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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시옷 Dec 15. 2024

아이들이 나의 인정이를 키웠다.

서로를 응시하는 힘

2014년 2월에 첫 아이를 낳았다.

그 해 봄은 잔인하고 무도해서 백일이 채 되지 않은 아이를 품에 안고 무시로 울었던 기억이 난다.

뉴스에서 고개를 돌리면 이름만 불러도 이 없는 잇몸으로 웃어주는 아이가 있었다. 염치 없게 내 세상은 무사했다.

잘 먹고 잘 자는 것만으로도 존재가 이렇게 예쁠 수 있구나. 아니, 안 먹고 안 자서 속을 터지게 해도 소중한 존재일 수 있구나.


혹시 나도 소중한 사람까.

이제 다 큰 어른이라 우쭈쭈하고 예뻐해 줄 사람이 없다해도.

아이를 보며 막연하고 어렴풋하게나마 그런 생각을 했다.


17년에 둘째, 19년에 막내딸을 낳고 인정이는 성숙 단계에 도달했다.

아들을 키울 때보다 딸을 키울 때 나와 좀더 동일시 되는 경향이 있는데, 어린 시절 비교하며 외모와 성격, 습관 하나하나 비교곤 했다.

딸은 나를 닮아 활짝 웃을 때마다 잇몸 환하게 다. 그게 예뻤다. 이효리가 웃을 때 예쁘다 생각한 적이 없는데 딸은 예뻤다.

그렇다고 울 때는 안 예느냐.

일부러 울릴 정도로 우는 것도 예뻤다, 뼈가 녹는 느낌이 뭔지 알겠다 싶을 정도로.

나도  감정에 솔직한 모습 그대로 사랑스러웠을까.

마흔의 내가 다섯 살의 나를 보며 자주 물었다.

육아서에서 가르쳐 주는대로아이의 감정을 읽어주려 노력하는 동안 내 감정도 이해했다. 괜찮아, 고마워, 미안해 하는 말은 내 입으로부터 나왔지만 듣는 사람 역시 나였다. 내가 가장 듣고 싶던 말이었으니, 내뱉는 순간 내가 평화로웠다.

아이도 금방 울음을 그치곤 했다.


물론 힘들었던 순간이야 말해 무엇하겠냐만,

내 인생의 힘듦이 육아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만 힘들었던 것도 아니고

내내 힘들기만 한 것도 아니니 그건 논외로 하자.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화가 덜 나는 사람이 됐다. 원래 화가 없는 편이었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내 아이가 없던 시절에 십대의 아이들을 매일 보며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 화나는 일 투성이였다. 수업 시간에 왜 그렇게 무기력한지, 싸가지가 왜 바가지인지.

그러나 육아 휴직을 끝내고 다시 십 대의 아이들을 만났을 때 내 마인드는 달랐다. 육아 때문인지, 세월호 때문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십대 아이들에게 뿐 아니라 나에 대해서도 화가 덜 났다.

잘난 사람과 비교하는 일도 덜 했다.

(아예 안 한 것은 아니란 말이다.)

공부를 좀 못해도, 말이 좀 거칠어도, 심지어 강약약강의 태도로 빌런이 된 놈이라 하더라도. 인격의 미성숙함이자 존재의 불완성을 보여주는 증거일 뿐, 그 아이는 누군가에게 귀한 존재는 걸 생각했다.

우리의 인연이 불운 짧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건도 잊을만 하면 터졌므로 살아 있으  생각했다.

살아만 있으면 언제든, 무엇이든 할 수 있

달라질 수도 있다.


육아로 나를 인정할 수 있게 되다니 운이 좋다.

정말 운이 따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공을 운으로만 돌리는 것은 나의 내면 힘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니한번 다르게 생각 보자.

아이에게 향하던 사랑스러운 시선을 나에게로 돌릴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왜'라고 묻지 않다.

많은 양육자들이 잊고 살았던 어린 시절의 결핍이 육아의 과정에서 떠올라 분노와 서운함, 원망의 감정에 힘들어한다.

왜 나는, 왜 엄마는, 왜 그때는, 왜 하필.....

그러나 지나간 일에 답을 구할 수 없다.

답을 구한다한들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이다.

이유를 반드시 따져 물어야 할 때는 있어야 할 존재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때다. 아무런 맥락 없이, 게다가 잘못의 책임자가 있다면 끝까지 파고들어 이유를 캐야 한다.

하지만 있어야 할 존재가 그 자리에 무사히 있다면

''로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고마운 일이다. 아이가 그러하듯, 나도 당신도 그렇다.

대신에 '내가 너라면, 네가 나라면'하고 서로의 시절을 가만히 응시할 수 있다.

아무런 판단 없이 그 순간의 서로에게 집중하는 일은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직면하는 방법 중 하나다.


다섯 살의 내가 마흔 살의 나에게 대답하는 말 지 않아도 이젠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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