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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RA Dec 12. 2023

파기장(破器匠)

선별 아줌마

대학을 졸업하고 교수님 작업장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시절이었다.


청화안료를 세필로 모란꽃을 그리고,

접시를 손바닥으로 세워 잡는다.

나는 마치 출발신호를 기다리는 달리기 선수처럼

잠깐 숨을 죽인다. 그리고 선을 긋는다.

그을 때는 형편없다 느끼지만

이내 접시를 바로 놓으면

근사한 테두리가 자리 잡혀 있다.


가끔 내가 가진 똘끼는 이런 부분이라는 생각을 한다.

다 필요 없고, 그 순간 나는 아주 행복하다.


작업장은 성형부, 화공부, 유약부, 소성부로 나뉘어 있다.

성형부는 작품을 만든다.

화공부는 초벌기물에 그림을 그린다.

유약부는 말 그대로 유약을 입힌다.

소성부는 가마에 굽는다.

저마다 자신의 위치에서 유기적으로 작업장이 돌아가는데, 그중 나의 눈길을 끄는 여사님 한 분이 계셨다.


"아줌마, 아줌마 딸이 선별이에요?"

"......"


작업장의 오너는 교수님이지만,

실세는 그 여사님으로 보였다.

교수님이 A라고 해도 여사님이 B라고 하면 B였다.

매의 눈으로 작품의 구석구석을 살피셨고,

작은 티끌이라도 하나 나올라치면

영락없이 B급으로 선별(選別)하셨다.


"선별 아줌마는 너무 깐깐해."

교수님마저도 불평을 하셨다.


"난 아줌마 딸이 선별이라서, 선별 아줌마인 줄 알았어요."

"......"


그때 작업장에서 나의 위치는 갓 태어난 새끼고양이였는데, 지금보다 더 밝고 명랑했으니 어찌 보면 철없이 순수했던 것 같다.


"아줌마, 이 접시 제가 그린 건데, 기념으로 하나 가질 수 있어요?"

"......"


 자기들은 모두 가마 속에서 24시간 이상 약 1300도의 열기를 견디는 '불의 심판'을 받았다. 자기의 성공률은 25퍼센트도 안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번조가 끝나 가마 속에서 자기를 꺼내 놓으면 파기장은 하나씩 검품하면서 실패작을 깨뜨렸다.

결국 모든 자기는 파기장의 심판을 받고 세상에 태어났다. 약간 일그러졌어도 파기장이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 미적 판단으로 망치를 면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유홍준  <한국미술사, 도자기 편>


이번에 발간된 유홍준 선생님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이다.

파기장(破器匠)이라.


나는 지금껏 살면서, 어떤 선별을 했을까?

마땅히 파기(破器)되어야 할 것에 미련을 두어

여전히 취(取)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작업장을 마지막으로 나오던 날,

선별아줌마는 아무도 모르게 나의 모란 접시를 신문지에 둘둘 말아 선물로 주셨다.


어떻게 붓질을 했는지 고스란히 느껴진다.

꽤 경쾌하게 붓질을 한 것 같은데,

지금 보니 조금 경직되어 보이기도 하다.

원본에는 아래쪽 모란잎이 2장이었는데,

나는 그게 싫어서 교수님 몰래 1장만 그렸다.

의외로 엉뚱한 면이 있었던 것 같다.


여전히 도자기는 아름답고

배워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있다.

먼저 간 누군가의 인생을 덜어 사는 것처럼

잘 선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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