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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범 May 30. 2022

ABC LOVE

온몸으로 사랑하기

하나의 사랑이 끝났다. 

1년 반쯤 전에 그대를 향해 팔을 활짝 벌리기로 마음먹으며 이 사랑이 시작되었고

어제저녁 이제 더 이상 그가 있는 쪽을 바라보지 않기로 결심했기에 이 사랑은 결말을 맺었다.


처음 연애가 시작되었을 때 다짐한 것이 있었다. 

Active, Brave, Creative Love

능동적으로, 용감하게, 창조적으로 사랑하기


Active

내가 이 마음의 주인이기를 바랐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를 바랐다. 내 마음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고 싶었다. 사랑으로 인한 기쁨도 어려움도 내 것이라고. 처음 사랑의 희열이 행여 피가 철철 나는 고통으로 변하더라도 그마저 오롯이 경험하자고 스스로에게 말했었다.


Brave

눈치 보고 싶지 않았다. 당신의 마음을 궁금해하다가 내가 원하는 것을 모르거나 모른척하고 지나가고 싶지 않았다. 내 감정과 내 생각, 나의 욕구를 대면하는 데는, 그리고 그런 것들을 당신에게 표현하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걸 하고 싶었다.


Creative

익숙한 방식으로도, 처음인 방법들로도 다양하게 마음을 표현하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행하는 오늘의 사랑을 통해 내일의 사랑이 자라기를 바랐다. 우리로서 쌓은 시간과 내가 들인 마음만큼 깊고, 넓고, 큰 사랑이 되기를 바랐다.


1년 정도는 당신과 나 사이 마음을 예쁘게 주고받는 경험을 많이 했다. 존재의 깊이까지 충족감을 느꼈고 그렇게 오래오래 함께 하기를 바랐다. 그러고서 당신은 꽤나 먼 곳으로 떠나야 했고, 나는 멀리서도 주고받을 수 있는 마음이 있을 거라 확신했다. 조금 느리더라도, 어렵더라도, 때론 답답하더라도 여전히 주는 것도 받는 것도 나에게 기쁨을 더 많이 줄 거라고.


하지만 그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멀리로 떠났던 것 같다. 전혀 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의 애정이나 응원은 당신을 채우지 못하는 것 같았고, 내 마음속에는 답을 듣지 못한 질문들이 많아졌다. 지난 4월, 베를린에 있는 친구가 설에 보낸 엽서가 두 달 동안 지구 반 바퀴를 날아 도착했을 때, 그동안 당신이 보낸 편지는 한 통도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당신이 지구 반대편보다 더 먼 곳에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떠나버린 당신을 원망할 수도, 이대로 나의 마음을 끝낼 수도 없어서 기다렸다. 기다리고 있음을 그에게 알렸다. 힘들었다. 구차하게도 느껴졌다. 그럼에도 이 또한 나의 욕구에 기인한 마음이기에 끌어안기로 했다. 언젠가 내 마음의 바구니가 어려운 마음들로만 너무 무거워지게 되면, 그때는 다시 나의 욕구에 의해서 이 바구니를 비우기로 결정할 수 있을 거라고, 나 자신을 믿어주자고 다독였다. 돌고 돌아 같은 선택을 하더라도 그렇게 돌고 도는 것이 삶이고 사랑이라고.


당신을 기다리며 기대했던 이 드라마의 다음 시즌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당신을 향한 마음의 바구니를 비우기로 결정한다. 결국에. 드디어. 

한 번에 왈칵 쏟아버리지는 못하더라도 이제 매일 조금씩 흘려보내기로 한다. 


사실 처음 사랑을 시작하며 노트에 ABC Love라고 적었을 때는 ABC 각각의 단어가 지금 내가 알고 적을 수 있는 것만큼 구체적인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저 대략, 적극적이고 용감하고 창의적인 태도를 지향했지만 그다음 페이지에 적을 말들이 많지는 않았다. 방향을 잡았지만 아직 그쪽으로 한 발짝 제대로 나가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 사랑의 경험이 끝나고 난 후 내가 원했던 ABC가 무엇이었는지 더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 좋아하는 신형철 작가님의 책 제목이다. 나의 언어는 언제나 내 마음속 진실로부터 미끄러지고 이상적인 '정확성'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더 정확해지고자 했던 실험. 나에게도 하나의 실험 데이터가 쌓였고, 처음보다 더 정확하게 내가 귀하게 여기는 가치들을 알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거면 됐다. 널 사랑했다." 새벽녘 눈을 뜨자마자 이 노래가 생각났다. 두 번을 내리 들었다. 나의 사랑은 "볼 만한 멜로드라마"라기엔 많이 치열했고, 나는 널 사랑했기에 그거면 됐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널 사랑하면서, 나를 조금 더 정확하게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 내가 1년 반 전의 나보다 더 사랑스럽다. 그래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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