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 한 달 차 주부의 소감
오늘도 하루 중 1/3을 잠으로 보냈다. 쓰고 보니 허탈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수면 시간을 채워도 피곤함이 가시지 않는 이유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평균 수면 시간 8시간. 평균이라는 말이 가진 함정을 아시는 분은 눈치채셨겠지만 어쩔 수 없이 수면 시간이 이보다 적은 날이 있으니 작정하고 일찍 잠드는 날은 9시간, 10시간도 잔다. 원래 잠이 많긴 해도 최근 수면시간이 더욱 늘어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채식을 해서 그래. 사람이 기운이 없으니까 자꾸 피곤하고 졸린 거야.”
곁에서 지켜보던 남편이 회심의 일격을 날린다. 그렇다. 최근 가족 모두 완전 채식을 하는 중이다.(한 달에 두 번, 메뉴에 맞춰 좋은 달걀만 사용할 때는 있었다.) 건강과 환경을 이유로 혼자 실천하고 있던 중 둘째도 같이 식단을 바꿔야 하는 일이 생겼다. 고작 6살이 채식만 하기엔 세상에 동물성 식품이 너무도 많아 할 수 없이 가족 모두가 채식에 돌입했다.
채식을 하면 몸이 가벼워진다던데. 왜 나는 더 피곤하고 기운이 부족할까? 정말 남편 말처럼 채식이 원인일까? 그동안 읽은 책과 접한 다큐멘터리들은 내게 해당되지 않는 데이터일까? 그것들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선행되었던 많은 실험과 연구들을 알기에 이론상으로 적당한 생각이 아니란 것을 알지만 이상하게도 자꾸만 채식이 원인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바뀐 것이 먹거리밖에 없으니 원인을 그곳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 Veganliftz, 출처 Pixabay
채식이 원인은 아니지만 채식 때문에 피곤한 건 맞아.
그동안 얼마나 살림을 편하게 살았는지 실감하는 요즘이다. 아이들이 간식을 찾으면 손쉽게 빵도 주고 과자도 줬다. 에어프라이어에 넣기만 하면 완성되는 간식들이 수두룩했고, 아쉬우면 과자를 먹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이 모든 것들이 대부분 동물성 식품을 포함하고 있다는 데 있다. 덕분에 아이들 간식부터 모든 먹을거리가 내 손이 닿아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바쁜 날은 고기만 구워 씻어놓은 야채를 올리면 풍성한 한 끼 식사가 되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항상 몇 가지나물 반찬을 해야 하고 두부를 굽고, 채식 국을 끓여야 한다. 한 끼 배를 불리는 데에도 예전보다 서너 배는 품이 더 든다.
간식도 반찬도 적당히 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까 덧붙여보자면, 채식을 하면서 체험적으로 알게 된 사실 하나가 있다. 그동안 즐겨 먹어온 것들이 실은 고열량 고당분 음식이었다는 점이다.
채식으로 튀김도 하고 달게 만들 수 있을 텐데... 무슨 소리인지 궁금하신 분이 있을지도 계실지도 몰라 조금 보태자면. 우리 가족은 육류 선호도 문제지만 기름진 식단이 더욱 문제였다. 튀김, 부침개를 무척 좋아하고 샐러드도 비빔밥도 기름이 듬뿍 들어가는 걸 좋아한다. 육식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지금 아이가 필요해서 하는 채식은 조리법도 영양의 균형도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기름기 없이 당분도 최소화해서 조리를 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이미 길들여진 아이들 입맛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쉬운 건 나만의 사정이다.
아무튼, 그런 까닭으로 아이들도 나도 먹는 양이 늘었다. 기존에 쉽게 채우던 열량을 과채류가 가진 영양소만으로 채우려니 이것저것 골고루 많이 먹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엄마 손품을 팔아야 먹을거리가 된다. 이것이 채식을 하게 되면서 내가 피곤한 이유였다.
가사 노동은 재생 노동이다.
나는 이 말을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다. 조금은 거부감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재생을 위한 노동을 하는 건 왠지 볼품없어 보이는 까닭이었다. 누구나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이지 소모되고 사라져 버리는 소품이 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채식 식단을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를 갈아 넣는 기분이 들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엄마가 해주는 밥 먹을 때 더 열심히 살 걸.’이다.
여기서 나의 엄마가 하는 재생 노동을 너무 당연시 여겼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었다. 나 역시 재생 노동에 허덕이면서 누구에게든 노동을 대신하게 하고 나는 다른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 이게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역지사지.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세상에 재생 노동이라 불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 나뿐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저녁 거리를 깨끗이 해주시는 분들, 정해진 날짜에 집 앞 쓰레기를 치워주시는 분들. 밤을 낮처럼 밝히며 필요한 물류를 채워주시는 분들. 밤낮으로 기계를 점검하고 수도를 관리하고 전기가 무사히 공급될 수 있게 살피는 사람들. 무언가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끊임없이 드러나지 않는 노동을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잊는다. 아니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다. 글을 쓰는 중에도 미처 깨닫지도 못한 일을 당연하게 하는 분을 다 꼽을 수 없는 것처럼.
어쩌면 산업혁명이 가져온 분업화를 너무 당연하게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각자 자신이 잘하는 일을 하면서 효율을 극대화한다는 명목 하에 너무도 많은 노동을 구분 지으며 내가 할 일, 네가 할 일 나누고 있는 건 아닌지.
고작 채식 며칠 했다고 이렇게 거창할 일인가 싶지만, 먹거리를 바꾸니 세상이 바뀌는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던 배달 앱(실제로 주문은 자주 안 하더라도)에는 주문할 수 있는 메뉴가 거의 없다. 마트를 가도 농산물, 과일 코너가 아니면 들를 곳이 없다. 세상이 이렇게 먹을거리가 넘치는데 넘치는 모든 것이 동물성이라는 걸 실감할 때마다 등골이 으스스하다. 이렇게나 무차별적으로 육식을 했구나 싶다. 이러면서 내 안에 내재된 폭력성에 대해 어쩌고 떠들었다는 사실이 부끄럽기 그지없다. 먹고사는 모든 것이 폭력을 담고 있었는데 말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비건으로 살지는 잘 모르겠다.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시작한 것도 아니고, 죽을 때까지 동물성 식품은 입에 담지 않으리라 선언한 것도 아니다. 입에 무언가 넣기까지 사용되는 에너지가 필요 이상으로 높다는 생각이 극에 달하면 그만 둘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이 짓을 계속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지 남편은 제법 염려를 한다. “제발, 적당히 하자.”
어떻게 해야 적당히가 되는지 아는 날이 오면 그 선에 맞추고 싶다. 세상에 당연한 노동이 아니라 의미 있는 노동만이 존재하는 날이 오면 적당히 타협할 수 있을까? 새삼 결혼한 딸에게 반찬이며 국이며 가장 큰 스티로폼 박스를 구해 담아 택배를 보내주시던 친정 엄마가 생각난다. 나는 뭘 그렇게까지 엄마를 부려먹었던 것인지. 가까이에서부터 멀리까지 수많은 재생 노동을 묵과한 대가를 몸소 치르는 중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주방으로 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