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편의 양이 보내는 메시지
오랜만에 전시를 보기 위해 서울행 지하철에 몸을 맡겼다. 동인천으로 이사 오고 지하철로 나가는 서울 나들이에 무척이나 마음이 설레고 기분이 좋았다. 그전에 2년마다 돌아오는 자동차 정기점검을 위해 '한국교통안전공단 인천 자동차 검사소'에 다녀왔다.
16만 km를 훌쩍 넘긴 2005년식 내 sm5는 오래된 연식 대비 큰 말썽을 일으킨 적 없이 아직도 나의 소중한 두 발이 되어주고 있다. 아니, 네 발이라고 표현해야 더 정확하려나. 아무튼 이번에도 큰 문제는 없으나 엔진오일 쪽에 누유가 조금 있어서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아주는 게 좋다고 한다. 이제는 정말 sm5를 보내줘야 할 것 같은데 모아둔 돈을 차 바꾸는데 쓰려니 왜 이렇게 아까운지 모르겠다... sm5를 데려왔을 때처럼 정말 필요한 시기가 오기 전까지는 새 차를 사지 않을 것 같다.
자동차 검사가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일정에 여유가 조금 생겼다. 원래는 대충 식사를 때우려고 했는데 느긋하게 앉아 점심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전시가 명동성당 인근에서 열리고 있어서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가, 어린 시절 명동에 와서 돈가스를 먹었던 기억이 떠올라 돈가스를 먹기로 했다.
명동은 십여 년 만에 방문했는데 그때와 지금이 크게 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지난 3년간 뉴스를 통해 접하던 을씨년스럽던 명동과는 달리 활기를 되찾고 있는 모습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 시국이 정말 많이 안정화되었다는 게 명동을 가득 채우고 있는 외국인들로 인해 느껴졌다.
점심을 먹기 위해 방문한 곳은 '명동 돈가스'로 일본의 돈가스 명점인 동키에서 배워와 1983년부터 현재까지 영업을 하고 있는 식당이었다. 나는 히레가스와 기린 생맥주를 주문했다. 사실 술을 마실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눈앞에 있는 '생맥주'라는 홍보물 때문에 갑자기 맥주가 마시고 싶어져서 무엇에 홀린 듯 주문을 했다.
보통 서울에는 차를 가지고 나와서 술을 마실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오랜만에 서울에서 낮맥을 하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게다가 안심 돈가스도 입에 맞고 더할 나위 없었다. 기분 좋은 식사를 끝내고 원래 목적이었던 전시를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명동성당이 바로 바라다 보이는 '온 드림 소사이어티'에 도착했다. 내가 볼 전시인 'ONSO ARTIST OPEN CALL 2023' 신용진 작가 개인전 <563 오-륙-삼>이 이곳에서 개최되고 있었다.
신용진 작가는 연수문화재단의 예술지원사업과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인연이 되었고, 꾸준히 그의 작업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는 작가다. 이번에는 인천 지역에서의 전시가 아니라 현대차 정몽구재단의 초청으로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전시 제목이 <563 오-륙-삼>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1년을 구성하는 365일을 거꾸로 배열한 것이다. 신용진 작가는 경계에 있는 것들에게서 예술적 영감을 얻는다. 남성과 여성, 양과 음과 같은 것들 말이다.
공간에 가장 크게 걸려 있는 황마에는 손 모양이 빨갛게 물들어 있다. <저편의 양>이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1년간 서울에서 미화원으로 근무하면서 마주하게 된 음의 시간을 기록하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밤과 새벽은 음의 시간이지만, 반대로 미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시간이 양의 시간이 된다.
이러한 지점에서 양은 저편에서의 음이 될 수도 있고, 음 또한 저편에서의 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양과 음은 각자로만 존재할 수는 없음은 물론, 서로가 있기에 더욱 돋보일 수 있다는 것으로 점철된다.
<저편의 양>은 작가가 1년간 미화 일을 하며 수집한 '코팅장갑'에 열을 가해 작업한 것으로 스릴러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누군가가 자기 존재를 지켜내기 위해 혹은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발버둥 친 것 같은 모습이다.
그 옆에는 미화원의 근로일인 월, 화, 수, 목, 금, 일을 상징하는 5개의 작품이 걸려있다.
월요일은 달을 상징하는 조명이, 화요일은 불로 유화지를 그을린 형체가, 수요일은 유화지를 내리는 비에 그대로 노출시킨 모습이, 목요일은 유화지에 바크를 붙인 모습으로, 금요일은 실제 금을 유화지에 붙여서 제작했다. 일요일은 통창을 통해 햇빛이 공간 전체에 쏟아져 들어오는 것으로 표현했다.
신용진 작가는 이 작업을 하면서 만들어진 결과물을 다시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도 가졌는데, 우리의 인생 중 지나간 하루를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작품들도 만들어진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라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이 외에도 재활용 쓰레기의 사진을 데칼코마니 형태로 만들어, 쓰레기라는 미적으로 불완전한 소재에 균형과 안정을 부여하여 하나의 미학적 작품으로 만들어낸 시리즈도 인상 깊었다. 자세히 보면 쓰레기에 적혀 있는 글씨들을 읽어볼 수 있으니 들여다보는 재미도 있었다.
또한, 추운 날씨 가운데 일을 하다 보면 안전모에 습기가 차다 결국 얼어붙어 고드름의 형태가 된 것을 형상화한 <습기옥>도 노동의 숭고함과 현장의 고됨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으로 인상 깊었다. '습기옥'은 애니메이션인 '드래곤볼'에서 주인공 손오공이 지구의 모든 생명체에게서 기를 받아 그것을 에너지화해 적을 무찌르는데 쓴 기술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책장에는 24절기를 신용진 작가만의 독특한 기호학으로 구성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현재는 입춘부터 곡우까지 봄의 절기를 표현한 신용진 작가만의 독특한 기호학과 계절을 색감으로 표현한 것이 아주 흥미로웠다. 다만 공간과 맞지 않는다고 거절 혹은 반려 당해버린 마네킹 작업을 볼 수 없었다는 게 무척이나 아쉬웠다.
단순히 목돈을 모으기 위해 시작한 환경미화원으로서의 1년이었는데, 그 삶 가운데 예술적 영감을 얻고 작업을 위한 오브제들을 수집한 작가의 세계가 참 멋지게 느껴졌다. 누군가에게는 그 시간이 그저 새로운 걸 경험하고 끝나는 낯선 시간들이 될 수도, 혹은 사회가 일컫는 3D 업종의 하나로 괴롭고 하기 싫다는 생각으로 가득한 시간이 될 수도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는 사실에서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끔 만들었다.
우리 사회는 이분법적으로 대상을 분리하면서 나와 다른 것들은 틀린 것으로 타자화하려는 경향이 나날이 극심해지고 있다. 하지만 신용진 작가가 바라보는 시선처럼 결국 인간은 그 경계를 넘고 넘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양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저편의 음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https://arthub.co.kr/sub01/board05_view.htm?No=47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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