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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스타 Oct 27. 2020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D-227, 능력과 지식보다 사랑과 노력이 먼저

갑자기 휴대폰이 고장났다.

"긴급전화만 가능"이라는 글씨와 함께, 전화도 데이터도 아예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휴대폰을 껐다 켜 봐도 유심을 뺐다 끼워봐도 소용이 없어 통신사 대리점에 가보았다. 이리저리 휴대폰을 돌려보던 대리점 직원은 유심을 바꿔보라며 새 유심을 꽂아주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휴대폰은 어떤 통신 네트워크도 잡지 못했다. 당황한 직원은 아마 기계의 문제일 거라고 말하며, 서비스센터에 가볼 것을 권했다.

멀쩡한 유심을 두고 굳이 새로운 유심을 구입하게 되어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힌 나에게 직원은 말했다.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점심시간을 반납하고 서비스센터에 갔으나, 이유는 모르겠고 메인보드를 교체해야 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수리 비용은 22만 원. 휴대폰에 딱히 외상도 없고 다른 기능은 전부 멀쩡한데, 아직 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도대체 왜 고장난 건지 이유를 묻는 나에게, 서비스센터 직원 역시 똑같이 말했다.

"도움이 되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기껏 유심을 샀는데 여전히 문제가 해결이 안 되고, 점심도 못 먹고 수리하러 왔는데 고장난 이유조차 알 수 없고.

순간 마음이 좀 답답했다. 물론 내가 화를 내거나 불평을 한다고 지금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각자 나름대로의 노력을 했으나 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에, 도움을 주지 못해 죄송하다는 그들의 말이 조금은 무책임하고 서운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나는 얼마나 도움을 주는 사람일까 돌아보았다.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일까? 아니면 나 역시 도움을 주지 못해 죄송한 사람일까?




금융 분야에서 일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금융과 관련된 질문들을 곤 한다.

요새 잘 나가는 주식은 무엇인지, 이 펀드에 투자해도 되는지, 대출 금리가 제일 싼 은행이 어디인지, 어떻게 해야 재테크를 잘할 수 있는지.


이 질문들에 자신 있게 대답하기는 어렵다. 가장 큰 이유는 현재 공기업에서 하고 있는 업무가 금융시장 전반 또는 금융회사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저축, 투자, 세금, 노후설계 등 개인 소비자에게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금융지식들은 평소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며 남들이 아는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 유튜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식투자 성공 사례와 같은 아주 특별한 수준의 경험과 지식은 없다.


또 하나의 이유는 나의 가치관 때문이다. 금융에서 투자자 자기 책임의 원칙은 기본이기에, 자신의 현재 상황을 파악하고 금융상품에 대해 공부하는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투자에서 높은 수익률을 달성하는 것보다 바람직한 투자의 자세를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주식이란 단기적인 수익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장기적인 기업가치 상승을 기대하며 투자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투자로 높은 수익을 버는 것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재정을 아끼고 모으고 지혜롭게 사용하는 것부터 먼저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흔히 기대하는 답변은 해줄 수 있는 지식과 경험도 부족하고, 스스로의 가치관에 완전히 부합하지도 않기에, 나 역시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한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돕고 싶지만 그만큼의 지식과 능력과 경험이 부족할 때 느껴지는 부끄러움과 속상함.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도울 수 없을 때 가장 크게 느껴지는 것 같다.


남자친구가 개인사업을 시작한 이후, 우리는 사업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사업의 방향성과 목적, 타겟 고객, 다른 기업과 협업할 수 있는 방법, 새롭게 주어지는 여러 기회를 활용하는 전략들. 특히 사업 초기에는 구체적으로 의논할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기에, 남자친구는 종종 나의 의견 묻곤 했다.


남자친구는 나를 가정과 사업을 함께 이뤄가는 동역자라고 생각하며 나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의견을 물어봤지만, 나는 의견 하나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남자친구의 사업 분야 자체가 나에게 정말 생소했고, 경영학과를 졸업했음에도 숫자 감각이 아닌 경영 전략에는 크게 자신이 없었기에 특별히 의미 있는 도움을 주기가 어려웠다. 특히 패션이나 예술 감각이 꽝인 나에게 디자인에 대한 의견을 물어볼 때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혼자만의 눈치싸움을 벌이곤 했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응원과 칭찬보다는 날카롭고 예리한 통찰력으로 사업의 실질적인 성공에 기여하는 멋진 여자친구가 되고 싶었기에,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자친구를 가르치듯 말하곤 했다. 새롭게 시작한 사업이 전문성이 없어 보인다고, 콘텐츠가 너무 산만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모르겠다고, 특별 수익성도 차별성도 없는 사업모델인 것 같다고, 나는 경력도 지식도 전문성도 없이 그 분야의 10년 경력 대표님 앞에서 교만을 뽐냈다.


그런데 되돌아보면 항상 남자친구의 말이 맞는 것 같았고,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합리적이어서 납득이 되었다. 부족한 부분도 있었지만, 함께 개선할 방향을 고민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상황이었기에 나의 신랄한 비판 따위는 전혀 필요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사업의 결과가 좋게 나타났을 때, 나는 그것을 축하하고 기뻐하기보다는 내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 부끄럽고 속상했다.


나는 나의 전문분야에서도, 나의 인간관계에서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구나.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을까?




그러다가 문득 도움은 단순히 직접적인 필요를 해소해주는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돈에 대해 어떤 생각과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먼저 물음을 던지는 것.

금융상품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종류별로 차이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쉬운 말로 설명해주는 것.

어떤 투자상품이 좋냐는 물음에 모른다는 즉각적인 대답보다는, 한 번 더 찾아보고 그 고민에 공감하려고 노력하는 것.

단순히 높은 투자 수익률을 달성하는 것보다 올바른 투자자세를 갖고 자신의 위험성향에 맞게 투자하는 것이 중요함을 상기시켜 주는 것.

돈을 아끼고 지혜롭게 쓰기 위해 노력하면서 나 스스로 경험하고 발견한 꿀팁을 공유하는 것.


상대방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제시해줄 수는 없더라도, 충분히 상대방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설령 상대방이 도움이 되었다고 느끼지 못하더라도, 상대방을 아끼고 생각하는 사랑의 마음과 노력만으로도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자친구에게 줄 수 있는 도움 역시 사업에 대한 실질적인 이익, 지식과 전문성과 뛰어난 감각, 투자가 필요할 때 뒷받침해줄 수 있는 금전적 넉넉함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친구의 생각과 고민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것.

나의 일처럼 관심을 갖고 이것저것 알아보기도 하고, 나라면 어떻게 선택했을까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것.

남자친구의 가치관과 기준이 눈앞의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 않도록 옆에서 방향성을 지켜주는 것.

결과에 상관없이 남자친구를 신뢰하며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것.



능력과 지식이 있을 때 다른 사람을 더 잘 도울 수 있다는 것은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능력과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선한 마음, 그 사람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사랑, 그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공감하고 고민하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 전문성이 부족하기에 아무도 도울 수 없다고 낙심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능력과 지식을 갖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의 필요를 돌아보고 내가 가진 것을 넉넉히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출처]

커버 사진  https://unsplash.com/photos/9VpI3gQ1i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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