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없이 상견례하기
결혼은 안 했지만, 상견례라면 벌써 했다. 남자친구가 내 자취방으로 쫓겨났던 그날, 남자친구 부모님께서는 양쪽 부모님이 서로 인사하는 자리를 마련하자고 하셨다.
“우리는 아무 때나 시간 괜찮으니까, (내 쪽) 부모님 시간 언제 되시는지 확인해 보고 바로 날짜 잡자.”
결혼식을 하지 않겠다는 이유가 아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셔서 그랬는지, 남자친구 부모님은 나와 내 부모님에게 많이 미안해하셨고, 그래서라도 상견례는 꼭 하고 가자고 하셨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와 부모님을 위해서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상견례라는 절차를 통해 나와 남자친구가 우리가 사실상 부부로서 이 동거에 대해 진지하게 바라보고 우리의 관계에 책임감을 가지기를 바라셨던 거 같다.
오히려 가벼운 동거로 생각하셨던 부모님은 상견례 얘기에 당황하셨다. 그래도 서로 만나는 자리가 있으면 좋겠다는 데는 동의하셔서 약속 날짜는 바로 잡혔다. 그렇게 동거 시작 후 한 달이 채 되기도 전에 상견례 자리가 마련됐다. 상견례 자리는 처음에는 부모님만 참석하는 자리로 생각했다가 남자친구의 누나와 매형, 그리고 조카까지 참석하겠다고 했고, 나도 그에 맞춰서 동생을 부르면서 양쪽 가족이 모두 모이게 됐다.
보통의 상견례 자리는 결혼과 관련해서 결혼식은 언제 어디서, 신혼집은 어디로, 같은 이야기가 오고 가는 걸로 아는데, 우리는 아무래도 결혼식이 빠져있다 보니 이 상견례가 어떻게 흘러갈지 전혀 예상이 되지 않아 걱정이었다.
다행히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어린 조카가 어색한 분위기를 푸는데 한몫을 했다!) 양가 부모님도 서로 웃으며 인사하고, 덕담을 나누셨다. 오히려 결정해야 할 게 아무것도 없어서 좋았다. 결혼식이라는 ‘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오고 갔다.
생각해 보면 양쪽 집안이 서로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결혼식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합일점을 찾는다는 거 자체가 어렵지 않은가 싶다. 보통 상견례에서 양쪽 의견이 맞지 않아 부모님이 서로 대립하시다가 안 좋은 분위기로 끝났다는 이야기들이 있는 걸 보면 상견례는 결혼식 이야기 없이 진행되는 게 더 좋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갑작스럽게 잡은 자리이기도 했고, 무슨 정신으로 음식을 먹었는지는 기억이 없는 만큼 긴장을 많이 하긴 했지만 (나중에 동생이 올린 인스타그램 사진 보면서 '아 우리 이런 거 먹었구나' 했다) 상견례는 무사히 끝났다! 우리는 양가 부모님께 ‘앞으로 잘 살라’는 덕담을 받으며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결혼도 안 하면서 상견례라니 싶었는데, 그 자리가 있었던 덕분에 부모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자식의 애인’이 아니라 ‘사위/며느리’라고 받아들이실 수 있었던 거 같다. 그래서 나와 남자친구가 보통과 다르게 결혼식 안 하고 그냥 사는 거나, 아기 먼저 낳겠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러려니 하시는 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