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밤은 지구의 그림자.'
어스름한 저녁 하늘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밤은 지구의 그림자, 라고. 이십 대 초반, 한껏 치장을 한 말들에 쉽게 현혹되던 시절이었다.
일기장에 시를 베껴 썼다. 특히 사랑을 노래한 시. 유하의〈사랑의 지옥〉이나, 채호기의〈엽서1〉 같은 시들. 기형도의〈빈집〉, 그 첫 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같은 문장을 수시로 웅얼거렸다. 등굣길이나 강의 시간에, 학생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도 그런 문장들이 툭 튀어나와 내 심장을 뛰게 했다.
그때까지 나는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다. 영화, 드라마, 소설, 시에서 애절하게 표현하는 사랑의 감정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라는 말이 어떤 아픔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짐작할 수 없어 더 알고 싶어 졌고, 당장 알고 싶은데 불가능하니 조급해졌다.
밤은 지구의 그림자. 지구의 그림자가 내려앉은 신촌은 낮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이승환이나 신승훈의 노래가 크게 퍼져 흐르고, 거리 곳곳에선 시큼한 알코올 냄새가 났다. 거리가 흔들거렸다. 기분 좋게 흔들, 흔들. 그 흔들림 안에 우리도 있었다. 신촌의 한 술집에서 우리는 동아리 모임 중이었다. 흔들, 흔들. 기분 좋게 취해서 다들 시끄럽게 웃고 떠들었다. 적당히 마신 맥주 때문에 몸의 신경이 말랑말랑 풀어지고 있었다. 그때 또 떠올랐다. 기형도의 시였나, 아니면, 허수경의 〈공터의 사랑〉 속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였나? 여하튼 웅얼거렸다. 그런 사랑의 시구를.
조금 더웠다. 앉아 있는 동아리 친구들의 다리를 건너, 건너서 그 자리에서 나왔다. 밤바람을 쐬고 싶었다. 가게 앞 계단에 앉아 풀린 눈으로 하늘에 뜬 상현달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앞에 갑자기 커다란 비행선 같은 것이 보였다. 바나나우유였다. 동기 녀석이 바나나우유를 내 눈 바로 앞에 들고 있었다. 바나나 우유! 나는 그것을 넙죽 받았다. “너 이거 좋아하잖아.” “좋아해, 좋아하지.” 나는 손에 든 우유를 쭉 마셨다. 달고 시원했다. 밤, 맥주, 상현달, 바나나우유…. 조합이 완벽했다. 밤이 기분 좋게 흔들, 흔들거렸다.
“이거 들을래?” 동기 녀석이 이어폰 한쪽을 건넸다. “좋지.” 귀에 꽂았다. 공일오비였다. 윤종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밤, 맥주, 상현달, 바나나 우유, 공일오비. 정말 완벽했다. 윤종신의 노래가 끝나자 동기 녀석이 자기가 좋아하는 병맥주 집이 있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그래?” 그 녀석을 바라봤다. 날 보고 웃고 있었다. 날 좋아하나? 웃고 있네? 녀석의 웃음이 싫지 않았다. 이런 느낌인가? 누구를 좋아하게 되는 거?
녀석을 따라간 병맥주 집은 테이블이 몇 개밖에 없는 작은 술집이었다. 외진 곳에 있어서 손님이 많지 않았다. 포근한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었다. 포근한 인테리어의 작은 주점. 완벽한 조합에 하나 더 추가되었다. 나는 또 기분 좋게 흔들거리며 웃었다. 맥주를 몇 병 마시니 발가락이 찌릿해질 정도로 취기가 퍼졌다. 집에 가야 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고 싶지 않았다. “지하철은 너무 환해. 그래서 싫어. 밤인데 환한 건 반칙. 버스를 탈 거야.” 내가 그렇게 말했다. “데려다줄게.” “왜?” “너도 여자이니깐.” 자식, 자기네 집도 같은 방향이라 어차피 근처까지 같이 가야 하면서 그런 '니글니글'한 말을 하다니.
버스를 탔다. 둘이 나란히 앉았다. 녀석의 어깨가 내 어깨에 부딪혔다. 녀석이 또 이어폰을 건넸다. 갑자기 프랑스 영화 《라붐》이 생각났다. 나는 소피마르소, 녀석은 소피마르소가 좋아하는 남학생. 완벽한 밤이다. 슬쩍 녀석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런 건가? 이런 게 사랑인가? 나도 이제 사랑을 시작하는 건가?
다음 날, 지독한 숙취 속에서 잠을 깼다. 창문으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쨍한 빛들.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낮의 얼굴.
어쩌지? 큰일이다. 어제 일이 기억났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그 녀석 어깨에 머리를 기대다니. 그 녀석 손도 잡았었나? 정말 이를 어쩌나? 나는 그 녀석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 번도 그 녀석을 내 남자 친구로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녀석의 얼굴을 어떻게 보나?
밤은 지구의 그림자. 그림자는 위험하다. 술, 달, 바나나우유, 공일오비, 아늑한 주점 그리고 소피마르소까지. 그림자는 그것들로 내 감정을 부풀리고, 오작동한 심장 박동을 진실로 둔갑시켰다. 밤의 마법이었다. 태양이 떠오르니 마법은 풀렸다.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일단 기억나지 않은 척해야지. 아니면, 당분간 동아리에 나가지 말까? 술이 확 깼다. 사랑의 시구 따위 떠오르지 않는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