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지속되고 있는 답답한 생활이 3년째에 접어들고 있다. 모든 가정에서 코로나로 인한 일상의 변화가 있었겠다마는, 우리 집에서는 여느 집에서는 쉬 발견할 수 없는 색다른 일상의 변화가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미용실을 가지 않고 집에서 이발을 하겠노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 집엔 셀프 미용이 가능한 바리깡 제품이 배송되어 왔다. 코로나19로 외부 외출이 불안하다는 이유였던 것 같기도 했고, 딱히 사회생활도 안 하는데, 매달 헤어 관리에 들어가는 돈이 아깝다는 이유였던 것 같기도 했는데 명확하고 선명한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우리 가족을 위해'라는 명분으로 들여온 바리깡이였다.
아직 이발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반발심이 들었다. 그 명분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발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인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저 바리깡의 사용법을 숙지해야 할 사람은 그인가 나인가. 저 바리깡을 손에 쥐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 셀프 헤어 관리의 기쁨은 그가 누리는 것인가, 내가 누리는 것인가. '가족'을 위한다는 그 '가족'이 '그' 인가, '나'인가, '우리 아이들'인가... 바리깡을 바라보며 나의 마음은 다시 깊어졌다. '나의 동의를 전적으로 구하지 않고 도구를 구매한 그는 이기적이다'라는 확대 해석의 물결이 번지기 시작했지만, 뚜렷한 항쟁을 하지 못한 채 바리깡을 손에 들었다. 그가 공부하라고 보내준 유튜브는 보는 둥 마는 둥, 대충 숙지하고 (왜 내가 내 인생에 1도 없는 계획인 이발을 해야만 하는가!!!!) 그의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나는 딸 만 넷을 키운다. 아들이 없는 나는, 남자의 이발의 원리가 무엇인지, 컷의 순서는 어떻게 되는지, 투블럭 댄디컷은 무엇인지, 상고는 도대체 뭐냐... 개념도 원리도 1도 모르다. 그런 내가, 지난 반년 간 남편의 이발을 담당하게 됐다.
남편의 이발 날이 다가오면 스트레스 지수가 무척 올라간다. 첫째, 나는 아직도 헤어컷의 원리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실, 파악하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셀프 미용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겠고, 설령 이게 그의 취미이고 기쁨이라고 설명한다면 어느 정도 동의해 줄만 하겠지만, '가족'을 위한 다는 명분이라면 앞으로도 쭉... 미숙한 미용기술을 발전시킬 욕구가 나에겐 없다. 미용실에서 30분이면 뚝딱~ 전문가의 손길로 탄생할 이쁜 머리를, 아마추어 중에서도 심각한 아마추어인 내가 두 시간 세 시간을 낑낑거리며 3미리, 5미리, 바리깡의 미리수를 맞추며 숱가위와 일반 가위를 섞어가며 '투블럭 모히칸'을 왜 완성해야 하는가!
결국 셀프 미용을 하는 날이면 우리는 다투기 일수였다. 꼼꼼하고 완벽한 남편의 기준에 내 솜씨가 마음에 찰 리가 만무했고, 그런 남편의 잔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는 누구, 여기는 어디', 도대체 내가 왜 손에 가위와 바리깡을 들고 이 짜증과 비난을 듣고 있어야 하나 자괴감이 들었다. 화장실 가득 떨어진 그의 머리카락과 벌거숭이로 앉아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셀프 미용의 기쁨은 사라지고 슬픔만 가득 마음속에 남았다. 그렇게 6개월 셀프 미용의 시간을 보냈다. 명분을 만들어 준 코로나가 미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셀프 파마 선언을 했다. 나는 동의를 한 적이 없는데, 본인이 혼자 한다는 말인가? 설마설마.. 파마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작업인가? 설마설마, 파마를 마는 노동력은 '그'가 아니고 '나'일까?', 나'일가 그일까? 우리 집에 파마약이 담긴 택배 상자가 배송되어 왔고, 3월 2일 4명의 아이 새 학기가 시작되는 무척이나 바쁜 날, 시간차로 진행되는 4명 아이들의 등하교 지원, 개학날 챙겨야 하는 무지막지하게 많은 학용품과 준비물, 알림장, 서류 서명, 공지사항, 학원 일정 조율, 신규 학원 신청과 상담문의, 급식이 제공되지 않아 챙겨야 하는 점심식사, 그리고 이어지는 학원별 상담과 저녁식사 준비.. 몸이 하나라서 너무 안타깝고 바쁜 나의 휴가날, 나는 남편의 파마를 말아야 하고만 말았다.
셀프 호일펌... 그래. 이왕 하는 거니 기분 좋게 해 보자. 호일을 꼭꼭 꼬면서 머리카락도 살짝 당겨보는 복수도 해보고, 우스꽝스러운 남편의 모습에 배꼽도 잡아보았다. 1시간 30분 후 호일을 풀고 난 남편의 헤어스타일은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소지섭 같았다. 멋지다 칭찬도 해주었다. 우린 분명 기분이 좋았다. 문제는 그다음 펼쳐진 헤어컷의 시간이었다. 정말이지 도무지 나는 헤어컷을 아직도 잘 못하겠고, 집 앞에 널린 미용실을 나 두고 왜 집에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남편의 머리 만지는데 들어간 3시간의 시간이 문뜩 너무 아깝게 느껴졌고, 헤어 하단의 간격이 맞지 않는다는 말에 결국 작은 한숨이 베어 나왔다. '오빠.. 근데, 다음부터는 미용실 가면 안될까? ' 마음속에 있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다음은, 예상치 못한 일이 전개되었다. 늘 그렇듯 싸움은 급발진으로 일어난다. 파마머리는 소지섭같이 멋지다 말했었고, 아이들 챙기면서 바쁜 와중에서도 최선을 다해 남편의 헤어컷을 시도했다. 그래서 나는 이 싸움을 예상치 못했다. 헤어컷을 하는 동안 내 표정이 어땠는지, 말투는 어땠는지, 한숨은 도대체 몇 번을 쉬었는지 나는 모른다. '어차피 해야 할 거 토 달지 말고 하자'라는 생각으로 했는데, 한 숨과 함께 튀어나온 그 말, '다음부터는 미용실 하면 안 될까?'. 처음부터 기분 좋게 시작하지 않았던 내 속마음이 그 문장에 모두 담겨있었어서 남편은 기분이 많이 상했나 보다. '야, 너 하지 마. 나가. 야. 너 그냥 가위 내려놔. 나가라"... 어이상실의 순간이었다. 나는 그렇게 화장실에서 쫓겨났다. 손에 들었던 바리깡과 가위를 내려놓고 저녁 준비를 하러 주방으로 나오면서 억울한 감정이 올라왔다. 나는 그 말을 삼켰어야 했나. 왜 그 말은 뱉으면 안 되는 말인가. 셀프 헤어의 명분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는 그렇게 화가 났는가. 내가 그의 선한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기분을 상하게 했는가? 선한 의도가 맞는가? 실제 기술을 펼쳐야 할 나의 기분은 왜 배려되지 못하는가? 18년을 같이 살아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그에게 나 역시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3월 2일은 너무나 바쁜 날이기에, 이런 기분에 매몰되어 할 일을 멈출 수는 없다. 각자 업데이트된 학교 알림 앱도 재설치를 해야겠고, 아이들의 쌍방향 수업 준비를 위한 태블릿 점검도 해야 했으며 곧 저녁 준비를 해야 했으니까. 그래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인식 못했다. 아이들 밥 먹이고 치우고 하는 2시간 동안 줄곧 남편은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고, 진정 셀프로, 마무리 헤어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나의 주방 업무가 끝날 무렵, 남편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는 캡 모자를 쓰고 있었다. 캡 모자 사이로 삐져나오는 꼬불꼬불한 파마 헤어는 없었다. 머리카락이 한가닦도 없었다. 내 눈을 의심했다. 그는, 삭발을 하고나온 것이다!!!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깡패, 조폭의 모습이었다. 혼자 하다가 화가 났다보다. 코로나19에 걸리지 않으려고 미용실을 안 가기 시작한 건데, 미용비를 아껴서 살림에 보태자고 시작한 일인데, 취미 삼아 즐겁게 하려고 시작한 일인데 이해 못 해주는 마누라에게 화가 났었나?.... 도대체 삭발이라니. 삭발은 무엇인가 투쟁할 때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암환자가 항암치료에 속수무책으로 빠지는 머리카락을 감당하지 못해 눈물로 밀어버리는 게 삭. 발. 아닌가. 노동자가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며 고용주에게 의견을 강하게 어필할 때 하는 것 아니가? 정치가가 정치적 이슈를 관철시킬 때 하는 게 아닌가? 그의 삭발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 것인가. 바쁜 휴일, 3시간을 들여 파마를 말아준 내 노력은 어디 갔냐 말이냐. 소지섭 헤어는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삭발을 한건 그인데, 내 머리가 삭발된 기분이었다. 너무나 폭력적인 순간이었다. 끔찍했다.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정말 미웠다.
목소리를 높이고 언쟁하는 대신 내가 택한 방법은 소극적 무언의 폭력이었다. 지난 3일간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대화는 최소한의 것만 했으며 동선을 최대한 겹치지 않게 피했다. 그의 헤어가 눈에 띌 때마다 섬세한 내 감정은 폭력 현장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머리채가 그에게 잡히고 내 머리카락이 바리깡에 밀려버린 것 같았다. 순간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회사에서 업무를 보면서도 삭발한 머리가 떠오르면 솟아나는 눈물을 꾹꾹 눌러 삼켰다. 이 사건 하나로 또다시 내 인생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나의 노력이 존중받지 못한 것, 남의 기분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을 망가트리는 행동, 남편의 삭발에 그동안 진정시킨 '이 결혼'. '저 남자', '내 인생'이라는 큰 프레임을 건들기 시작하는 내 마음의 파장을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지난 몇 달간 회복되고 있었던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이 흔들렸다. 내 선택을 후회하는 자기 파괴적 감정이 미친 듯이 내 심장을 파고들었다. 어떡해서든지 나는 이 생각을 멈춰야만 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확대해석은 하지 말자. 진정하자. 워워.... 그가 자른 건 그의 머리카락이지, 내 머리카락이 아니다. 그가 자른 건 나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그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미용기술에 대한 스스로의 화였을 것이다. 삭발이 나에 대한 감정의 표현일 거라는 건 나의 의심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아직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리가 없어져서 미워진 건 그의 얼굴이지 내 얼굴이 아니다. 미워진 그의 얼굴에 대한 책임을 그 누구도 나에게 지라고 한 적이 없다. 괜히 내가, 그 말은 왜 했을까. 나는 그의 기분을 왜 헤아리지 못했을까. 이런 자책은 하지 말자. 그에 대한 배려만큼 중요한 것은 나의 감정에 대한 스스로의 인지와 배려이다.
여기까지 생각의 흐름을 이어가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이전의 나는, 안 좋은 일이 발생하면 내 탓인 것 같이서 자주 숙이고, 사과했었다. 그리고 내 마음의 파장을 들여다보고 달래기보다는 상대방의 마음의 파장을 더 깊이 들여다보았었다. 작년 한 해 인생의 큰 사건을 경험하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상대방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삭발에 의미 부여하기를 중단했다. 이 사건의 원인을 분석하고 반성하는 작업을 멈췄다. 간단히 정리하면 그가 그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벌린 못난 해프닝일 뿐이다.
소리 없는 나의 공격이 진행된 3일 동안, 남편은 주눅 들어 있었다. 다혈질인 자기 행동을 후회하고 있는 듯했다. 딸 넷과 나는 똘똘 뭉쳐 하하호호 즐거운데, 남편은 우리 가족 내에서 한없이 소외되어 있는 3일이었다. 이전에는 행동을 후회하고 있는 남편이 자존심 때문에 손 내밀기 망설이는 마음을 읽고 내가 먼저 말을 걸어주었었다. 그가 민망하지 않도록, 그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도록, 우리 가족의 평화를 지킬 수 있도록. 그렇게 그의 마음의 헤아려 먼저 건 말 한마디는 우리 관계의 우위를 변경시켜버렸다. 그는 우위를 차지하고 나는 밑바닥을 맴돌게 됐다.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한 책임은 그가 지도록 내버려두었어야했다. 누가 지는 게 이기는 것이라고 했던가. 그건 상황에 따라 다르고 상대방이 누군가에 따라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는 지는 건 지는 거고 이기는 건 이기는 것이다.
답은 여기에 없고 어쩌면 더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약해지는 게 인간인데, 나는 또 선택에 후회하고 나에게 벌어진 이 사건이 세상 누구보다 불행하게만 느끼고 있다. 다른 사람은 다 행복한데, 나만 불행한 것 같은 기분 말이다. 모든 선택에는 정답과 오답이 공존한다고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선택한 다음에 그걸 정답으로 만들어 내고, 어리석을 사람은 선택하고 후회하면서 오답으로 만든다고 한다. 후회는 또 다른 잘못의 시작일 뿐이라는 걸 잊고 말이다. 최근 박웅현 님의 [여덟 단어]를 읽으며 중요한 삶의 키워드 몇 개를 발견했다. 그 단어에 담긴 생각과 철학이 오늘 나의 하루를 다시 힘내서 살아가게 한다. 내가 한 선택을 옳게 만드는 힘은 나에게 있다. 나의 불행을 크게 생각하고, 확대 해석할 필요도 없다. 생각의 가지치기를 멈췄다. 예측, 추측, 행동으로 본 그의 심리 추정 등의 모든 해석을 멈췄다. 그에게 맞춰진 나의 주파수를 나에게 가져왔다. 내가 왜 기분이 상했는지, 나는 이 기분을 어떻게 해소해 나갈 것인지,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왜냐면 나는 행복하게 살기로 다짐했으니까. 책을 읽지 않았다면, 하루에 몇 번씩 흔들리는 내 마음과 생각을 어떻게 잠잠히 붙잡을 수 있었을까.
나는 오늘도 한없이 가볍게 흩날리는 내 정신을, 책 속에 담진 좋은 문장 구절로 다잡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