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정하고 놀이터에 가는 공휴일. 손에 잡히는 대로 얇은 책을 가져왔더니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다. 주인공 소녀가 타인의 다정함과 친절을 불편하고 낯설게 여긴다는 점에서 어제 연수 과제로 읽은 <경우 없는 세계>와 닮았다. <경우 없는 세계>는 오늘 자정까지 질문 두 가지를 패들렛에 올려야 해서 소풍 간식을 싸면서도 뇌 한쪽은 소설에 내어준 참, 그런데 그 옆방에 <맡겨진 소녀>가 들어왔으니, 그야말로 마음이 콩밭이다. '이러지 말자, 지금 여기에서 집중하자' 애써보지만 놀이터 여기저기에 서 있거나 앉아 있는 부모와 조부모들 사이에서, '대체 자기 자식에게 아무런 애정이 없는 부모는 어떻게 가능하냐'며 나는 화가 좀 나기도 했다.
세상에는 타인에게 의지하기를 넘어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있지 않나. 아기띠에 안겨 맨발을 달랑거리는 저 아기와 아장아장 걸어가는 14개월이 그렇고, 혼자서는 낯선 곳의 화장실을 찾아갈 수 없는 6살이 그렇고, 경제생활을 하지 않아 용돈을 받아야만 하는 십 대가 그렇다. 뿐인가,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아프다면 나이를 불문하고 의존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그렇다. 그러나 슬프게도 세상의 모든 약한 존재들이 보호받는 것은 아니고, 그런 일들이 수면 위로 떠오를 때마다 경악하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일상의 폭력은 반복된다. 소녀가 겪은 그 여름은 그런 일상이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 시간들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은 너무 많이 말하면서, 필요한 말은 정작 해주지 않는 부모의 양육방식이 실은 폭력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소녀는 부모와 다르게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꾹 참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고, 이는 전적으로 소녀를 돌봐준 아주머니와 아저씨 덕분이다. 자신들의 자식을 잃고도 그 슬픔에 압도되지 않고 타인에게 다정한 사람들, 그들의 다정은 어디서 오는 걸까. <경우 없는 세계>에서 경우가 보여주는 행동 역시 그런 의문을 품게 한다. 보육원에 맡기고 언젠가 데리라 오겠니라던 엄마를 기다리는 경우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랑을 받은 적 없지만 누가 봐도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는 아이다. 그 '사랑받고 자란 티'란, 타인에게 다정하고 친절한 모습을 말한다. 또 다른 등장인물 성윤이 지극한 사랑을 주는 양육자(할머니와 엄마)가 있음에도 가장 악한 인물로 등장한다는 것을 보면, 경우의 다정함에서 이유를 찾기란 더 난감해진다.
그러나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다정함의 이유는 슬픔에 있다고 나는 결론짓는다.
부부는 사랑받지 못하는 소녀의 슬픔을, 소녀는 사랑할 대상을 잃어버린 부부의 슬픔을 알아보았다. 여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 소녀가 한 일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일이었다. 그건 처음으로 시키지 않은 일을 스스로 찾아 한 것이었다. 그들 부부의 밑바닥에 고인 슬픔을 위로하고, 어쩌면 부부의 아들이 받았을 사랑을 똑같이 나누어준 그 고마움에 보답하고픈 소녀만의 다정함이었을 것이다. 경우의 다정함과 시간이 지나 인수가 이호에게 보인 다정함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으나 그건 샘들과 책대화 후에 서평에서 조금 더 다듬어 써봐야겠다.
놀이터에서 울음소리가 몇 분째 그치지 않았다. 긴 그물다리가 있는 데서 오도 가도 못하고 꼬맹이가 울고 있었다. 아빠의 덩치로 올라갈 상황은 못 되고, 어떻게든 아이 혼자 내려와야겠는데, 반바지 밑으로 기저귀가 훤히 보이는 아가에게는 너무 험난한 일이었다. 아가 주위로 아가보다 조금 더 큰 어린이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손을 내밀었다가, 아가 발을 억지로 떼게 해보기도 하고, 등을 토닥이기도 하고, 그냥 옆에 같이 있기도 했다. 나중에는 몰려든 어린이들 때문에 길이 막혀 못 내려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결국에 걔 중 가장 큰 초등 어린이가 번쩍 들고 안아 그물다리를 건넜고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왔다. 그러곤 약간은 수줍어하는 얼굴을 하고 정글짐을 타러 유유히 갔다. 어린이들을 움직이 것은 아가의 울음이었을 것이다. 나도 무서워서 울 때가 있었지, 엄마 아빠를 부르며 울었는데 하고 옛날 기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우리 집 어린이들은 작년일도 옛날이라 말한다.) 그러니 다정함은 어디 배워서 오는 것 아니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고, 그저 슬픔에서 오는 것이다.
어느 순간 우리 막내가 보이지 않는다.
이 녀석이 어디 갔을까 찾아나서니 혼자서 놀이터 끝에 있는 계단으로 내려가 두리번 거리고 있다.
은유야,하고 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바다가 보이는 놀이터에서 자기 심장을 손에 꼭 쥔 아이가 나에게 달려왔다. 나의 다정을 안아줄 수 있어 몹시 좋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