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은 모르겠지만 최선을 찾아가는 번역가의 일상
- 이다혜 <퇴근길의 마음>, ‘타고난 성격과 일하기의 상관관계’
내 일만큼 이 문장을 체감하는 직종도 없지 싶다. 완벽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완벽한 번역문을 만들고 싶은 게 모든 번역가의 소망은 아닐지. 하지만 소망과는 별개로 아무리 완벽해지려고 해도 완벽할 수 없는 것이 번역이지 싶다. 듣는 사람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뉘앙스도, 표음문자와 표의문자의 특성 차이도, 문화 차이에 따른 단어 선택도, 이 모든 것이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물론, 영상 작업의 경우 길지 않은 마감 시간도 한몫 톡톡히 한다. 하지만 천년만년 시간이 주어진다고 해도 항상 마감 후에 아쉬운 부분이 떠오르곤 하는 법이라 시간이 더 있었다면 완벽했을 거야! 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당연히, 전보다 좀 더 나은 번역은 있을 수 있겠지만.
최근에 함께 작업했던 사람은 존대 말투를 선호하지 않는다(물론 써야 할 때는 쓴다). 선호 여부가 관련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작업할 때 보면 내가 생각한 존대의 정도와 차이가 날 때가 있다. 이번 드라마에 나이를 상당히 많이 먹고, 요염한 외모에 능구렁이 같은 요괴가 나오는데, 내가 중간에 두 번 정도 섞어 쓴 ‘~하십니까?’ 하는 말투가 무겁고 딱딱하다는 거다. 말을 들어보니 다나까의 군대식 말투를 떠올린 듯했다. 하지만 나는 전혀 무겁게 느끼지 않았고 그 요괴의 말투 자체가 요염한 스타일이라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영상에서도 말꼬리를 샥샥 끌어올리며 말하니까. 어차피 내 부분에서는 잠깐만 나오고 마는 터라 분량 많은 쪽에 맞춰 가라고 하고 말았지만, 똑같은 요괴를 보고도 참 다르게 느낀다고 생각했다. 하물며 수많은 시청자, 독자는 어떻겠는가. 아주 오래전 어느 BL 소설을 번역했을 때도, 남자 주인공 중 하나의 말투를 놓고 어느 독자는 너무 점잖다 했고, 어느 독자는 그래서 더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캐릭터가 사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모두를 만족시키는 번역은 없는 것 같다.
말장난도 그렇다. 중국어는 발음이 똑같은 단어를 사용해 말장난할 때가 많은데, 한국말로 바꾸게 되면 생판 다른 단어가 되니 말도 맞추고 말장난이란 것도 살리려면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책이면 주석이라도 어떻게 달아 보겠지만, 영상은 주석을 달기도 쉽지 않다.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이 매삼(賣蔘), 삼을 팔고 온다고 한 말을 여주가 매신(賣身), 몸을 판다로 잘못 알아듣는 대화가 나왔다. 중국어로는 둘 다 발음이 ‘마이션’으로 똑같지만, 한국어로는 전혀 달라서 여럿이서 고민했었다. 결국 한 언니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줬다. 삼매매와 성매매. 한데 최종 감수자분은 인삼매매와 인신매매로 바꿔 갔다. ‘인’이라는 같은 글자가 앞에 들어가니 오히려 착각하기에 더 좋은 듯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원문처럼 완벽한 오해를 만들어 내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언어를 옮기는 일에 완벽한 대치는 여러모로 불가능한 것 같다. 물론 최선을 찾아가는 과정이 작업 후 쾌감을 주는 건 별개의 문제다. (내공이 장난 아닌 분들은 기가 막힌 표현을 찾아내시기도 한다. 그 내공, 늘 부럽다.)
표음문자와 표의문자의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은 영상 작업할 때 심하게 느낀다. 한자는 표의문자고 우리말은 표음문자다. 출판 작업은 문장이 늘어지지만 않게 우리말로 옮기면 되니 여유가 있다. 하지만 영상 작업은 한 줄 16자, 최대 두 줄이라는 제한적인 조건 안에서 자연스럽게 대사를 빼야 하기 때문에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다. 듀레이션을 생각하면 한 줄에 들어갈 수 있는 글자 수는 더 줄어든다. 중국어는 표의문자라 몇 개 안 되는 글자로 문장이 만들어지는데, 표음문자인 우리말로 바꾸려면 최소 1.5배는 늘어난다. 가령, 조금 전에 본 드라마에 나온 문장인데 酒不醉人人自醉, ‘술이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스스로 취하는 것’이란 뜻이다. 중국어로는 고작 일곱 글자라서 2초도 안 되어 대사가 끝났다. 2초 안에 우리말로 10~12글자 안에 들어갈 수 있게 불필요한 내용은 쳐내고 핵심만 걸러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얼마 전부터 완벽은 포기하되, 최선은 놓지 말자는 생각으로 작업한다. 완벽 찾다가는 제명에 못 죽을 것 같아서 말이다. 그래도 간혹 완벽을 꿈꾸기는 한다. 완벽해 보이는 선배 번역가들의 문장을 볼 때면. 특히 최근에 <한자의 탄생>이란 책을 읽으면서 내내 감탄했었다. 원문의 묘사가 우리말로 정말 아름답게 되살아나서 홀린 듯 그 부분을 필사까지 하며 다시 읽었더랬다. 경력이 까마득한 분이니 그 내공이 자연스레 번역문에서 빛을 발한 것이리라. (물론 탕누어의 글 자체도 매력이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이번 책에서 내가 받은 감동은 번역문이 50%는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원하는 만큼 해내기란 가능할까? 기준치를 낮추면 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돈 받고 하는 일에 기준치를 낮추는 건 어쩐지 프로답지 못하지 않나 싶고. 그래도 원하는 만큼의 분량은 작업해 내고 있으니, 그거 하나라도 만족해야 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