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리스트를 하나하나 실천하다 보니 어느덧 한달살이 원룸의 중반까지 와있다. 돌이라도 씹어 먹을 것처럼 대단한 기세로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는데 중반을 넘어서니 갑자기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현실적인 문제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고 앞으로 나가지도, 뒤돌아 갈 수도 없는 말 그대로 '진퇴양난'의 순간에 놓여있다. 내가 책임져야 할 내 인생이 무섭다.
퇴근 후 밥을 하고 설거지 하고, 집 정리하고 애들 과제 봐주고, 빨래 돌리고 개키고.. 가사노동이 사라진 지금 이 시간. 그에 대한 분노를 곱씹는 건 내 정신건강에 너무 해롭고 시간이 아깝다. 나는 이 시간을 충분히 누려야 한다. 그에 대해서가 아니라 나에 대해서 생각을 집중에 보자. (나에 대해 생각하면 필히 모든 에피소드에 그가 출현하겠지만 말이다^^;)
에피소드 1. 콩나물 한 박스와 1680원짜리 계란 한 판
한동안 남편의 취미는 마트 전단지 보기였다. 퇴근길 집 근처 2~3군데 마트에서 할인행사 전단지를 가져와 그 주의 세일 품목과 그날의 특가 할인상품에 동그라미를 친다. 그리고 나에게 주문을 한다. O요일엔 OO마트에서 콩나물 한 박스를 사. 한 박스에 천원이야. O요일엔 ##마트에서 계란사. 계란 한 판에 1680원이래. 목살은 무슨 요일 무슨 마트. 간장은 무슨 요일 무슨 마트... 쉘라쉘라 쉘라~#%@#@@
남편의 회사는 지하철역 한정거장. 걸어서는 15분 거리.
나의 회사는 6호선에서 2호선으로. 2호선에서 다시 마을버스로 갈아타고 55분을 가야 하는 거리.
출퇴근 시간이 자유로운 남편회사.. 9시 출근 6시 퇴근의 룰이 있지만 수시로 이사회나 경영전략회의 준비로 새벽 출근이나 늦은 밤 퇴근이 잦은 나의 회사.
잠자는 시간을 쪼개가며 집안일과 회사일을 감당하고 있는 나에게 남편은 수시로 전단지를 내밀며 내게 미션을 주었다.
퇴근길 마을버스 바로 앞에 있는 마트는 전단지 리스트에 없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동선이 맞지 않는 마트에 십 분 이십 분씩 더 걸어가 그 미션들을 수행했었다. 왜.. 그랬을까. 머릿속에서는 ' 요즘 나같이 사는 여자가 있을까? 새벽 배송에, 신선 배송에 얼마나 편한 세상에서 들 살고 있는데.. 나는 왜 이러고 있지? 콩나물을 왜 박스 채 사야 하는 거야? 계란 한판 가격이 저럴 수도 있다는 걸 다른 사람은 알까? 야..니가 사와. 나 시키지 말고.. 물건 가격 비교하며 들었다 놨다 할 시간도 없다고 나는!! 나는 24시간이 모자란단 말이야!' ->밖으로 뱉어내지 못한 마음의 소리^^;
(그 당시 어린이집에 다니는 막내의 하원을 남편이 담당하고 있었기에, 바쁜 내 회사일 때문에 내가 해야 할 일을 남편에게 맡겼다는 죄책감이 있었다. 그놈의 죄책감!! 개나 줘버릴걸!! 알뜰살뜰 돈을 모으는 남편을 보면서도 일반적인 소비패턴 조차 비정상적으로 느껴지며 남편에게 맞추려고 노력한 나 자신의 주대 없음이 창피할 정도다. 남편의 가치관은 나의 가치관보다 나아 보였다.. 30대의 나는, 그랬었다.)
콩나물 한 박스를 사본 적이 있는가?
사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상자 속에 꼭꼭 눌러 담긴 엄청난 양을! 삶아서 무치고, 국을 끓이고, 콩나물밥을 하고, 콩나물 불고기를 하고, 소분해서 시누이랑 아주머니 댁에 나눠드려도 남는다.
콩나물 한 박스를 산 그 주는 영락없이 콩나물의 노예
가 되어버린다. 천 원주고 한 봉지 사면 깔끔하게 한번 맛나게 먹고 말 것을, 천오백 원 주고 한 박스 사면 콩나물 상해 버릴까 전전긍긍 일주일 동안 내 머릿속엔 콩나물만 가득 찬다.
남편은 콩나물 한 박스의 목적이 우리 가족을 위해서, 우리 가족의 미래를 위해서 라고 한다.
우리 가족의 미래를 위하는 일인데, 나는 스멀스멀 화가 난다. 이런 내 마음이 잘못된 마음이고, 못된 마음인 것 같아서 고개를 도리도리. 열심히 콩나물 반찬을 만든다.
(일주일에 한 번씩 거하게 반찬을 만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아마 저 시절.. 나는 끔찍이 열심히 살았으므로, 내 에너지를 모두 소진시켜버렸던 것 같다.)
어느 날 조금 늦은 퇴근길.. 남편에게 계란 한 판 할인하는 마트 정보를 받았으나, 아이들이 배고프다는 성화에 마을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있는 마트에서 정상 가격을 주고 계란 한판을 샀다. 집에 들어서자 눈썰미 좋은 남편이 쏘아붙인다."야! 너 OO마트에서 계란 왜 안 샀어! 너 집 앞에서 사 왔지?"
귀신같은 인간.. 내가 집에 도착한 시간을 계산해보고 그쪽 마트에 결코 들리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날도 나는 쭈글이가 됐다. "그냥 먹어! 시간이 아깝다! 가끔씩은 이렇게도 사 먹고 저렇게도 사 먹는 거지.. 그걸 가지고 뭐라 하냐? 퇴근길 애들 배고플까 과 뛰어온 사람에게!"-> 이것도 마음의 소리임.
왜! 왜 말을 못 해! 너 벙어리니!
결혼생활. 아니 인간관계. 또는 그냥 인생에서 싸움을 피하지 말아야 할 순간이 있다. 콩나물 한 박스를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사야 할 때가 바로 그 순간이다! (자의면, 아무 상관없다. 한 박스를 사던 두 박스를 사던.. 백 박스를 사던지.)
싸움을 피하지 말아야 했던 첫 번째 에피소드를 마무리하며,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에 당당한 소신이 부족했던 나 자신을 반성해 본다. 너만 옳은 게 아니고 나도 옳다. 때론 나만 옳은 게 아니라 그도 옳다. 나는, 제대로 소통하고 갈등을 풀어나길 포기하고 그냥 그에게 맞추고 길들여지는 것으로 평화를 유지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의 생각과 욕구는 [평화]를 위해 꾹꾹 내리눌려 압축되어 버렸다. 원래 크기가 얼마만 했던 욕구인지 가늠도 못하게 압축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