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의 의미를 가르쳐준 시간
한국에 있을 때 나는 얼빈 얄롬 박사님의 책을 무척 좋아했다.
대학원에서 들은 집단상담 수업 교재는 그의 저서였다.
그의 글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와, 그 이해에서 비롯된 따뜻한 사랑이 스며 있었다.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동네 서점에 들렀을 때,
그의 신간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바로 집어 들었다.
책을 읽다가 저자 소개란에서 박사님이 스탠퍼드 대학 명예교수이며,
캘리포니아 팔로알토에 거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 역시 같은 캘리포니아에 있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기쁘고 설레었다.
그날 이후, ‘언젠가 직접 뵐 수 있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이 생겼다.
그로부터 1년 후, 샌프란시스코로 여행을 가며
박사님의 홈페이지에 나와 있던 주소를 따라 자택 근처를 일부러 찾아가 보았다.
그리고 그다음 해,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다시 샌프란시스코에 여행 갈 기회가 생겨
여행 일정에 맞춰 직접 상담 약속을 잡아, 그분을 만나 뵙게 된 것이다.
이메일로 상담 문의를 보냈을 때,
비서가 답장하리라 생각했지만 직접 회신을 주셨다.
그 한 통의 이메일로부터, 정말 꿈같은 만남이 시작되었다.
박사님은 예상대로 따뜻하고 친절하셨다.
그리고 놀랍게도, 박사님은
자신의 저서 중 한국어로 번역된 책들을 거의 모두 준비해 두셨다.
게다가 사모님의 저서 번역본까지 함께 꺼내 주셨고,
모든 책마다 정성스럽게 손수 사인을 해주셨다.
그 책들은 지금도 내 책장 한가운데,
가장 소중한 자리에 놓여 있다.
한국 사람을 상담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하시며,
한국 문화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겸손한 말씀과 함께
매우 세심하게 질문을 이어가셨다.
사실 나는 그날 단순히 ‘체험’을 목적으로 상담을 신청했었다.
특별한 문제를 상담한다기보다, 직접 만나 뵙고 그분의 상담 방식을 체험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박사님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자마자
당시 내게 가장 중요한 주제를 정확히 짚어내셨다.
순간 매우 놀라고 약간 당황스러웠다.
결국 나는 그 문제를 꺼내어 이야기하게 되었다.
박사님과의 상담은 매우 따뜻한 온기가 흘렀으며
‘진정한 현존’이 무엇인지를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상담실은 자택 옆의 별채에 있었다.
상담하는 동안
당시 초등학생이던 딸은 박사님 댁 정원에서 놀고 있었다.
보슬비가 내리자 박사님은 딸이 거실에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몸이 편치 않으셨던 사모님께 조심스레 양해를 구하시는 모습에서
배려와 존중이 느껴졌다.
상담을 마친 후, 박사님이 직접 상담 주제를 정해 진행한 것이 마음에 걸리셨는지,
내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이게 맞았는지,
또 그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 괜찮았는지를 조심스레 물어보셨다.
나는 원래 그 문제를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지만,
생각해보면 그것이야말로 내게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주제였기에 괜찮다고 말씀드렸다.
자리를 마무리하며,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을지 여쭈었더니 기꺼이 응해주셨다.
마음에 드는 사진이 나오지 않아 여러 번 다시 찍게 되었는데,
무릎 수술을 앞두고 계셔 오래 서 계시는 게 힘드셨을 텐데도
끝까지 웃으며 응해주셨다.
몇 년이 지난 뒤, 문득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이 새삼 들어 이메일을 드렸더니,
역시 직접, 다정한 답장을 보내주셨다.
그날의 기억은 내게 하나의 이정표로 남았다.
그분의 온전한 주의, 무조건적 존중, 겸손함, 따뜻함, 현존(presence) —
그 모든 것이 살아 있는 수업이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게 된다.
“그날 느꼈던 그 현존을, 나 또한 내 상담 속에서 살아내고 싶다.”
아주 가끔씩 박사님께 이메일을 드리면,
언제나 직접, 짧지만 따뜻한 답장을 보내주신다.
그 몇 줄 속에서도 여전히
배려와 존중, 인간적 온기가 느껴진다.
몇 년 전 부인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얼마 전에는 재혼하셨다는 기사를 보았다.
90세가 넘은 나이에 다시 사랑을 시작한 그 소식에
정말 놀랐지만,
‘하루하루를 진정으로 살아내는 실존적 삶’ —
그분은 여전히 그것을 몸소 보여주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그 놀랍고 감사한 날을 내 인생의 선물로 기억하며
박사님처럼 존재로 치유하는 상담자,
그리고 삶을 글로 나누는 치료자가 되고 싶다.
“박사님, 오래오래 건강하시고,
당신의 삶이 우리 모두에게 빛이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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