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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시옷 Dec 07. 2024

탄핵안 표결 결과를 기다리며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12월 3일 밤, 혼곤한 잠에 막 빠져들던 찰나에 계엄 상황을 알았지만, 비현실적인 단어에 잠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밤사이 세상이 달라질 뻔 했단 사실을 아침이 돼서야 체감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농담할 여유가 있었다.

교무실에 출근한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아침 스몰토크의 주제는 계엄이었다. 사회과 선생님은 대통령이 자꾸 수업거리를 던져준다며 인터넷 기사의 제목들을 훑었고, 영어과 선생님은 남편에게 "당신은 나를 위해 계엄을 발동할 수 있겠어?"라고 물었다길래 크게 웃기도 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이었기에 극한의 로맨티시스트의 역할을 부여해서라도 이 상황의 부조화를 해결해야 했다.

이후 언론을 통해 밝혀지는 4일 밤의 진실과 계엄의 목적, 대통령의 행보를 유의 깊게 주시했다. 가짜 뉴스를 구별해 낼 만큼 평소 정치에 대한 나의 지식이 높지 않았으므로 정확한 정보를 위해서는 인터넷 기사보다 티비 뉴스가 나았다. 티비 뉴스는 시간마다 반복한다는 장점도 있었다.


티비를 끄면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었다.

섬이 겪은 비극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미루다가, 책을 손에 잡기 시작한 그날 육지에서 비극이 재현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경하와 검은 나무, 경하와 인선, 인선과 인선의 어머니, 인선의 떨어져 나간 손가락, 3분마다 바늘로 찔러야 하는 환부, 인선과 새, 버스 정류장의 할머니, 다시 경하.

그 모든 사건과 사람들이 하나의 진실로 이어지는 소설적 경험이 눈앞에서 재현되었으니 신기하다 말할 수밖에 없다.


소설을 통해 작가가 진실을 꿰어나가는 실은 '눈'이다.

천천히 자기만의 속력으로 내려올 때 실처럼 그림을 그린다는 눈.

수십 년 전, 구덩이에 함부로 던져진 사람들의 검은 피딱지 위에 앉아 녹지 못했던 눈이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의 살갗 위에서 응당 녹아야 할 눈이 녹지 않으므로 비극이었다.

섬은 해가 바뀌면 어김없이 쏟아지고 쌓여가는 눈과 함께 살아야 하는 곳, 고통의 기억은 녹을 새 없이 쌓이기만 했을 것이다.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사라진 다음에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기억 그 자체가 되어 고통을 이었다.

어린 인선이 가출했을 때 인선의 엄마가 꾸었던 꿈이 바로 인선 얼굴에 닿은 눈이 녹지 않는 꿈이었고, 인선이 엄마의 꿈 이야기를 평생 기억하고 사는 것처럼.


눈이 실이라면, 바늘은 활자다.

(이때의 '눈'은 동음이의어의 두 가지 단어 중 어떤 것을 떠올리더라도 무방한데, 분명 작가의 의도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만큼 탁월한 소설이자, 작가라는 생각.)

끊어진 신경이 이어지게 하려면 '3분에 한 번씩 환부를 찔러야 한다'는 규칙은 신체가 절단된 환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책을 읽는 이는 정말 3분에 한 번 꼴로 경하와 인선, 인선 엄마의 이야기에서 고통의 신경을 이어가야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직시하는 행위 없이는 더 이상 멀쩡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이 책을 집어든 독자라면 모를 수 없다.

똑같은 비극을 또 한 번 겪을 뻔한 나라의 국민이라면,

고통을 직시하는 방법만이 유일함을 받아들이게 된다.




오늘은 탄핵 표결이 있는 날이다.

온 국민의 눈길이 국회에 모여 있다.

어제 밤늦게까지 뉴스를 보며, 여당의 당론이 바뀌지 않는다는 소식과 그들끼리 환하게 웃으며 나서는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보았다.

그것 또한 고통스럽더라도 직시해야 할 장면이었다.

뉴스는 오늘 제주에 눈 소식이 있을 거라고도 했다.

오늘 내릴 눈 결정체들이 그날, 그 검은 피딱지 위에 앉았던 눈일지 모른다. 그날엔 녹지 못했지만 오늘의 눈은 사람들의 뺨에, 옷깃에, 머리카락에 닿자마자 결정이 부스러질 것이다.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이다.


물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순환하지 않나. 그렇다면 인선이 맞으며 자란 눈송이가 지금 내 얼굴에 떨어지는 눈송이가 아니란 법이 없다. 인선의 어머니가 보았다던 학교 운동장은 사람들이 이어 떠올라 나는 무릎을 안고 있던 풀을 푼다. 무딘 콧날과 눈꺼풀에 쌓인 눈을 닦아낸다.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 -133쪽



살아있다면,
오늘 표결의 결과가 참담하더라도 끝까지 지켜보아야 한다. 탄핵에 반대한 이들은 누구인가, 국민을 버리고 자기들의 밥그릇을 챙긴 이가 누구인가. 이 땅 위의 비극을 외면한 무지몽매한 인간들은 누구이며, 권력은 어디로 흐르고 있는가.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무지몽매한 인간들로부터 민주주의가 훼손된다면 어쩔 것인가.
그때 우리는 서로에게 인선의 말을 빌려 주기로 하자.


계속해봐야지, 일단은.
시작하고 싶을 때 시작해.
일단 나는 계속하고 있을 테니까.
51쪽


어제 스웨덴에서 수상 이후 첫 공식 기자회견을 가진 한강 작가 역시 비슷한 말을 했다.
'희망이 있을 거라고 희망하는 것도 희망'이라고.
그저 계속 희망하며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기자회견에서 환하게 웃는 작가의 사진을 보며,
세계의 고통을 자신의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의 얼굴은 결국엔 저러해야 한다는 소망도 품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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