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을 입혀 주세요
웬만하면 색깔 만들어 쓰지 마라
나는 시각이나 제품 디자이너가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의상 쪽은 더욱 아니다.
디자이너라 함은 뭔가 세련되고 딱 봐도 독특한 분위기를 풍겨야 하는데, 나는 그런 쪽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미술적 재능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형태감이고 다른 하나는 색채감이다. 물론 다 겸비한 자도 있겠지만, 우리 남매는 형태감이 발달했다.
내가 1년 반이라는 짧은 시간에 뎃생의 경지에 오른 것은 형태감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작은오빠가 자신의 경험을 오롯이 내게 전수했고, 나 역시 당연하다는 듯이 결과로 승화시켰다.
뎃생에 있어서는 슬럼프 하나 없이 4B신화를 이룩했다.
그런데, 문제는 색채감이었다.
작은오빠는 조소과라서 형태감의 극강으로 단점을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OO디자인학과를 준비하고 있어서 소위 '구성', 디자인 파트가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결정적 결함은 여기서 나타난다.
"MIRA, 넌 웬만하면 색깔 만들어 쓰지 마라. 있는 그대로 써."
음, 쉽게 말해서 남들은 24색을 타고났으면 난 12색 정도? 신은 공평하다.
색을 잘 다루지 못한다는 점은 아주 오랫동안 나를 위축되게 만들었다.
하지만, 흙은 뭔가 달랐다. 백자 아니면 청자, 혹은 분청. 나는 특히 백자에 톤을 맞추는 작업이 재미있었다. 색을 입히는 데 호기심이 있었고 끈질기게 연구정신을 발휘했다.
CHO, MIRA with Paperclay in 2004 내가 가진 색채감은 스페인의 정열적인 붉은 톤이 아니라, 북유럽의 무채색 톤이다.
전라도 강진에 갔을 때 깨달았다. 내가 보고 자란 땅은 거무죽죽에 가까운 갈색인데, 그곳은 온통 붉은 빛이 감돌았다. 내 고향은 옥수수와 감자가 나는 땅이지만, 그 땅에선 당연히 고려청자가 나와야 한다.
"누나는 이렇게 썩기 아까워."
십 년 전까지 동문들에게 들었던 소리다.
내 감자는 썩었을지 모르지만, 어느새 싹이 나서 또 다른 감자를 키우는 중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형광펜의 종류, 굵기와 톤 선택이 가능하다 Note로 그림을 그리면서, 연필로만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팔레트에서 가장 가까운 색을 고르고, 톤 조절을 해서 살짝 색을 입혔다.
그러다, 형광펜을 한 붓으로 칠하면 한 번에 면을 메울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형광펜으로 한붓 그리기를 할 때 숨을 쉬지 않는다. 그림도 체육인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서 예, 체능인 것이다.
왼쪽은 색연필, 오른쪽은 형광펜으로 색을 입혔다 오늘도 내 배우는 까치집을 하고 차에서 내린다. 중국은 역시 대륙이다. 세트장의 규모가 월드컵 경기장 몇십 배가 된다.
날마다 그곳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까치집으로 출근해서 댄디남으로 퇴근한다.
넌 그 안에서 무얼 하고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