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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범 Jan 24. 2021

찌질하게 꾸준하기

언젠가부터 나는 물구나무서기를 '찌질하게*', 그러나 꾸준히 연습하기로 했다. 꾸준히 물구나무서기 연습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 이게 말처럼 그리 멋진 모습은 아닌 것 같다. 이전 글에서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나는 매일 운동을 하고 물구나무서기 연습도 하지만 그 날 하고 싶은 것들만, 하고 싶은 만큼만 움직이곤 한다. 그래서 정말 바쁘거나 너무 하기 싫은 어떤 날에는(이런 날이 그리 자주 오지는 않지만) 아예 안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엉덩이가 너무 무거워서 물구나무서기라기보다는 엎드려 폴짝거리다 “에잇, 참 더럽게 안 되는군!”하며 끝내는 날도 있다. 어떤 시기 동안에는 뭔가 늘고 있다는 느낌이 거의 없이 고인 물 같은 연습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매일, 매 번 무언가를 성취할 필요도 없고, 항상 발전하는 중일 필요도 없다고 여기기로 했다. 누가 보면 “그렇게 물구나무서기 연습한다고 호들갑을 떨어 놓고… 장난하냐?”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꾸준함의 비결이 있다고 생각한다.

성실함은 엄마가 내게 물려주신 큰 유산이었다. 엄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셨고, 동시에 언니와 나 둘을 혼자서 키워내셨다. 이미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워킹맘이면서도, 청소년기인 언니와 나에게 본인이 먼저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시겠다며 대학원을 다니셨다. 또 그 흔한 배달 음식도 잘 시키지 않으며 딸들의 식사를 모두 챙기셨고, 급할 때 S.O.S를 칠 친정 엄마도 없이 모든 가사 노동을 혼자서 해내셨다. 지금은 퇴직을 하셨지만, 퇴직하신 후에도 여전히 쉬는 법을 잘 모르신다. 퇴직 후 생긴 여유 시간에 조카를 돌보고, 나를 위한 반찬들을 해서 직접 가져다주신다. 하다못해 텔레비전을 볼 때도 나물 다듬기나 마늘 빻기 같은 노동을 멈추지 않으신다. 이런 엄마를 보며 자랐기 때문에 나 역시 스스로의 성실함을 평가하는 눈이 엄격하고 높은 사람으로 자라났다. 그리고 그런 성실함을 무기로 지금껏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는 더 이상 성실함이라는 나의 무기를 뿌듯하게만 여길 수 없게 되었다. 성실한 나의 엄마를 존경하고 여전히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내 안에 뿌리 깊은 성실함 패치가 있는 것은 좀 불편해졌다. 그러니까… 그렇게 성실하게 사는 것이 약간 찌질해 보였다. 어쩌면 성실하기만 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재능이 출중한 사람이 성실하기까지 하면 정말 멋있어 보이지만, 재능은 없으면서 성실하기만 한 것은 뭔가, 너무, 인생에 대해서 억지를 부리는 것 같았고, 그게 찌질하다고 생각했다. 막상 엄마든, 다른 사람이든 성실한 누군가를 보며 찌질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음에도, 나 자신에게만은 ‘재능 없는 일을 애써 할 바에야 그냥 포기하고 잘하는 걸 찾아서 하면 되잖아!’ 하고 쿨하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내가 이미 하기로 결정한 일들에 대해서는 선천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고 싶었다. 연극을 하기로, 또 요가 가르치는 일을 하기로 결정한 마당에 사실 내가 몸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질까 두려웠다. 혹시라도 그런 게 밝혀져 진로를 잘못 선택했다는 결론에 도달할까 봐 불안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지만,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말이다. 하지만 당시 나는 내 몸의 운동 능력이나 감각에 대해 그다지 자신감을 느끼지 못했기에, 이미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사실 몸 쓰는 일에 있어서 성실하기만 한 찌질이라는 결론 말이다.

나에게 있어 ‘우수한 신체 능력’의 상징과도 같았던 물구나무서기를 연습하면서도 한 동안은 끊임없이 이런 마음의 갈등을 느껴야 했다. 해야겠다는 의욕과 해도 안 될 것 같다는 무기력 사이의 줄다리기였다. 연습한 날짜는 하루 이틀 쌓여가고, 그만큼 물구나무서기에 성공하지 못한 경험도 하나 둘 쌓여 가는데 나아지는 것은 별로 없어 보이면, '재능은 없이 노력만 하는 찌질이'가 된 것 같아 스스로에게 실망하곤 했다. 이런 감정이 쌓이다 보면 어느새 연습을 계속할 의욕은 사라지고, 애만 쓰다 나의 찌질함을 다른 이들에게까지 들킬 바에야 아예 포기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주변에서 나에게 “성실하다”라고 칭찬하면 그 말이 “넌 재능은 없지만 열심히는 하는구나”라며 공격하는 것처럼 들려서 기분이 나빠지던, 그런 불안한 시기였다. 당시에 내가 이렇게 불안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적자면야 또 한 페이지를 쓸 수도 있겠지만, 이 글의 맥락에서 그 이야기가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당시 내가 20대 후반-30대 초를 지나는 중이었고, 4대 보험과 연금을 보장해주는 안정적인 직장도, 결혼 계획도, 내 이름으로 된 집도 차도 없는 한국 여성이었다고 이야기하면, 누군가는 '그럴만하군...' 하며 고개를 끄덕여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지금이라고 이런 내적 갈등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에 대한 불안과 불만이 가득했던 시기를 어느 정도 지나왔다는 생각은 든다.

어려웠기에 나 자신을 돌보는데 시간을 쓸 수밖에 없었던 시기를 지나며, 나는 다시 나의 성실함과 꾸준함이라는 아이템을 꺼내 들기로 했다. 뭐.. 어차피 그것 말고는 기댈 것이 별로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내가 나의 성실함을 다시 긍정할 수 있게 된 것은 찌질함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조금이나마 더 '잘 함'에 가까워지게 만들어주는 비결이라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잘하고 싶은 의욕이 충만하고 찌질한 내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했던 때는 연습을 시작하는 것은 물론 매번의 시도가 어렵고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그냥 찌질해지자고 아싸리 맘을 먹으니 매일 연습을 시작하는 것도, 한 번을 시도하는 것도, 심지어 운동을 끝내는 것에 대해서도 더 가벼워질 수 있었다. 마음이 가벼워지니 무겁기만 하던 엉덩이도 좀 더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좀 부족한 듯싶게 운동하고 마치니 다음 날 다시 운동을 시작할 의욕이 쉽게 차올랐다. 게다가 뭔가를 멋지게 성공하고 성취해야만 의미를 찾는 연습이 아니기에 오히려 더 재미있게 할 수도 있었다. 목표만 바라보며 갈 필요가 없기에 샛길에 있는 생각들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구나무를 서며 우리가 지면 및 중력과 관계 맺는 것 자체에 대해 생각하고, 여러 물구나무서기 자세들 사이이 차이를 경험적으로 발견하고, 이런 발견을 통해 나의 레슨 회원들과 소통하기 위한 언어를 구체화할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특별히 거창한 목표 의식도, 매일매일 빡빡하게 짜인 발전 계획도 없이, 실제로 실력이 일취월장하지도 않는 연습을 꾸준히 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많은 것들을 즐기고, 생각하고, 얻으면서. 그러다가 또 어느 날 마법처럼 짠 하고 올라가서 5초를 버티게 되고, 또 어느 날은 10초를 버티게 되고, 어느 날은 앞에 벽이 없어도 다리를 들어 올리는 데 주저함이 없어지고 하면, 그런대로 또 좋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물구나무서기 연습을 하는 모습이 찌질한지 어쩐지 와는 별개로… 성실한 건 찌질한게 아니다. 성실한 건 성실한 거다. (장기하 씨 노래를 듣다가 한 생각이다.)


커버 이미지: Helena Lopes 님의 사진, 출처: Pexels

*'찌질하다'의 표준어 표기는 '지질하다'이지만, 일상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표현의 뉘앙스를 살리고 싶어서 오자 그대로 표기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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