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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효민 Feb 08. 2023

23-4. 하얼빈

Hugo Books _ 우고의 서재

23-4. 하얼빈


 하얼빈이라는 지명은 우리에게 낯설고도 낯익다. 세계 지도를 펼쳐 놓고 하얼빈을 손가락으로 짚어 보라고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엉뚱한 곳에다가 손가락을 가져다 대겠지만 왠지 모르게 우리는 하얼빈이라는 이름이 아프게 느껴진다.

 내게 있어 하얼빈은 어린 시절 위인전이나 역사책을 읽을 때, 고등학교 때 근현대사를 배울 때, 한국사 시험 준비를 할 때,  영화나 뮤지컬로 익숙한 것도 있지만 지금도 하얼빈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재미있게도 무한도전과 박명수다.


 과거 상황에 대한 상황극을 할 때면 꽤나 자주 하얼빈 역을 찾던 박명수의 모습이 선명히 떠오른다. 무한도전 애청자로써 박명수의 상황극이나 개그 소재에는 역사와 관련된 사건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 보면 의무 교육을 충실히 수료한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그다음으로 떠오르는 건, 친형이 하얼빈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들려준 이야기 중에서도 '하얼빈 맥주'와 '하얼빈 국제 빙설제'다. 요즘이야 하얼빈 맥주를 국내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지만 형이 묘사한 하얼빈 맥주의 맛 때문에라도 하얼빈은 가보고 싶은 도시가 되기도 했다.

 자! 다시 박명수로 조금 돌아와서, 그가 애타게 "하얼빈 역이 어디오?"라고 외치는 모습에는 '안중근'의 모습이 담겨 있다.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을 뽑으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안중근 의사를 선택할 것이다.


 소설 <하얼빈>은 안중근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안중근의 이야기만을 담고 있지 않다. 첫 번째로 일본이  조선을 넘어 청과 러시아로 팽창해가는 제국주의 시대에서 하얼빈이 가지고 있는 지정학적 중요성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일본은 조선의 인천, 청의 대련,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손에 넣으면서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환경을 갖췄고 하얼빈은 일본이 대륙으로 뻗어나가는 시발점이 되었다. 일본, 조선, 청, 러시아의 철길은 하얼빈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하얼빈의 지정학적 중요성


 두 번째로 이 책이 담고 있는 건 인물들의 심리적 요소다. 위인전과 역사책은 1인칭 시점으로 안중근의 이야기를 펼쳐나가거나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다루고 있지만, 소설 <하얼빈>에서는 안중근 외에도 황세제 '이은(영친왕)', '이토 히로부미', '우덕순', '빌렘', '뮈텔' 등 다양한 인물들의 감정을 때론 1인칭 시점으로 때론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풀어나간다. 물론 작가의 상상력에 기인한 각 인물들의 감정선이겠으나 이 부분을 통해 독자들은 혼란의 시대를 더욱 생생하게 받아들일 수 있고, 조금은 차가워진 심장으로 우리나라가 처했던 1900년대를 간접적으로 살아볼 수 있게 된다.  




(위) 영친왕과 이토 / (왼쪽 아래) 뮈텔 주교 / (가운데 아래) 빌렘 신부 / (오른쪽 아래) 안중근, 우덕순, 유동하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았던 '이토 히로부미'의 시선이 이 책에 녹아있는데,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좋았던 것 같다. 작가가 그를 옹호하는 것도 그를 욕하는 것도 아니라 단지, 그는 진정으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옳다고 믿고 있는 한 사람의 관료로 그리고 있는 지점이 오히려 시대의 서늘함을 그대로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번 서평에서 <하얼빈>의 줄거리나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만들어진 소설이기에 스포랄 것은 없지만, 소설의 내용을 너무 많이 알려주는 것은 독자들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빼앗아 가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지, 한 가지 마음이 아팠던 지점에 대해서만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안중근이 거사를 치르고 조사와 심문을 받는 과정 중에 그의 육신이 속한 '대한 제국'이라는 나라와 그의 영혼이 속한 '천주교'라는 종교는 그를 무참히 부정하고 매도했다. 순종을 위시한 왕실과 조정은 일왕의 분노가 두려워 안중근을 폭도 정도로 매도하였고, 뮈텔을 대표로 한 한국 천주 교단은 '도마'라는 세례명까지 받은 안중근을 천주교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부정했다. 영웅을 테러리스트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잔인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민족의 원수를 죽인 의사는 자신이 그토록 구원코자 했던 나라로부터 외면을 받았고 잃어버린 양을 구원하는 종교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슬펐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으면서도)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고, 1993년 천주고 서울 대교구장인 김수환 추기경이 안중근 추모 미사를 접전하면서 "일제 치하의 당시 한국 교회를 대표하던 어른들이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해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그릇된 판단을 내림으로써 여러 가지 과오를 범한 데 대해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연대적인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라며 안중근의 행위는 '정당방위'이고 '국권 회복을 위한 전쟁 수행으로서 타당하다고 보아야 한다'라고 밝혔다는 사실과 한국 교회가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제재하기도 했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라는 입장문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이름으로 발표했다는 점이다.

 아, 그리고 역사의 소용돌이 안에서 슬픈 이야기가 더 있다. 그의 차남인 '안준생'이 1939년 총독부 관리들과 박문사를 참배하고 이토의 위패에 분향하고 위령하며 "이토의 명복을 빈다"라고 말한 사실과 이토의 차남 '이토 분기치'에게 "사죄하러 왔다"라며 그를 만난 일이다. 또, 안중근의 장녀인 '안현생'은 아버지의 기일인 1941년 3월 26일에 박문사를 참배했다. 이날 안현생은 "아버지의 죄를 사죄한다"라고 말했다. 물론 일본의 '박문사 화해극'이라는 정치 홍보용 기획에 놀아났다는 사실은 알지만, 아버지의 의지를 이어가지 못한 자녀들의 모습에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오죽했으면 김구 선생이 장제스에게 안준생을 체포 구금해 줄 것을 그리고 그를 교수형에 처해달라고 부탁까지 했겠는가 말이다.

신문에 보도된 '박문사 화해극'


 소설 <하얼빈>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3월 29일에 관동도독부는 안중근 사건의 수사와 재판과 사형 집행에 이르는 과정에서 애쓴 관리들에게 직급에 따라서 상여금을 내렸다.

미조부치 검찰관 250엔

마나베 재판장 150엔

소노키 통역, 기시다 서기 80엔

구리하라 전옥, 나카무라 간수부장 80엔

요시다 경시, 사이토 경부 30엔

순사부장급 3명 20엔

순사 5명 10엔

 안중근의 하얼빈역 의거와 뤼순 감옥에서의 순국은  누군가에겐 직업상 지극히 정상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중에 있었던 일이고, 누군가에게는 나라를 위해 다른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순간을 살아내는 일이었다. 

 이러한 일들은 2023년을 살아가는 현재에도 똑같이 일어난다. 힘이 있는 강한 자들에게 힘이 없는 약한 자들의 생존을 위한 발버둥조차도 그저 그런 일상의 한순간으로 지나가곤 한다. 그렇다고 발버둥이 가치가 없거나 의미가 없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책은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하나의 움직임은 또 다른 몸짓을 야기하고 하나의 아우성은 또 다른 소리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약한 자들의 고된 하루의 부르짖음이 강한 자들의 하루가 평온하지 않도록 만들기를. 그로 인해 강한 자가 약한 자가 되고 약한 자가 강한 자가 되어 보는 역지사지의 마음이 생기기를 조용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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