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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티 Nov 16. 2021

파밭의 나무

 육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수필가들이 각자의 작품으로 합평을 하는 소모임 자리에 그 사람이 있었다. 언제부터 이곳에 같이 있었지?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낯선 남자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합평이 끝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 사람이 내게 다가왔다.


 “시를 좋아한다 했지요? 처음 시를 써봤는데, 한번 봐줄래요?”


 그가 수줍게 A4 용지를 건넸다. 단정하게 정리된 반백의 머리에 살짝 그을린 피부, 그리고 꽉 다문 입과 입가의 주름에서,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훈계할 것만 같은 단호함이 느껴졌다. 예전에 근무했던 중학교의 교장-테니스를 좋아하고 뭐든 독단적으로 판단해서 교사들이 싫어했다-이 떠올랐다. 남자의 수줍은 미소는 그런 그의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아 어딘가 어색했다. 오랜 경험에서 의식적으로 만들어 낸 미소 같았다.


 나 역시 웃으며 ‘네에’라고 대답은 했지만 이를 어쩌나 싶었다. 시를 좋아해 늘 시집을 끼고 다녀도 시를 평가하는 일은 버거웠다.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몰랐고 내 생각을 표현할 적확한 단어조차 찾기 힘들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시를 계속 읽다 보니 보는 눈이 높아졌다고 해야 하나?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습작 시를 받아 읽게 되면 대개는 실망했다. 시적 표현 없이 그저 산문을 뚝뚝 잘라 억지로 행과 연을 만든 경우, 아니면 진부한 소재를 진부한 은유로 묘사해 아무 느낌도 주지 않는 경우, 또는 시 안의 표현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데 실패해 이미지를 형상화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시들도 그러지 않을까? 과연, 나의 감상평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가 준 종이에는 다섯 편의 시가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 어설펐다. 뻔하고 억지스러웠다. 특히 시어들이 녹아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처럼 생동감이 없었다. 거기에다 감정 표현이 너무 직설적이었다. 슬프다, 외롭다, 고독하다, 등등의 단어가 많았다. 혹여나 이런 나의 실망감이 밖으로 새어 나와 티가 나지 않을까 조심하면서 네 번째 시를 읽었다. 나는 그냥 시 ‘덕후’일 뿐인데, 어쭙잖은 감상으로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마지막 시를 읽기 시작했다. 제목은 ⟨파밭의 나무⟩. 흔하지 않은 제목. 그러나 조금 촌스러웠다. 첫 행부터 천천히 집중해서 읽기 시작해 마지막 행까지 다 읽었을 땐, 머릿속이 ‘띵’ 하고 울렸다. 시의 잔향에 갇혀 바로 시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요즘 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중 삼중의 은유나, 이미지 ‘점핑’ 같은 건 없었다. 그냥 심플했다. 그런데 그 단순함에 담긴 무게는 제법 무거웠다. 독립된 하나의 중력을 가질 수 있을 만큼. 그걸 쉽게 말하자면 끌림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시는 끌림이 강한 시였다. 최근 주목받는 젊은 시인인 황인찬의 시를 읽었을 때와 느낌이 비슷했다. 시가 그려내는 단순한 그림은 어딘가 기묘하고 어딘가 조금 뒤틀려있는데, 그 뒤틀림이 독자의 마음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촌스럽게 보였던 시의 제목은 전체를 단단히 묶어 주는 울타리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멋진 시를 읽으면 심장이 멈칫거린다. 그리고 그 순간, 시를 통해 다른 세계를 유영하게 된다. 시,⟨파밭의 나무⟩가 나를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이제 내 감상평을 말해야 할 차례였다. 종이 위에 머물던 시선을 그 사람에게로 옮겨야만 했다. 남자는 내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해하며 긴장하고 있었다. 이 남자가 이 시를 썼다. 그것도 처음 쓴 시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서서히 내 안에서 시의 감동은 사라져 가고, 다른 무언가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외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점점 선명하게 형태를 잡아갔다. 


 질투를 느꼈다. 훔치고 싶을 정도로 부러웠다. 원래 누군가를 심하게 질투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질투하고, 경쟁하고, 이기려고 노력하기보다, 상대의 우월함을 바로 인정하고, ‘와, 좋겠다!’ 하는 정도로 부러워하면서 포기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욕심 없이, 최선을 다하지 않고, 무엇이든 적당히 하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이 시는 아니었다. 내 안에 격한 질투의 감정을 몰아넣고 있었다. 그것도 표면이 거칠어서 살짝만 건드려도 살이 쓸리고 피가 송골송골 올라올 것 같은 질투. 


 이런 나의 속도 모르고 그는 여전히 수줍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무리 봐도 그 표정은, 한쪽이 갸우뚱 기울어져 금방이라도 깨질 듯 이상해 보였다. 이제는 정말 말을 해야 했다. 나의 감상을. 뭐라 해야 할까? 솔직하게 말해야 할까? 어느 정도로 솔직하게? 결심을 하고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었다. 내 손의 종이도, 그 남자도, 같이 있던 수필가들도, 종로 카페도…. 나를 둘러싼 시공간이 다 사라졌다. 눈을 깜빡거리는 사이, 누군가 나를 집어 들어 그곳에서 빼낸 것 같았다.


 뭐지? 이건 뭐지?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누워있었다. 꿈이었나? 꿈을 꾼 거야? 너무 생생한데? 눈을 떴다. 어두웠다. 아직도 밤이었다. 그렇다면, 그 남자는? 그 시는?


 “대박”


 잠결에 대박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 남자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였다. 그러므로 이제 그 시는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횡재를 한 기분이 들었다. 당당하게 그 시를 훔쳐도 되니까. 


 아직도 그 시가 담고 있는 시어들의 촉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시를 읽으며 떠올린 이미지들이 여전히 옆에서 내 팔을 간질이며 살랑이고 있었다. 파밭에 있는 나무 이야기였다. 잠이 덜 깼지만, 최소한 제목이라도 메모를 해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간신히 팔을 들어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휴대폰을 찾아 잠금을 풀고, 메모장을 열어 ‘파밭의 나무’라고 적었다. 그리고 다시 잠들었다.


 아침에 잠에서 깨자마자 비틀스(Beatles)의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를 떠올렸다. 명곡 ⟨예스터데이(Yesterday)⟩ 멜로디를 꿈에서 듣고 작곡했다고 했다. 놀랍게도 내게도 그런 일이 일어난 거다. 물론 그 정도로 대단한 작품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내가 쓴 수필과는 차원이 다른 뭔가가 나올 것 같았다.⟨파밭의 나무⟩는 충분히 수필로 변신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휴대폰을 찾아 열었다. 메모장엔 ‘파밭의 나무’ 다섯 글자가 적혀 있었다. 아직도 시를 읽었을 때의 감정이 어렴풋이 남아있었다. 부드럽고 충만한 감정들. 그러나 그게 다였다. 감정은 단단한 단어가 되어주지 못했다. 감정은 물처럼 형태가 없었다. 그저 흘러가거나 고여 있을 뿐. 나는 꿈에서 ⟨파밭의 나무⟩가 만든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 선명하게 존재하는 시어(詩語)들을 만지며 그것들의 온도를 분명히 느꼈었다. 

 그런데…. 그게 뭐였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잠만 들면 내 손에는 가위가 있고 / 깨고 나면 베고니아의 목이 잘려 있고 / 내 정원은 텅 비어 있고 / 

    기억은 또 날 버리고 / 기억은 기억들하고만 친구가 되어 있고 // 망각은 문자도 보내지 않고

                                                                             - 허연, 〈기억은 나도 모르는 곳에서 바쁘고〉 중     

 

 망각! 그날 아침은 망각 속에서 버둥거리다 한참 후에나 일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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