도 구분 못하는 바보로 아는 거예요? 정말 전화를 받았어요. 보세요. 여기 통화목록……"

핸드폰의 통화목록을 열어 내밀던 해인의 말문이 턱 막혀버리고 말았다. 분명 10시 49분에 전화가 왔었는데 통화목록에는 15년 전 강우가 전화를 걸었던 기록을 마지막으로 어떤 통화내역도 추가된 게 없었다. 그러고 보니 15년 전에도 전화가 왔던 시간이 10시 49분이었다는 걸 해인은 그제야 깨달았지만 당장은 이런 우연을 따져볼 상황이 아니었다.

"분명 전화를 받았는데…… 너무 오래돼서 고장이 났나 봐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헛웃음 소리에 해인의 귀에 열이 올랐다. 스스로 생각해도 없어 보이는 대답이었다.

"통신사에서 연락이 왔는데 2010년 6월 이후로 유강우 형사님 핸드폰에 신호가 잡힌 적은 단 한 번도 없답니다."

통신사에서 온 팩스를 손에 든 강력반 막내 윤기가 쭈뼛거리며 다가와 말하자 해인을 보는 경찰들의 시선이 더욱 싸늘해졌다.

"전 정말 전화를 받았어요.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정말 전화가 왔었다니까요."

"예. 그러시겠죠. 방송에 얼굴까지 나오는 기자님이 일부러 그러신 건 아니시겠죠. 그러니까 착각한 거다 결론내고 넘어가죠."

비번인데 불려 나온 경장 영진이 적대감을 숨기지 않고 비아냥거렸다. 그렇다고 영진의 말대로 물러나기에는 걸리는 것이 너무 많았다.

"왜 기록이 안 남은 건지 그런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더라도 어쨌든 최대한 빨리 용악산에 사람을 보내야 돼요. 그 사람이 정말 조난을 당한 거라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우선 구조 시도를 해보고 장난전화였다면 그때 찾아서 처벌을 내려도 늦지 않잖아요."

"그 사람은 대체 용악산을 왜 간 건데? 입산금지라고 떡하니 써붙여놨으니 몰랐을 리도 없을 텐데. 그것도 한밤 중에 거기 왜 있는 거야. 대한민국 사람이면서 용악산 위험한 것도 모르고 그런 짓을 했대?"

이제 민하의 목소리에도 점점 연민이 사라지고 짜증이 강해져 갔다.

"그런 이유도 나중에 물어봐도 되는 거잖아요. 사람부터 구해야죠."

"근거 없는 이유로 경찰력을 함부로 낭비할 수 없어."

해인의 호소에도 순규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민하를 비롯한 다른 경찰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이들을 설득할 다른 단서가 필요했다.

"세진대병원 외과전공의 이지승. 정말 자기 이름인지는 몰라도 신원까지 밝히며 구조요청을 했어요. 신원조회를 해보면 되잖아요. 지금 바로 해주세요."

기분 탓이었을까? 순간 해인은 순규와 민하가 미묘한 표정으로 시선을 주고받는 걸 느꼈다.

"저도 그 사람 말을 다 믿는 건 아니에요. 야수를 봤다는 말을 어떻게 곧이곧대로 믿겠어요. 하지만 두려운 상황에 처해서 야수로 착각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잖아요. 왠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고요. 경찰이잖아요. 경찰은 만의 하나의 가능성이라고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면 안 되는 거잖아요."

어쩌면 순규와 민하의 반응이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해인은 더 간절하게 호소했다.

"세진대병원에 확인했는데 이지승이라는 전공의가 근무하고 있긴 하답니다. 어제 오후에 급히 휴가를 내서 현재 병원에 없고요."

해인에게 자신을 강력반 소속 경위라 소개했던 서린이 불쑥 뒤에서 끼어들며 말했다. 해인이 지승의 신상을 말할 때 슬그머니 자리를 떠나더니 그 사이 세진대병원에 확인을 해 본 모양이었다.

"유기자님이 거짓말을 한다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지승이란 사람이랑 통화를 했다는 확실한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이는 건……"

"가보죠."

곤란하다는 얼굴로 말하는 강력반의 또 다른 경위 태수의 말을 서린이 끊으며 순규에게 요청했다. 순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해인이 초조하게 순규의 허락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데,

"제가 이지승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직접 가서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겠죠."

부정적인 소리만 하던 민하가 돌연 태도를 바꾸었다. 민하와 서린이 순규의 허락을 기다리는 가운데 다른 팀원들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순규의 거절을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그렇게 모두에게 초조한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순규가 결심한 듯 해인의 두 눈을 마주 보았다.


-계속-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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