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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Aug 01. 2021

안녕, 제주의 숲

내일이면  여행이 끝나요.

폭우가 예고되어 있는데, 비자림행을 강행했다.

7년 전 친구와 함께 왔던 제주도의 비자림은 신비롭고 영험한 숲길의 강력한 기억을 남겼기에, 딸들과 꼭 같이 걷고 싶었다.


제주도의 폭우는 대단했다. 우루르 쾅쾅.. 요란한 소리를 동반한 하늘에서 쏟아지는 거센 물줄기. 아이들과 우비를 챙겨 입고 천년의 숲 비자림을 누비고 다녔다. 헤어부터 의상까지 잔뜩 멋을 낸 딸들이 비에 젖은 운동화에 짜증이라도 낼까 살짝 긴장했는데 다행히 빗속 제주의 숲을 함께 즐겨주었다.




누군가에게 내가 경험했던 좋은 기억을 전해주고 싶고, 그 기분을 함께 누릴 때 사람은 행복함을 느끼게 된다. 아름다운  풍경을 볼 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좋은 음악을 들을 때.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게 되고  '아.. OO랑 같이 와야겠다.'생각한다.


나와 남편은 이 감정에서부터 엇나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는 좋은 곳 맛난 음식 앞에서 남편 생각이 나지 않는다. 혹여나 그 이름, 그 얼굴이 떠올려질 때면 도리도리 도리질을 하게 되는 나.


생활 습관부터 삶의 가치관, 자녀양육 방식, 모든 게 다른 우리 부부는  이기고 지기를 반복하면서도 서로에게 아름답게 스며들지를 못했다. 물과 기름처럼 오묘한 테두리를 만들며 둥둥 뜨거나 밀려나기 일수였다.


"너 같은 여자랑 살 수 없어.

야. 그럴 거면 이혼해. "

이혼이라는 단어를 수시로 던지는 남편이 가히 폭력적으로 느껴졌었고, '너 같은.. 너 같은'이라는 표현이 그렇게 슬플 수 없었다.

이혼, 이혼, 머릿속에만 띄어 놓았던 단어인데, 이혼 서류를 먼저 만들어 간직하고 있었던 건 남편이었고

그 문서를 발견하고 바라봤을 때 내 감정은 참으로 처참했었다. 누군가가 나를 밀어낼 때의 참혹함.

영원한 내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아 이렇게 끝이 날 수도 있는 관계였구나.. 를 느꼈을 때의 파괴적 감정.

(싸움이 진정되고 나면, 남편은 늘 사과를 했었다. 홧김에 나온 말이었다고. 자기 성질 알지 않냐고.. 성질 못된 거, 좀 이해해달라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몇 달 전 싸움에서 짐을 싸들고 집을 나간 것도 남편이었다. 사실.. 이젠 아무런 감흥이 없다. 편했다. 영영 들어오질 않길 바라기도 했다.


남편은 그저 다혈질이라 욱해서 그런 말과 행동을 했었을까? 싸움이 깊어지면  ' 엄마랑 살래, 아빠랑 살래' 아이들에게 물어  온 집안을 눈물바다로 만드는 남편을 보며... 남편은 애와 어른의 중간쯤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니다. 아이에 더 가까운 것 같았다. 본인의 감정과 욕구에 늘 충실한 사람. 상대의 입장이나 기분, 상대의 배려 따위는 거저 얻어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 아이는 늘 어른에 비해 상대적 약자인데, 아이들에게도 종종 어른의 권력을 휘두르는 미성숙한 사람.  내 눈에 각인된 남편은 이런 모습이다.



이 아름다운 곳에서  눈물이 났다. 내일 이면 현실로 돌아가야 하기에...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곳 제주에서 처절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는 나의 원룸으로. 나는 가야만 한다.

내가 느끼는 서글픔은 결코 낭만적 결혼 생활에 대한 미련은 아니다.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다. 분명 더 이상 이 불안정한 환경에서 아이들을 키워서는 안 되겠다 다짐한 것도 나인데, 또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한 어미로써 스스로에 대한 질책과 책망은 왜 하고 있는 것일까.


자신의 결정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는 것과, 자신에게 보내는 위로와 격려만큼 어려운 게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비행기를 타고 현실로 돌아왔다. 8월의 첫날이 시작됐다. 다시 전의를 다져 거칠고 험한 길 - 결혼 탈출을 계속 시도할 것이다.



<덧붙이기>

제주도를 담고 있는 팔찌! 네명의 딸들에게 전할 사랑을 가득 담았다. 너희들을 정말로  아끼고 사랑한단다. 비록 '견고하고 안정된 둥지'를 지켜내지 못한 못난 어미지만... 홀로 만들어 내는 둥지는 튼튼히 잘 지어볼께. 엄마 믿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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