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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Jul 16. 2021

에베레스트에 올라갈 것이다.

가출을 결심한 날. 머뭇거림을 거둬낸 날의 이야기

한 달째 계속되고 있는 남편의 묵언수행에 나는 미쳐가고 있었다.

(남편은 마음이 상할 때 동굴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한 집에서 같이 살면서 아이들 키우다 보면, '00 이것 좀 챙겨주세요. 00 어디에 있어요? ' 등등

서로 피치 못하게 해야 할 기본적인 말들이 있는데 우리 부부는 그러한 말 조차도 꼭꼭 잘 삼켜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를 견딜 수 없게 한건, 남편의 묵언수행이 아닌 나의 묵언수행이었다.

남편을 보면 목소리가 삼켜졌다. 소리를 잃은 사람처럼 말이 목구멍 속으로 쏙 들어가 위장을 지나 대장까지 내려가 버리는 것 같았다.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동굴 속에 들어간 남편은 숨 쉬는 것을 제외하고 모든 가사노동 활동을 중단했다.

그리고 그것은 오롯이 내 몫이 되었다. 고양시에서 인천시로 지역을 넘나드는 장거리 출근을 하면서 아이들의 과제며, 학원 일정이며, 건강검진 자가진단, 이알리미 체크까지 다자녀 워킹맘의 삶은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분노를 넘어서 우울이 나를 짚어 삼켜버렸다. 분노도 에너지라는 말이 딱 맞다. 화를 낼 힘도 없을 지경으로 가라앉아버렸다. 일상생활의 유지가 힘들다. 회사에서 진행하는 회의 진행도, 이리저리 살피며 판단을 해야 하는 운전도, 사람들과 어울려서 나누는 담소도, 모든 것에는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아.. 기본적인 일상을 유지하는 것도 평균 이상의 에너지가 있을 때 가능한 거구나'


어떤 사건 때문에 당신이 그렇게 변했냐 물어본다면 나는 구구절절 말하지 못하겠다.

그건 단지 어제오늘의 사건으로 만들어진 감정이 아닌, 18년의 결혼생활 동안 축적된 일상이 만들어낸 슬픔과 우울이었다.


나는 아이가 네 명이 있기 때문에, 계속 울고 있을 수만 없는데.

계속 누워 있을 수만은 없는데, 무기력하기만 해서는 안되는데.

무엇이라도 힘을 내야만 했다.


결국, 몇 년 전부터 그렇게 망설이던 '정신건강의학과'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최대한 빨리 예약이 되는 곳으로. 심리치료는 장기간이 걸리는 거라, 약이 도움이라도 받아서라도 최대한 빨리 이 지긋지긋한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용자가 거의 없는 '카카오스토리'에 글을 썼다. 어디라도 내 감정을 터트리지 않으면 심장이 터질지도 모를 것 같았다.


전화번호도 저장되지 않았던, 친구의 친구, 그래서 친구인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나보다 먼저 우울증을 극복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에. 그의 남편이 유명한 심리학자이기 때문에.


나는 작은 센터의 최고 관리자이고, 우리 센터에서 근무하는 나보다 삶의 연륜이 있는 믿을 만한 직원분께 내 이야기를 꺼냈다. 직책과 직분은 일단 저기 서랍 속에 넣어두고. 부끄러움과 수치심도 함께 서랍 속으로.


아주버님도 찾아갔다. 아니 내일모레 곧 이혼할 사람처럼 방방 뛰면서 시댁 식구인 아주버님을 찾아가는 내 마음은 또 무슨 심보란 말이냐 만은, 거기서도 무엇인가 이 어두컴컴한 터널을 통과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내가 가진 모든 풀을 활용해서 도움을 받기를 시작했다. 나는 이대로 주저앉으면 안 되니까. 나는 엄마니까.

우리 아이들에게 축 쳐진 시체 같은 엄마의 모습을 계속 보여줄 수는 없으니까.



1. 약간의 두려움으로 찾아간 병원은 그리 따뜻한 공간은 아니었다. 무미건조한 표정의 간호사와 나보다 더 피곤해 보이는 의사. 병원 마감시간이 가까워 방문했기 때문에, 의사가 많은 환자의 하소연에 지쳤나 하고 이해했다. 내가 기대했던, 내 삶의 공감과 위로는 거기에 없었다. 선생님 앞에서 펑펑 울 거라고 예상과는 다르게 눈물이 쏙 들어갔다. 단지 의사 선생님은 빤히 나를 쳐다보며 핵심적인 질문을 던지기만을 반복했고, 그 질문에 최대한 답을 하기 위해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만 했다.


"왜 약을 드시고 싶으시죠? 약을 먹고 감정이 안정되면 하고 싶은 게 무엇이죠?"

"네?, 네?"   ( 그 답을 찾기 위해 일주일을 꼬박 애썼다.)


2. 몇 안 되는 카카오스토리의 친구들로부터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밥이나 먹자 하고 자연스레 한 연락이었지만 그들은 나를 이대로 두면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책을 건네주고, 힐링 아이템 바쓰 솔트를 건네고, 맛깔스러운 밥상을 선물해주기도 했다. 그저 나를 감싸주는 저 들의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무엇이라도 힘을 내야겠다고 생각되었다. '이혼하겠다. 안 하기로 했다. 잘 살겠다. 못 살겠다.... 양치기 소년처럼 반복되는 이 레퍼토리를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무엇이든 결론을 내야겠다고 다짐했다.


3. 우울증을 극복한 친구가 전한 말은, ' 니 인생의 키는 네가 쥐고 있어. 나는 내 삶을 이대로 두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희망을 찾기로 했어. 그래서 극복했어'.  여기저기 어느 책에서나 읊어줄 수 있는 평범한 말이었지만, 내 인생이 키를 내가 쥐고 있다는 그 말이 나를 자극해오기 시작했다.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 바로 나다!


4. 아주버님이 말했다. '제수씨.. 병원 가서 치료도 받고, 건강해야 뭐든 하니 운동도 하고, 그리고 감정을 너무 누르지 말고 막 발산해봐요. 남편을 한번 이겨봐요. 너무 값나가는 물건은 던지지 말고^^ 한번 죽을 듯이 덤벼봐요. 한번 해봐요. 그렇게. 안 그러면 정말 병 생겨요. '


5. "센터장님, 저기 눈앞에 에베레스트 산이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너무 높아서 차마 못 오를 것 같죠? 계속 바라보고 그 생각만 하고 있으면 절대 에베레스트 산에 오를 수 없어요. 일단 한 발을 내 딫어야해요. 일단 앞으로 나아가는 거죠. 그리고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가요. 산기슭까지 갔다가 너무 춥고 힘들면 그냥 내려와도 되는 거예요. 꼭 에베레스트 산의 정상을 찍을 필요는 없어요. 그렇게 한 발을 내딛지 않으면 영영 에베레스트는 못 올 라갈 높은 산으로 끝나 버리는 거예요. 이것만 기억하세요. 올라가다 아니라고 생각하면 다시 내려오면 된다는 걸. "


이혼을 하면 아이들의 인생을 망치게 되는 건 아닐까. 나는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나의 두려움이 조금은 사그라들었다. 나는 눈앞에 에베레스트 산을 보며, '아.. 참 높네. 거칠게도 생겼구나. 얼어 죽겠다. 나는 못 오르겠다' 그래도 한번 올라가 보고 싶다.. 하지만, ' 아 거참 높고 거칠게도 생겼네'의 반복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러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높다는 그 산.

에베레스트.

그 산에 올라보기로 결심을 했다.


그 길로 부동산을 찾아갔고

원룸을 덜컥 계약했다.

가출을 결심한 것이다.

아이 때문에 전전긍긍하던 내가

가출이라는 어이없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왜?

내가 살아야 하니까. 먼저 내가 살아야, 살아낼 힘이 있어야

아이도 키우고 직장생활도 하고.. 할 수 있으니까.


에베레스트산. 한번 올라가 보지머.

그리고 아니다 싶으면 다시 내려오지머.

일단 올라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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