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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스타 Aug 10. 2021

결혼하니까 어때?

D+41, 부모님 그리고 남편과 함께 한다는 것

"한 달에 한 번은 꼭 찾아와라."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떠나기 직전, 잘 다녀오겠다는 남편의 인사에 아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결혼한 이후 부부 둘만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부모님과의 관계의 소중함을 기억하고 자녀로서 찾아뵙고 함께 하는 기쁨을 누리면 좋겠다는 말씀이셨다. 기숙사 생활을 했던 고등학교 3년과 대학교 교환학생 시절 6개월을 제외하고는 계속 부모님과 함께 지내서 그랬을까, 아빠의 인사는 유쾌하면서도 조금은 애틋하고 묵직한 느낌도 들었다.


둘만의 시간인 신혼여행에서도 아빠의 마지막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곳에서 잠을 자고, 푸른 바다와 싱그러운 숲속을 거닐 때에도 우리는 종종 부모님을 떠올렸다. 지금 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누릴 수 있는 것이 부모님의 사랑 덕분이었음에 감사하며, 앞으로 우리 둘의 관계에서 최선을 다하면서도 서로의 부모님과 가족들에게도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며 살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앞으로 매달 적어도 한 번은 부모님을 뵈러 친정과 시댁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다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캠핑하루.

결혼 이후 처음 친정을 갔을 때, 아빠는 이 책을 건네주었다. 표지에는 누가 봐도 캠핑카가 아닌 일반 SUV 차량 트렁크가 열려 있고, 그 안에는 포근해 보이는 주황색 침낭이 들어 있는 사진이 있었다.


코로나19 이후 사회적 거리두기가 널리 퍼지면서 그간 즐겨왔던 탁구, 자전거, 스쿠버 다이빙 같은 취미가 어려워지면서, 아빠는 '차박'이라는 새로운 취미를 시작했다. 텐트가 아닌 차에서 잠을 자는 차박은 캠핑과 비슷한 점이 많지만, 굳이 캠핑장이 아니어도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고 큰 장비 없이도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차 안에서는 굳이 다른 사람들과 마주칠 일이 없어서, 거리두기가 필수인 요즘 특히 더 주목받고 있다.


도시에서는 멀어지지만 자연에는 조금 더 가까이, 다른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지만 가장 소중한 아내와는 함께, 이미 완성되어 있는 멋진 숙소에서 편안함을 누리기보다는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조금은 불편하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운 '유'를 만들어내는 기쁨을 선택하는, 아빠의 차박은 그렇게 끝없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차박 여행에 초대되었다.

부모님을 뵈러 친정에 가는 것이 아니라,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가야 했다.



차박을 떠나기 전 무엇을 준비해야 하냐는 우리의 물음에, 부모님은 모자와 슬리퍼 외에는 필요 없으니 걱정 말고 편히 몸만 오라고 말씀하셨다. 자연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안에서 심심할까 봐 과일만 조금 준비했을 뿐, 우리는 처음 떠나는 차박 여행에 설렘과 기대감, 그리고 약간의 불안함을 안고 빈 손으로 출발했다.


내비게이션에서 도착했다는 안내 음성이 나왔을 때,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떻게 다들 이런 곳을 알고 찾아왔을까 싶을 정도로, 보기만 해도 시원한 강과 그 뒤 초록색으로 우거진 산을 바라보는 차들이 몇 대 세워져 있었다. 작은 승용차에서부터 그보다 조금 큰 SUV, 누가 봐도 번듯해 보이는 캠핑카, 그리고 크기로는 아무도 이길 수 없는 관광버스까지. 각양각색의 차량은 양옆에 크고 작은 그늘막, 차 트렁크에 연결되는 도킹 텐트, 그리고 화장실로 쓰기에 제격일 것 같은 원터치 간이 텐트를 두고 각자의 개성을 뽐내고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풍경에 신기해하며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깨달았다. 엄청나게 뜨거운 햇볕이 어떠한 가림막도 없이 바로 우리 위로 내리쬐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자연의 풍경은 너무나도 시원했지만, 강 반대편에는 어떤 가림막도 없었기에 당장 우리의 정수리는 타들어갈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지고 등에서는 땀이 주륵 흘렀을 때, 부모님은 싱긋 웃으며 장갑을 건네주셨다.

우리만의, 우리에 의한, 우리를 위한 그늘을 만들어야 했다.


부모님은 사람 네 명이 충분히 들어갈 뿐만 아니라 차량 두 대까지도 넉넉히 품을 수 있을 것 같은 큰 타프(tarp, 가림막)를 꺼내오셨다. 엄마와 나는 타프를 세울 기둥인 폴대를 하나씩 붙잡고, 아빠와 남편은 폴대를 홀로 설 수 있도록 바닥에 펙(peg, 말뚝)을 박고 끈으로 연결했다. 어떻게 하는지 말로 설명을 들었을 때는 하나도 어려운 게 없어 보였는데, 막상 직접 해보니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폴대 하나를 세우면 하나가 휘청거렸고, 끈을 팽팽하게 당겨 펙에 고정했는데 뒤돌아서면 어느새 펙이 땅에서 뽑혀 있었다.


평소 같으면 화가 나거나 한숨을 내쉬거나 "안 해!"하고 포기해 버렸을 텐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조금은 어처구니없기는 했지만, 짜증이 솟구치는 게 아니라 허허 너털웃음이 나버렸다.

"아, 이게 잘 안되네~" 한 마디면 충분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더 잘 고정될 수 있을지 (땡볕 속이기에 아주 짧게) 고민하고 토론하고 바로 시도해 보았다.


무려 한 시간 동안 겨우겨우 타프를 세웠는데, 다 세우고 나서야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타프의 짧은 면에 폴대를 세우고 타프의 긴 면은 삼각형의 지붕 모양을 이루어 햇빛을 가리도록 해야 하는데, 우리는 타프의 긴 면에 폴대를 세워 버려서 타프가 평평한 모양이 되었다. 머리 바로 위에서 오는 햇빛만 가릴 수 있어 면적 대비 효율성이 떨어지는 타프였지만, 그마저도 소중한 그늘이자 보람된 경험이자 다같이 웃을 수 있는 기회로 느껴졌다.



타프 아래에서 잠시 숨을 돌리며 쉬는데, 부모님이 또다시 일어나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6시. 저녁을 준비할 때가 된 것이다.


작은 가방에서는 신기할 정도로 차곡차곡 쌓여 있는 프라이팬과 그릇들이 나왔고,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라는 말 그대로,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바람으로부터 막아주는 스테인리스 가림막, 무더운 여름날 고기와 야채를 안전하게 보관해준 차량용 냉장고, 이것마저 폴대와 판으로 이루어진 조립식이라는 게 놀라울 정도의 휴대용 테이블까지 저녁 식사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갖춰져 있었다.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준비할 필요 없다고 하시고는 부모님은 우리를 위해 이것저것 준비해주신 것이다.


아빠가 좋아하는 팝송을 들으며, 맛있게 익어가는 고기를 남편 한 입 나 한 입 먹고, 부모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시 고개를 돌려 조금은 어두워진 하늘과 여전히 반짝거리는 강을 바라보았다.

약간의 분주함과 어수선함 속에서 여유로움과 평온함을 누리고, 무더운 여름날 강가의 그늘 아래에서 선선함을 느끼고, 사랑하는 부모님과 남편이 함께 하는 조금은 낯선 모습에서 마음이 행복과 감사로 가득 찼다.


특히 부모님이 들려주는 서로의 이야기는 큰 웃음이자 마음의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주로 부모님을 그저 아빠 엄마로만 바라보았던 나에게, 부모님은 부부로서 서로의 모습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셨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들을 때마다 재미있는 두 분의 만남, 결혼 이후 경험했던 서로의 다름, 그 시간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서로에게 서로가 최고의 남편이자 아내라는 말까지.

지금까지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지켜온 것도, 서로 다르지만 서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 것도, 상대방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100% 이해되지는 않아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좋아하는 것은 함께 하고 싫어하는 것은 참아온 것도,  부모님은 담백하게 말씀하셨지만 나는 그 어느 무엇보다 오늘의 부모님이 가장 멋있게 느껴졌다.



어느새 밤이 되어 소금같이 빛나는 별들이 가득한 하늘 아래에 누웠다.

여름용 침낭이 없어 한겨울용 침낭을 (감히 덮지는 못하고) 바닥에 깔고 누워 몸의 구석구석에서 열기가 나는 것 같아서일까, 쉽게 잠이 오지 않았고 마음속에 이런저런 감정들이 떠올랐다.


부모님과 함께 하는 여행이 이렇게 소중하고 감사한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

그 여행에 남편이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큰 기쁨.

부모님이 처음 가정을 이루고 우리 언니와 나와 남동생을 만난 그때가 어느덧 나의 인생에도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는, 낯설면서도 뭉클하기도 한 벅찬 마음.

앞으로 부모님과 나의 자녀들이 함께 할 시간들을 상상하다가, 문득 오랜 시간 함께 했던 나의 할머니가 떠오르는 먹먹한 그리움.


그렇게 첫 차박 여행의 밤이 저물었다.




"결혼하니까 어때?"

아직 미혼인 친구들은 종종 이런 질문을 한다.


알콩달콩한 신혼생활, 혼자 하면 귀찮지만 함께 하면 그럭저럭 할만하고 때로는 즐겁기까지 한 집안일, 화장할 필요 없이 데이트 일정 고민할 필요 없이 함께 할 수 있다는 편안함,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에 퇴근하고 주말에 고개를 돌렸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일상에 대한 감사함.


지금까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부모님의 모습, 그 속에서 서로를 향한 변함없는 사랑과 믿음, 앞으로 나도 부모님처럼 잘할 수 있을까 어른의 무게가 걱정스러운 나에게 잘할 수 있다며 여전히 격려와 지지를 보내주시는 사랑.


그리고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 남편과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 부모님이 한 가족이 되어 함께 한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당연하지만 어떻게 보면 정말 놀랍고도 감사한 일이라는 것에 대한 깨달음.


이 모든 것을 구구절절 다 설명할 수 없어, 그저 짧고 굵은 한 마디로 대답한다.

"좋아!"



[출처]

커버사진 https://unsplash.com/photos/J_XuXX9m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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