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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범 Jan 17. 2021

기분이 조크든요

물구나무서기의 쾌

'러너스 하이'라는 말이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A.J. 맨델이 1979년 발표한 논문에서 처음 언급한 개념이라고 하는데, 달리기와 같은 운동을 장시간 지속하다 고통을 느끼는 한계 지점을 넘어서면 찾아오는 행복감을 의미한다. 이런 감각을 경험한 사람들은 중독된 듯 운동의 매력에 빠져들어 달리기를 그만둘 수 없다고도 한다. 이런 상태에 있는 이들에게 운동은 더 이상 건강을 위해 귀찮고 힘들어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운동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쾌락과 충족감을 다시 느끼는 것이 몸을 움직이는 가장 우선적인 목표가 될 것이고 그래서 따라오는 운동 효과는 그야말로 운동의 후-효과(after-effect)가 될 테다.


나는 달리기를 그다지 즐기지 않을뿐더러 ‘러너스 하이’를 느낄 만큼 달려본 적은 더욱 없지만, 달릴 때의 감각이 좋아서 계속 뛰게 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는 알 것 같다. 바로 직전에 쓴 글에서 (몇 년 동안 꾸준히 연습했지만 여전히 몇 초도 버티지 못하는) 물구나무서기를 계속 연습하는 이유에 대해 나의 역사와 욕망의 맥락을 들여다보며 구구절절 썼다. 하지만 사실 누군가 당장 오늘 물구나무 연습을 하러 벽 앞으로 가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이 한 마디면 충분할 것이다. "기분이 조크든요."

물구나무를 서는 것은 쾌감이 있다.

물구나무서기를 하려면, 먼저 나의 기반이 되어 줄 두 손을 바닥에 내려놓아야 한다. 손바닥은 너무 건조하지도 너무 축축하지도 않은, 살짝 땀이 났을까 말까 싶게 촉촉한 상태가 좋다. 그런 손이 바닥이나 매트를 짚으면 쫙 달라붙는 느낌이 들어 나를 받쳐주는 바닥의 공고함을 훨씬 잘 느낄 수 있다. 시선은 두 손 사이 바닥을 향한다.* 그 상태에서 다리와 골반을 들어 거꾸로 선 자세로 올라간다. 하체를 들어 올리는 방법과 경로는 다양하지만 가장 기본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한 다리를 먼저 차올리고 다음 다리가 재빨리 따라가는 방식이다. 나는 요즘 두 다리와 골반을 점핑하듯 한꺼번에 올리는 연습을 하고 있다. 발을 차는 힘으로 올라가기보다 골반 자체를 띄우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 인데 이렇게 시도하면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감각도 더 즐길 수 있다.

이렇게 몸을 거꾸로 세우기 위해서는, 아니 적어도 하체를 상체 위로 띄워 올리기 위해서는 전신의 근력과 집중력, 균형 감각 등 꽤나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골반과 하체가 떠오르는 순간에는! 나의 물리적 힘들은 물론이거니와 감각적, 인지적 능력까지 한 점으로 집중되는 느낌이 든다. 이렇듯 몸과 마음이 한 데 맞춰진 감각은, 무언가.. 나라는 존재가 생동하는 충만함이다. 순간적으로 큰 힘을 사용할 때  몸의 중심부에서 확 솟구치는 열감도, 평소에는 바닥에 묶여있던 발과 다리가 날아오르는 듯한 감각도 이 경험의 매력을 배가시켜 준다.

물구나무서기가 주는 쾌감을 느끼다 보면 조카가 처음 일어서기 시작했을 때와 걷고 또 뛰기 시작했을 때의 모습들을 떠올리게 된다. 한 번 서기 시작하자 조카는 연신 엉덩방아를 찧으면서도 일어서기를 계속 시도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서는 것이 안정되자 균형이 흔들리는 것을 불안해하면서도 한 발 한 발 떼며 뒤뚱뒤뚱 걸었고, 걷는 것이 익숙해진 후에는 틈만 나면 콩콩콩콩 뛰어다녔다. 아이들은 누가 요구하거나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편하게!) 누워만 지내던 삶을 청산하고, 몸을 뒤집고, 기고, 앉고, 서고, 걷고, 뛰며 끊임없이 움직인다.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눕는 것보다는 네 발로 기는 것이, 기는 것보다는 앉는 것이, 앉는 것보다는 서는 것이, 서는 것보다는 걷는 것이, 걷는 것보다는 뛰는 것이 점점 더 어려운 균형 감각을 요구하는 행위들이다. 기본적으로 무게 중심이 낮고 더 넓은 지지 기반을 가질수록 중력과 안정적인 관계를 맺기 때문에 몸을 일으킬수록 균형은 흔들리는 것이다. 게다가 걸을 때는 순간적으로 한 발을 들어 앞으로 나가는 동안 다른 한 발로 균형을 잡았다가 발을 내려놓으며 다시 두 발로 균형을 잡는 자세가 반복된다. 그렇기에 서있는 것보다 더 발달된 균형 감각을 필요로 한다. 나아가 뛰는 것은 한 발로 균형 잡는 자세만이 교차되며 이루어지기에 걷기보다 더 불안정하고, 그렇기에 더 어렵다.

하지만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이렇게 어려운 균형을 혼자 배워 나가고 그것을 연습한다. 그리고 이렇게 연습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그것이 본능적인 쾌감을 주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관점에서 쾌감이 먼저 있어서 인간이 두 발로 직립하는 동물로서 진화했는지, 아니면 두 발로 보행하는 동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이런 쾌감을 느끼는 본능이 남게 되었는지의 선후 관계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닭과 달걀 중 무엇이 먼저냐 같은 문제 이리라.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렇게 불안정한 균형에 도전하고 탐구하고 연습하는 활동이 쾌감을 준다는 것이다. 어린이에게 기고, 앉고, 서고, 걷고, 뛰는 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시작하고 쾌감을 느끼기에 반복하는 일종의 놀이이다. 그리고 어린이들은 이런 놀이를 통해서 성장하고 신체를 발달시킨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거쳐 성장이 멈춘 성인들의 경우 어쩌면 몸을 움직이며 어색하고 어려운 균형을 탐구하고 배웠던 즐거움을 점차 잊어버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때로는 마냥 앉아 있고만 싶고, 움직이기보다는 누워서 넷플릭스를 보는 것이 훨씬 유혹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하지만 막상 움직이고, 새로운 균형을 경험하다 보니, 그 불안정함에서 오는 매력을 느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기에 느낄 수밖에 없었던 두려움의 껍질을 약간 벗겨내고 보니 이 매력이 어느새 마력이 되어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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