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물구나무서기를 계속 해왔나?
두 손 짚고 물구나무서기 연습을 하다 다치고 난 후, 한 동안 나는 다시 두려움과 패배감에 젖어 지냈다. 자신감 있게 자주 연습하던 머리서기 동작 조차도 새로이 두렵게 느껴졌고, 자주 연습하지 않게 되었다. 또 그때 마침 지도자 과정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요가 강사로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내가 진행하는 수업 내용에 물구나무서기 동작들은 절대로 포함시키지 않았다. 물론 다양한 몸들이 함께 수련을 하는 단체 수업에서 시도하기에 위험성이 있는 아사나라는 표면적인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나 스스로 자신감이 없는 아사나였다는 점은 스스로에게도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던, 그러나 실은 아주 중대한 이유였다.
그렇지만 물구나무서기와 영영 결별한 것은 아니었는데, 얼마간의 휴식을 통해 다쳤던 허리도 회복되고 두려움도 어느 정도 사그라든 후에는 다시 연습을 시도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이렇게 물구나무서기를 시도하다가 부상당하는 일이 한 번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한 번은 집에서 혼자 연습하다가 오른쪽 어깨 힘이 빠지면서 그대로 한쪽으로 무너져 구르기도 했고, 학교(연기를 전공하는 대학원 과정에 있다) 아크로바틱 워크숍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다가 손목에 무리가 갔던 적도 있다. 이렇게 크고 작게 한 번 씩 다치고 나면 또 일정 기간 휴지기를 거치며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꾸로 서겠다는 목표를 포기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스무 살 때 겁에 질려 저런 것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때를 떠올리면 꽤나 담대해진 모양새였다.
이렇게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났던 심리적 배경에는 내가 해온 일들이 관련되어 있었다. 사실 나는 ‘몸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냥 한 사람으로서도 그렇지만 요가를 가르치고 무대 위에서 공연을 하는 일을 해왔기에, 더 전문성 있는 직업인이 되기 위해서도 몸을 잘 쓰고 싶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이길 바랐다. (매거진의 첫 번째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일단 요가 강사로서 어려운 동작들을 척척 해내고 회원들이 동경하는 대상이 되고 싶었다. 요가 강사가 아사나를 척척 해내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잘해야 하는 일이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실 마음속으로는 멋지게 동작을 보여주는 순간들을 꿈꾸었다. 게다가 물구나무서기 말고도 내가 잘 못하는 자세들이 아주 많았(고 지금도 많)지만, 왠지 물구나무서기를 할 수 있으면 다른 아사나들도 다 잘하게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또 몸 잘 쓰는 배우(퍼포머)가 되고 싶기도 했다. 대학 졸업 이후에 나는 요가 강사로서 활동해온 동시에 퍼포머로서 연극을 창작하는 일도 꾸준히 해왔다. 무대에서 공연을 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몸을 재료이자 매체로 활용하여 무언가를 표현해야 하기에, 배우로서 나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몸 능력을 끌어올리고 싶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욕구였다. 비단 화려한 액션을 수행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일상에서는 아무런 의식 없이 하던 행위나 동작들도 무대 위에서는 모두 어색하게 느껴지기에 이런 어색함을 관객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 몸을 잘 운용하는 능력을 탑재하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내가 공연이나 연습에서 물구나무서기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구나무서기를 할 수 있는 배우는 재주가 많고 몸이 가벼운 배우일 것이라고 스스로 덮어놓고 믿어버린 것도 있었다. 그러니까 나의 무의식 속에서 물구나무서기는 ‘몸 잘 쓰는 사람’에 대한 일종의 환유적 메타포였던 것이다.
이런 ‘덮어 놓고’의 믿음이 일견 미련해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물구나무서기와 만나고 실패했던 나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한다. 뜀틀을 넘어야 할 때도, 발야구 경기에서도, 철봉 매달리기를 할 때도, 내 차례만 되면 고장 난 듯 삐걱거리는 몸 때문에 체육 시간이 무서웠던 나에게, 요가는 처음으로 몸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해 준 운동이었다. 지구력과 유연성은 내 몸이 가진 몇 가지 안 되는 ‘파워(력)’였는데, 운동으로서 요가가 수련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능력들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체육 시간에 경험했던 ‘운동’은 주로 경쟁적인 상황이나, 다른 사람이 보고 있어 긴장되는 상황에서 눈에 띄는 무언가를 해내야 하는 활동이었다. 그에 비해 요가는 경쟁이나 보여주기와는 정 반대의 태도를 요구하는 활동이었기에 나는 ‘요가’를 통해 편안하고 자신감 있게 ‘운동’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요가를 수련하는 과정에서 만난 물구나무서기는 또다시 무언가를 성취하고 보여주어야 한다는 묘한 목표 의식을 갖게 만들었다. 아사나 수련을 하며 어느 정도 몸에 대한 자신감을 쌓아온 나는, 이제야말로 물구나무서기에 성공함으로써 그간 내 몸에 대해 가져온 열등감을 청산해버리고 싶었다. 나는 이렇게 해묵은 마음의 벽을 허물어버리고 싶은 욕구로부터 물구나무서기를 시도했고, 실패해서 몸과 맘을 다칠 때마다 다시 뿌리 깊은 열패감에 빠져 들었다. 그러다가도 휴지기를 거치며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서는 다시 연습하기를 지금껏 반복해왔다.
이제는 안다. 물구나무서기를 할 줄 알게 된다고 모든 아사나들을 다 잘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고, 물구나무서기를 할 줄 아는 배우가 몸을 잘 쓰는 배우도 아니라는 것을. ‘몸을 잘 쓴다’는 것이 어떤 특정한 동작을 할 수 있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것을.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끊임없이 실패하고 다치면서도 물구나무서기를 계속 시도하고 연습해왔던 역사가 나에게 분명히 몸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해 주었다는 점이다. 끈질기게 물구나무서기와 씨름하며, 나는 한두 번의 성공의 기억이 아니라 100번 200번의 실패의 경험이 나로 하여금 더 가볍게 다음번 시도를 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가볍게 시도할 수 있는 것이 지겹게 나를 사로잡았던 두려움을 에둘러가는 (내가 아는) 거의 유일한 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두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거꾸로 서서는 5초 이상 자세를 유지하지 못한다. 또 여전히 잘 못하는 동작이나 아사나가 잘하는 것보다 많고, 하물며 내가 못하는 것들을 모두 섭렵하겠다는 엄청난 포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스무 살 때의 나보다, 그리고 스물다섯 살 때의 나보다 내 몸을 알고 움직이는 것에 대해 훨씬 큰 믿음을 갖게 된 것만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이것이 내가 물구나무서기를 성취했기 때문이 아니라 끊임없이 무너지고 넘어지고 뒤집어지는 과정에서 내 몸의 한계와 가능성을 더 정확히 알게 되었기 때문임을 말이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Kelly Sikkema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