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 올라와 처음 치른 시험에서 생전 처음 보는 낮은 점수에 아이들은 할 말을 잃었다. '예상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 몰랐다'는 반응들이다. 나는 혹여나 문제에 오류가 있을까, 성적이 고르게 변별되지 않을까 시험 직전까지 많이 불안했는데 다행히 아무런 오류 없이 무사히 끝났고, 상위권의 성적도 고르게 변별되어 마음이 놓였다. 내 마음은 시험이 끝나고 비로소 평온해졌는데, 아이들 마음은 지옥이 됐다.
나는 나의 할 일을 했을 뿐이야, 변별력 없는 시험은 아이들에게 허탈함을 안길 수도 있어, 첫 시험을 어렵게 치렀다면 앞으로의 공부 방향을 스스로 더 고민하는 건 아이들 몫이야.
내 마음을 편하게 할 이유는 차고 넘치게 댈 수 있는데, 아이들은 어떤 이유로도 마음이 편해지기 힘들다. 노력 부족, 공부머리 부족, 시간 부족, 체력 부족, 의지 부족. 부족 5종세트를 극복하지 못한 스스로가 나쁘다. 어제는 서술형 답안지를 확인하며 어떤 아이로부터 '죄송하다'는 말을 들었다. 수업한 선생님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아이가 잠깐 예뻤다가 오래 안쓰러웠다. 1등급 컷이 몇 점일지 짐작 가는 대로, 대충이라도 말해달라는 아이들에게 '아직 알 수 없다'는 말을 반복하며 또 조금 미안해졌다. 내가 미안할 일은 아니야라고 다시 한번 맘으로 되뇌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랬다.
국어시험 때 내가 부감독으로 들어갔던 반의 아이가 14번까지 마킹해야 하는 답안지를 12번까지 마킹한 것을, 나는 알고 있었지만 그 애는 몰랐고 왜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점수가 낮은지 당황해하는 모습에 내가 아는 걸 알려주는 게 맞는지 아닌지 고민하기도 했다.
나는 운이 좋아서 교사로 살고 있다. 미시즈 윌슨만 한 울타리는 없었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다행으로 여기까지 왔다. 아, 그중 가장 큰 다행은 스마트폰이 없는 시대에 자라고 공부했다는 사실이다. 그래놓고는, "선생님 너무 어려웠어요"라며 애써 웃는 아이에게 "아무리 어려워도 만점은 있는데?"라는 말을 비수처럼 날리고 교실을 나선다. 펄롱 아내가 말한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에요'는 '내가 미안할 일은 아니야'라는 나의 말과 겨우 두 세발자국 떨어져 있다. 펄롱이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수녀원을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일상의 그 사소함이 결코 사소하지만은 않다는 자각이 있었기 때문인데, 나의 자각은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단계에서 멈춰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