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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시옷 Mar 24. 2024

누군가를 모욕하는 말로 동기가 부여되나요

'글자를 품은 그림', 윤미경 글 김동성 그림

삼 일째 고민이 있다.
집 엘리베이터에 붙은 영수 학원 홍보 전단지에 아무렇지 않게 쓰인,
'벙어리 영어'라는 말.
그 말이 너무 거슬리고 심란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더더구나 아이들 가르치는 곳에서 장애인 비하 단어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면 안 되는데.
진짜 아닌데.
상담전화 하라고 써놓았을 개인 휴대폰 번호로 문자를 할까. 그냥 못 본 척할까.


글자를 품은 그림, 윤미경 글 김동성 그림


미로 같은 골목 사이로 낮은 지붕과 담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사는 동네, 별바라기 마을. 희원이는 그곳 별바라기 마을에서 청각 장애인 엄마와 단둘이 산다. 언제부터인가 희원이네 담벼락에는 귀머거리, 병신, 벙어리, XXX, OOO 같은 엄마를 욕하는 낙서가 가득 채워지고, 동네 사람들이 내다 버린 쓰레기가 담벼락 주변에 넘쳐 난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사람들이 남긴 낙서 위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희원이는 그런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일식이 있던 날, 희원이는 그만 담벼락의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마는데…….


한창 사춘기, 가만히 둬도 질풍노도인 희원이는 세상의 험한 말들과 편견 앞에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새가 없다.
이웃에 사는 기찬이 오빠를 좋아하지만 바로 그 오빠가 희원이네 담벼락에 빨간 스프레이로 욕을 쓴 범인이라니 이름 그대로 기가 찰 노릇이고, 청각 장애인인 엄마를 정말 사랑하지만 때로는 남보다도 더한 상처를 엄마에게 주기도 한다.
그러다 해와 달이 만나는 날, 엄마가 그려놓은 그림(벽화) 속에 들어가 어린 시절 엄마를 만나고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기 위해 '소원꽃'을 찾아가는 여덟 살의 엄마를 도우려 함께 나선다. 현실에서 엄마의 돌봄으로 살아가던 희원이가 환상세계에서는 엄마를 돌보는 것이다.

돌봄의 주체가 역전되는 일은 흔하게 본다.
소원꽃을 드디어 마주했을 때, 8살의 엄마는 '모성'이란 말로 설명되지 않는 커다랗고 커다란 사랑을 보여주는데 어쨌든 미래의 딸인 희원이에게 그건 '엄마'의 사랑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환상으로, 다시 현실에서의 관계가 뒤섞이며, 서로가 돌봄의 대상이자 사랑일 수밖에 없었음을 희원이는 아프게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엄마와 딸이라서 서로를 돌보고 사랑했던 것만은 아닐지도 몰라하면서
엄마이자 딸인 독자는 이쯤에서 어쩔 수 없이 울게 될 것이다, 나처럼.
그리고 엄마의 삶을 '청각 장애'에만 초점을 두고 바라보던 희원이가 환상세계에서 깨닫게 되는 또 한 가지,
엄마의 삶에 장애 극복보다 소중한 것은 무엇보다 자신(희원이)이었다는 사실이다.
장애의 유무와 상관없이 소중한 누군가를 위해 산다는 것은 중요한 삶의 목표 중 하나다.
하지만 현실에서
많은 사람들은 장애인의 삶의 목표가 '장애 극복하기'에만 있다고 오해한다. 오해에 그치지 않고 무례한 표현을 서슴없이 쓴다.
벙어리 영어라니,
누군가를 모욕하는 말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일이 진정 가능한가?
영어 말하기가 되지 않아 답답한 그 마음은 내 얘기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나는 누군가를 모욕하는 말로 나를 동기부여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나를 상처 주는 말이다.
나를 동기부여 할  다른 말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책 표지의 예쁜 벽화는 희원이 엄마가 험한 말 위에 그림 그린 것인데, 우리 집 앞 전단지는 그림 그려줄 사람도 없고 한 두 장 뿌린 것도 아닐 테니 참,
난감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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