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가 나의 첫 와인 선생님이라면 P는 음식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 사람이었다. 십분의일의 형태를 요식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음식의 맛보다는 공간업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분위기가 또 바뀌었지만 당시 을지로의 많은 공간들이 그랬다. 술과 음식에 힘을 주기엔 자본도 실력도 부족한 아마추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 각자의 감에 의존해 최대한 좋은 공간을 만들고 내 집에 초대하듯 캐쥬얼하게 사람을 초대하는 식의 공간이 많았다. 그렇게 공간 자체를 즐기게 하자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공간에서 주로 하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 그게 아무리 핑거 푸드 위주라고 해도 음식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P는 동일이가 소개해준 태형이형의 지인이었다. 빨간 비니를 쓰고 뿔테 안경을 쓴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인테리어를 막 끝내고 가구 하나 없이 캠핑 의자를 둔 채 몇몇 지인들을 맞이하던 시절, 그가 처음 놀러 와서 했던 말이 아직도 생각난다.
"정말 좋은 공간이에요... 여기서 많은 걸 할 수 있겠는데요?"
보통 그런 멋진 사람들이 그렇듯, 그의 직업이 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태국에 꽤 오래 살면서 바와 레스토랑에서 일했었고 디자인 비슷한 걸 한다고 했지만 그래서 그가 어떻게 일상을 보내며 사는지 도무지 머릿 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확실한 건 나보다 모든 면에서 바 운영이라는 걸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수상하리만큼 예비 사장으로서 나를 존중해 줬다. "현우님이 감이 참 좋으신 것 같아요."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한편으로는 엄격한 주방 관리자이기도 했다. 그는 내 부탁으로 주방에 들어와 초기 세팅에 관한 많은 것들을 틈틈이 알려줬다. 뱅쇼는 어떤 식으로 끓이는 게 좋은 지부터 시작해, 스탠 국자여도 뜨거운 팟에 오래 담아 두면 아주 미세하게라도 맛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 주의해야 된다는 디테일한 조언도 따라왔다. 집에서 친구를 초대하는 것처럼 최대한 정성스럽게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내 인식을 바꿔준 사람이었다. 매장에 오는 사람들은 친구가 아닐뿐더러 집에 오는 친구들은 돈을 내고 음식을 먹지도 않는다.
오픈 파티 때도 그는 쓱 놀러 와서 주방을 체크해 줬다. 당시 십분의일에는 카프레제 메뉴에 있었는데 재료 회전이 빠르지 않았기 때문에 야채 보관이 늘 어려웠다. 야채는 냉장고에만 넣어두면 된다라는 원시적인 발상이 있었던 나는 코스트코에서 사 온 어린잎을 용기 통째로 냉장고에 넣어두곤 했는데 그걸 보고 깜짝 놀란 P가 야채가 오래 가려면 어떻게 랩핑하고 보관해야 되는지 알려줬다. 오픈 일에 그걸 본 멤버인 J형이 우리 지금 이대로면 내일 문을 닫아야 된다며 호들갑을 떨어 스트레스를 받기 했지만... 하나하나가 배움의 과정이었다. (카프레제는 얼마 못 가 메뉴에서 없어졌다)
P는 나에게 플레이팅 등에 참고하라며 요리 관련 책 2권을 빌려줬다. 전부 영어로 돼있는 해외서적이었는데 사진이 많아서 볼 만했다.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는 책이라고 했다. 오픈하고 3-4개월쯤이 흘렀을 때 오랜만에 P가 다시 매장에 찾아왔다. 그는 제법 사람들이 차 있는 매장을 한 바퀴 둘러보며 마치 건물주의 느낌으로 흡족해하더니, 지난번에 자기가 준 책을 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태국으로 떠나게 됐다며 쿨하게 인사하고는 홀연히 매장에서 사라졌다.
그 뒤로 그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다.
가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영화 <맨 프롬 어스> 주인공이 생각난다. (드라마로 더 쉽게 가면 별그대 도민준이나 도깨비 공유같은...) 존재했던 사람들인가 싶을 정도로 그들은 어느새 자취를 감춘다. 마치 도깨비처럼 시의적절한 때에 쓱 나타나 필요한 도움을 주고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들은 정말 도깨비였던 걸까? 이성을 붙들고 다시 돌이켜보면 그만큼 간절히 원했다는 생각이 든다. 잘 모르고 절박하니 도움이 필요했고 열심히 사람을 찾았다. 그리고 마침 응답하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럼 지금도 내가 간절히 원한다면 그런 사람들이 나타날까? 잘 모르겠다. 우선 내가 지금 하는 일에 얼마나 간절한지조차 의문이 들때가 많다.
이 자리를 빌려 도움을 주었던 C와 P 그리고 함께 했던 모든 이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