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를 낼 줄 알았다.
사고가 날 것 만 같았다. 지금 나의 이런 정신상태로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게 이상한 일이니까.
아이 둘을 태우고 장을 보러 마트에 가는 길이였다. 나는 지하 2층 주차장에서 올라오고 있었고,
그 차는 지하 1층을 지나고 있었다.
"쾅!!!!!!!! "
그 차가 내 차를 박았다.
분명 내가 먼저 진입했고, 멈추지 않고 내 차를 박은 건 그 차였다. 심장이 쿵쾅쿵쾅 했다. 안 그래도 요즘 정상이 아닌 내 심장박동이 더욱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다행히 앞좌석과 운전석 뒷자리에 앉아있던 아이들은 멀쩡했다. 충격을 받은 건 나 혼자였다. 출퇴근으로 사용하는 내 차이지만, 차의 명의는 남편으로 되어 있었고, 보험도 남편 앞으로 되어있었다. '아... 남편한테 연락하기 싫은데... ' 그 마음이 앞섰다. 나와 남편은 냉전 중이었으니까.
내 차를 박은 차량에서 아저씨가 나왔다. 순하게 생긴 아저씨는 곧바로 아이들의 상태를 물어본 후, 사과를 전했다. 본인이 주차자리를 찾느라 나를 못 봤다고 했다.
각자의 보험사에 연락을 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난 내가 피해자인 줄만 알았다. 내 차가 받쳤고, 내 차가 망가졌으니까. 사진은 딱 저 사진 한 장 찍어놨는데, 내 보험사에서 도착하기 전에 상대방 차량이 차를 뺐다. 그리고 나를 안심시켰다. 본인이 사진을 많이 찍어놨으니 걱정 말라고. 아저씨가 찍어 놓은 사진도 나에게 공유해줄 거라 생각했다.(이런 바보같은 인간이 있나!)
세상에 이렇게 멍청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정말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내 차를 박은 저 아저씨가 나에게 엄청 미안해하고 있고, 나의 아이들이 다쳤을까 걱정하고 있고, 내일 나의 출퇴근에 지원해줄 렌터카를 고민하고 있는 줄 알았다.
경차 모닝 2대의, 주차장 안에서의 경미한 교통사고.
다친 사람도 없었고, 다쳤냐 물어볼 때 나는 명확히 대답했다. "저만 좀 놀랐을 뿐 아이들은 괜찮은 거 같아요. 제 마음만 놀란 것 같아요."
"6:4 가해자이십니다. 상대방 차량은 안 고칠 거라고 하시니 차주 분도 그냥 보험청구를 안 하시는 게 어떠실까요? 가해자이십니다. "
"네?? 제가요? 네? 제 차가 받쳤다고요. 제가 그 차를 친 게 아니라, 그 차가 저를 쳤다고요. 그 아저씨도 사과하셨고요. 저를 미쳐 못 보셨다고 하셨어요. 제가 먼저 교차로에 진입했다고요! 제가 진입했는데 그 차가 안 멈추고 저를 쳤다고요... 네??? 그런데 제가 왜 가해자인가요?? 그쪽 차는 안 망가졌으니 당연히 안 고치죠. 찌그러진 건 제 차 라구요!!!!!!!!!! " 보험회사에서 웬만하면 보험청구로 차를 고치지 말라고 한다. 내가 고치면 상대방도 고칠 거라고... 서로 보험료 오르게 할 필요가 없다고.
저 차 사고는 꼭 내 인생 같았다.
비싸지도 않은 작은 차를, 똑같이 생긴, 그것도 색깔도 똑같은 작은 차가 쳐 박았다.
나는 그저 가고 있었는데... 나는 그냥 가고 있었을 뿐인데.. 저 차가 박았다. 그런데 나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란다. 직진대 직진에서는 오른쪽 차량이 우선이라고. 선진입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그 차가 오른쪽이기 때문에 내 차가 가해차량이라고.
내가 4, 그가 6 도 아니고, 5:5도 아니고, 내가 6이라니!
그러면서 내 양심은, 나의 전방주시 과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왜냐면 나는 요즘 정상이 아니니까. 툭하면 눈물을 질질 흘리고 운전을 하고 있는 우울증 환자니까. 저들이 내 진료기록을 알면 어쩌지? 뭐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는 아줌마.. 그게 바로 나다.
두 번째 병원 진료 날, 의사 선생님 앞에서 나는 울부짖었다.
차사고가 났어요. 꼭 제 인생 같아요. 저는 그냥 가고 있었는데, 그 차가 저를 박았어요. 근데 제가 가해자래요. 제 인생 같아요... 두 줄기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이혼을 하기로 협의한 바로 다음 날, 남편이 화해를 청해왔다. 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한다. 그러니 아이들을 위해서 함께 살자고 한다. 그동안 나는 너무 힘들었는데, 나는 더 이상 못하겠는데... 이 결혼을 깨버리는 사람은 '내'가 되어 버렸다. 아이들도 묻는다. 꼭 아빠랑 떨어져 살아야겠냐고. 자기들을 위해서 함께 살면 안 되는 거냐고. 아빠가 불쌍하다고....
남편이 너무너무 미웠다. 끝까지 나쁘게 있지. 사과는 왜 하는 거야. 끝까지 이기적으로 굴지. 미안하다고 함께 살자고 왜 하는 거냐. 아이들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니. 갑자기 이성이 높은 어른으로 성장한 거냐. 갑자기 나한테 왜 이러는데! 나는 이제 결심이 섰는데.. 드디어 결심이 섰는데...
저 사고의 원인이 굳이 나에게 있다면,
이리저리 미리 살피지 못한 것. 적절한 판단을 하지 못하고, 대처한 것.
막 따지지 못한 것. 게거품을 물고 덤비지 못한 점.
미안하다는 사람의 말을 그대로 믿어버리는 나 자신에게 있다는 걸, 나는 이제 알았는데.
평화주의자와 회피형 성격장애 사이
병원에서 받아 든 기질검사 결과는 과히 엄청났다.
강한 성격의 남편과 유한 성격의 내가 만들어 낸 18년의 결과였을까.
이기적인 남과 이타적인 내가 만들어낸 기형적인 결과였을까.
과연 나는 평화주의자였을까. 회피형 인격장애였을까.
지난 결혼생활에서 게거품을 물고 덤볐어야 했던 많은 순간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 버린, 많은 순간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하나, 두 개, 세 개, 네 개.... 불현듯 떠 오른 사건들이 선명해졌다.
나 자신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하나 둘 깨닫기 시작했다.
기질- 위험회피 100점 / 성격-자율성 0점
이 어마어마하게 파괴적인 결과지를 들고,
결국 경찰서에 가서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포기하고 보험사와 싸우는 것도 포기하고 차를 고치지 않기로 결정한 자동차 사고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평화주의와 회피형 성격 주의 사이에 내가 서있는 포지션을 명확히 확인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내가 내 인생의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 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나도 누군가의 삶을 망치고 있는걸 수 있겠다...생각이 들었다.
주저 할 수 없다. 이제 나는 뭐라도 결론을 내려야한다.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