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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기작 Sep 02. 2020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뉴비가 되는 건 싫어

그럼에도 가야 하는 자발적 초심자의 길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할 땐 온몸에 찌릿찌릿한 느낌이 든다.

손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이 감각은 물리치료에서 받는 전자파 치료보다 살짝 더한 강도로 유지되는데 주로 손끝에서 시작돼서 발끝까지 찌릿하게 온 몸을 연결한다. 잊고 살던 내 몸의 수많은 마디의 존재감을 느끼게 되고 빈 공간이 헛도는 느낌이라 괜히 스트레칭을 해보기도 하지만 한 번 시작된 짜릿함은 이 행위가 익숙해지기 전까진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최근 이 감각을 가장 많이 느끼는 때는 운전대를 잡는 순간이다.


운전 초보인 나는 요즘 도시의 시한폭탄이 되지 않고 도로 위를 달리는 수많은 차 중 하나가 되는 방법에 골몰하고 있다. 보통 대학입시 후인 20살 겨울방학, 늦어도 본격적으로 사회에 나서기 전인 20대 중반까지는 운전면허를 따지만 나는 30대가 된 후에야 면허를 땄고 이제야 이 새로운 행위에 적응하는 중이다.


남들이 다 면허 딸 때 뭐했냐고 묻는다면 20대 초반에는 운전에 관심이 없었고 방송작가로 일을 시작한 후에는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과 체력, 그나마도 별로 없는 열정, 나만 없는 고양이 손 등을 방송일에 몽땅 갈아 넣었으므로 운전이고 뭐고 작은 분야에 눈길을 돌릴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아무튼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고, 어떠한 일에 쌩초보가 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다.

백세시대에 30대는 아직 어린 나이지만 또래에 비해 일찍 사회에 진입해 한 분야에서 10년간 일한 우물 안 개구리가 아주 오랜만에 새로운 분야의 뉴비, 비기너가 된 기분을 이야기하자면



아주 설레고, 조금 두렵고, 이따금 기분이 더럽다.



도저히 통제가 안 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상황을 너무 오랜만에 겪다 보니 난감할 때가 참 많다. 초보만 느낄 수 있는 설렘과 신체에서 영혼이 0.5cm 정도 붕 뜬 것 같은 짜릿한 느낌은 나쁘지 않지만 그와 동시에 이 순간이 빨리 지나서 모든 게 권태롭고 익숙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든다.

조수석에 앉은 아빠가 성질을 버럭 낼 땐 더더욱.


경력자가 보기엔 당연한 일도 초보자는 모를 때가 많고 초보자가 머릿속에 차근히 순서를 생각하며 움직이는 동안 잔소리하지 않고 신뢰감을 갖고 기다리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무작정 초보가 못 미덥다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하는 생각, 행동 하나하나가 예측되고 앞으로 벌어질 일도 뻔히 그려지기 때문에 개입하지 않고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그렇게 하는 아니고'
'다 잘되라고 하는 소리지’



한 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찾는 아아의 나라에서 라떼 보스가 또 하나 탄생하는 순간이다.

10년 차가 되면서 수많은 후배들을 지켜보다 보면 나 역시 불쑥 이렇게 그들의 일에 끼어들게 된다. 그러지 말아야 하지 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있는 건데, 의도야 어째튼 나 역시 라떼인간이 되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으려고 노력하지만, 그럼에도 기다릴 줄 모르는 경력자의 버럭은 초보자에게 반발심만 들게 한다. 인생은 변수의 연속이라 똑같아 보이는 일도 사실 똑같은 게 단 하나도 없는데 깜빡이 없이 무작정 끼어들다 보면 '뭐야 당신도 안 맞을 때가 있잖아. 왜 나한테만 난리야?'라는 반발심이 이어지는 게 당연하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몇 주간 이어진 아빠와의 운전 연수는 초보자와 경력자 양측의 마음을 한 번 더 생각하게 하는 시기가 되었다. 물론 현재 나는 초심자의 입장에 있다 보니 초보의 마음에 더 감정이입을 하게 될 수밖에 없는데, 내 욱하는 성질의 원천인 DNA 주인이 옆자리에서 열과 성을 다해 소리를 치고 잔소리를 시전 할 때면 나는 당신의 딸이 부친의 유전자를 잘 물려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함께 목소리를 높인다.


때론 길 한가운데 차를 세우고 내려 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그만큼 초보가 된다는 것은 치욕과 고난의 연속이고, 나이를 먹을수록 반발심은 더 강해지는 거 같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포기하면 영원히 비기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 또한 극히 잘 알고 있기에 참고 또 참는다. 나름 사회인으로 10년간 일해본 결과 지금 이 시기를 참고 버티는 쪽이 앞으로 인생을 봤을 때 조금이라도 빨리 초보자에서 벗어날 수 있고 고통도 빨리 줄일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족은 화라도 낼 수 있지 사회에서 일할 땐 아무리 억울하고 속상해도 말 한마디 못하고 무조건 내 잘못이 되는 일 투성이니 이 정도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그리고 나름 성찰의 시간이 되긴 하는지 문득 예전의 일이 떠올랐다.

누구나 겪는 시작, 특히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비기너가 되었던 시절 이야기다.






원래 내 꿈은 라디오 작가였고 얼결에 방송계에 입문한 후 한참은 얼떨떨한 상태에서 떠밀리며 열심히 일해왔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방송에도 나름 [국 룰]이라는 게 존재하는데, 내가 막내작가로 처음 일했을 때도 언니들이 이야기하던 몇 가지 룰이 있었다.


당시 내가 했던 프로그램은 교양이었고 함께 일했던 언니들도 대부분 교양만 했던 분들이라 일명 [훌륭한 구성작가로 거듭나기 위한 룰]이 존재했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막내작가로 아침 or 저녁 생방송 경력 6개월 이상
서브작가로 입봉 후 생방송 경력 6개월 이상
시사/사건 코너로 시작해서 맛집 코너를 거쳐 휴먼다큐에 정착
구성작가의 끝은 다큐멘터리


사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나름 일리 있는 조건들이다.

우선 생방송 프로그램의 경우 가장 빠르게 방송 시스템이 돌아가는 것을 경험하며 많은 일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필수다. 막내일 때와 내 코너가 생기는 서브작가의 입장과 업무 루틴은 매우 다르기 때문에 두 가지 모두 경험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점점 구성력을 키울 수 있는 방향으로 업그레이드해서 구성력을 보여줄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하게 되는 것.


애초에 나는 다큐멘터리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관심이 있지도 않았지만, 일단 눈에 보이는 일을 하며 경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했고 '언니들이 이렇게 하라니까 맞는 거겠지'란 안일한 생각으로 언니들의 이야기에 따라 프로그램을 옮기며 일했다. 그 결과 생방송 경력만 약 2년, 내 코너를 맡고 스튜디오 원고를 쓰며 구성력을 키우는 이력을 철저히 따라갔다. 방송일이 하고 싶었고 일이 너무 힘들어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이대로 따라가다 보면 자연히 내가 가야 할 길을 따라가겠지' 혹은 '운명처럼 어떤 길이 나한테 열리겠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6년 차 작가가 되어 있었다.

그때 내 나이는 20대 후반. 이제 어느 정도 방송 시스템이 돌아가는 것들을 알게 됐고 내 코너를 맡으면서 후배들 일을 봐줄 수 있는 정도도 되었다. 아직 선배들은 어렵지만 어느 정도 내 의견을 내고 책임도 질 수 있게 되었다.


일하면서 알뜰살뜰 모은 돈으로 꿈에 그리던 유럽여행을 떠나 일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두 달이 넘는 긴 휴식 시간을 가졌다. 돈 쓰는 게 제일 재밌다는 걸 느끼며 베짱이처럼 놀다 보니 잔고는 금세 바닥을 드러냈고 '이제 슬슬 일을 하긴 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던 중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이다음엔 무슨 프로를 하지?



프리랜서로 일하다 보면 당연히 다음에 하게 될 일에 대해 고민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민의 차원이 달랐다.

지난 몇 년간 일반적인 시사, 교양 프로그램에서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했다. 이제 나이도 연차도 어느 정도 차서 내 필모를 고민하고 원하는 방향을 선택해서 이력서를 채워가야 할 것 같은데, 그간 그런 고민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익히 알고 있는 익숙한 포맷의 프로그램에 가서 한 분야의 전문이 될 것인지

새로운 포맷, 분야를 향해 계속 나아갈지

아니하다 못해 언니들이 말하던 구성작가의 끝, 다큐멘터리 구성이 하고 싶은 건지 내 성향이 맞긴 한 건지



그냥 돈만 좇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내가 확실히 목표로 하는 무언가가 하나쯤은 있어야 할 거 같은데 지금 내 이력을 찬찬히 읽어봤을 때는 누가 봐도 구성작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간 만난 비슷한 연차의 작가 친구들은 다큐멘터리를 꿈꾸는 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내 성향과 관심사를 돌이켜 봤을 때 내가 탄탄한 구성력과 문장력, 다큐멘터리를 꿈꾸느냐 하면... 정답은 아니었다.


만으로 5년 일을 해놓고 이제야 내 성향과 업무 방향에 대해 고민하다니. 늦어도 너무 늦은 거 아닌가?

교양, 예능작가의 경계는 매우 분명하다. 방송작가의 업무는 같지만 그 안에 디테일은 매우 달랐고 반대편 분야로 넘어가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심지어 나처럼 어느 정도 한 분야에서 일해서 경력을 쌓았고 분기점을 넘긴 작가라면 더더욱.



'아 생각 없이 이력서부터 들이민 게 지금까지 여파로 오는구나'



후회해봤자 방법은 없다. 나에게 어떤 분야가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문장가가 아니라는 것쯤은 스스로 잘 깨닫고 있었다. 그때부터 돛을 펼치고 무리한 항로 변경을 시작했다.

처음 막내작가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처럼 무작정 눈에 보이는 모든 예능 프로그램에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얼마나 넣었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내 이력서는 무시당하기 일수였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력서를 보냈다.

내가 이력서를 보냈던 프로그램에서 재공고가 올라와도 자존심 상해하지 않고 다시 이력서를 넣었다.

물론 이미 처음 보냈을 때부터 걸러졌단 뜻이기 때문에 재공고를 올린 프로그램에서 연락 오는 일은 없었다.


그 여름에 면접만 7군데를 봤다.

스스로 부족하단 걸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면접이 잡히면 관련 영상을 다 찾아보고 MC, 게스트 라인업부터 포맷, 게임 등등 생각할 수 있는 건 다 쥐어 짜내서 갔다. 그리고 면접을 보면 항상 마지막쯤 단골 대사가 돌아왔다.



'다 마음에 드는데 예능 경력이 없는 게 걸리네'



무슨 마법의 단어처럼 그전까진 신나게 떠들다가도 그 멘트가 나오면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고 울컥 화가 났고 면접에 불합격했다. 그럼에도 다시 이력서를 넣었다. 사실 오기도 있었다. ' 너희들이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나도 한 번 해보고 별로면 다시 내가 가던 방향으로 갈 거야' 뭐 이런, 실체 없는 적과 매일 싸웠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교양과 예능이 결합된 프로그램에 겨우 합류할 수 있었다.

매일 아침 공고를 보는 게 일이었던 지라 방금 막 올라온 공고가 눈에 띄었고, 습관적으로 이력서를 넣었고. 이력서를 보내자마자 전화가 왔다. 메인 언니는 매우 쿨한 분이었고 프로그램에 대해 빠르게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이렇게 덧붙였다.



"내일부터 일할 수 있어요?"

"당연하죠."

"화끈하네. 내일 봐요."



예능 경력은커녕 프로그램에 다루는 분야의 포맷을 해본 적도 없는 나를 왜 뽑은 건지 나중에 언니한테 물어봤고, '공고 올리자마자 메일 보낸 거 보고 일 할 준비가 된 친구구나 했어. 그전에 뭐했는지가 그렇게 중요해?'라고 되려 되물어봤다. 맞는 말이다. 내가 지금도 사랑하는 언니다.


내가 들어간 프로그램은 정보성이 강한 스튜디오 토크&요리 프로그램이었고 소규모 작가진으로 이뤄져 있었다. 매우 쿨한 언니의 주도 아래 둥글둥글한 성격의 사람들이 모여 매우 즐겁게 일했다.

(당시에 일했던 친구들은 지금도 종종 만나는데 그중 가장 독보적으로 모난 돌이 나다)



이 프로그램의 이력 덕분에 다음 프로그램은 좀 더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정확히 이야기할 순 없지만 서바이벌 예능이었고 올 야외, 매회 탈락자가 발생하고 최후의 우승자를 가리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철저한 정보의 철통보안이 생명인 매우 예민한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고난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당시 함께 일했던 작가진들도 나쁘지 않았다. 같은 위치였던 막내&서브작가들끼리는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다. 문제는 팀을 이끄는 메인작가 선배의 시선이었다.


워낙 꼼꼼한 성격이었고 프로그램 특성상 철야도 많고 정보의 철저한 제한, 적절한 시기의 공개 등 신경 쓸 게 많은 프로그램이다 보니 프로그램이 진행될수록 그분의 화는 더욱 심화됐다. 모든 작가들이 하나씩은 책잡히는 부분이 있었는데 내 경우는 '예능 경력 없는 덜렁이'란 인식이 발목을 잡았다.


철저한 큐시트에 따라 장소 이동을 하며 펼쳐지는 야외 예능 포맷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출연자 포함 100명이 넘는 인원이 일정에 따라 전국 곳곳을 다니는 프로그램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야외 형식의 프로그램에서는 나는 철저한 초심자였고 하루에 촬영이 끝나지 않고 며칠씩 이어지기 때문에 그 며칠간의 일정을 모두 체크하고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이 어려웠다.


여러 번 체크하고 수정해도 선배에게 자료를 넘기자마자 '이건 준비됐니? 이 게임 어떻게 진행할 거야?'라는 말 하나에 머릿속이 암전 되는 느낌이었고 쉽게 쓰던 보도자료, 큐시트 작성도 버거워서 빈 화면 앞에 멍하니 앉아있는 시간이 늘었다.


선배는 회의 시간마다 막내보다 내가 예능을 모른다며 잔소리를 했다.

원래 성격대로라면 예능하고 교양이 뭐가 다른지, 이건 분야의 문제가 아니라 내 개인의 역량의 문제인데 왜 그렇게 프레임을 씌우고 보시냐, 나는 플랜 B까지 생각했는데 어떤 부분이 빠졌고 무엇을 구체적으로 보강하면 좋을지 물어봤겠지만 거의 집에도 못 가고 같은 공간에 살다시피 하던 선배가 하루 종일 이렇게 말했으니 나도 모르게 '그래 난 예능을 모르지. 원래 나 하던 것도 못하면서 왜 무작정 뛰어들었을까'하고 위축됐었다.


솔직히 개인적인 경험으로 말하자면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완전히 다른 프로그램을 쓰거나 시스템 언어를 쓰는 것도 아닌데. 그런 프레임을 씌우는 라떼 보스들 때문에 될 일도 안 되는 거 아니냐고 하고 싶지만 어디서 뭐하고 사시는지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으니 넘어가야겠다.


막 앞자리가 3으로 바뀐 때였고 나름 방송계에서 빡세게 굴러봤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찾아온 아주 새로운 관문이었다. 이때만큼 스스로가 초라하고 위축되고 작아 보이던 때가 없었다. 원래도 눈물이 많은 편인데 선배가 툭하면 우냐고 소리를 질러대니 눈물은 꾹 참고 질문을 못하겠으니 더 철저하게 일하려고 고민하고 고민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가랑이 찢어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이번에 찢어지면 오랫동안 쉬며 봉합 과정을 거치자.'



이 마음으로 사무실에서 살았다. 우울하고 위축된 상태여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몸으로 때우는(?) 쪽이었던지라 누구보다 일찍 사무실에 가고 누구보다 늦게 집에 갔다. 서바이벌 프로그램 특성상 워낙 바쁘고 주어진 스케줄을 소화해도 집에 못 가는 날이 많은 일정이라 프로그램 중간부터는 다른 서브작가들도 사무실에 반거주하며 다 같이 서로를 위로하며 그 시간을 버텼다. 이때 5일간 집에 안 들어가는 최장기 외박 기록을 세웠고 머리 끝까지 화난 엄마가 얼마나 대단한 걸 한다고 사람을 이렇게 몰아붙이냐며 전화로 화낼 때도, 내가 부족해서 허덕이고 못 따라가고 있는 거고 그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남들 집에 가는 시간에 채우는 중이니 아무 말 말라고 되려 썽을 냈다. 아주 불효녀다.


그렇게 영원과도 같던 4개월이 지났다.

내가 얻은 것은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 이력과 살, 피로

내가 잃은 것은 건강과 멘탈

잃어버린 것들은 되찾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실 아직 조각모음 중이다.






그 이후에는 예능, 교양을 번갈아 가며 일했다. 딱히 어떤 분류인지를 본다기 보단 내 성향에 더 맞는 쪽, 내가 흥미 있는 쪽을 선택해서 일했는데 방향을 바꿔 다시 초보가 된 시절에 경험해본 업무 데이터를 통해 내 성향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게 도움이 되었다.


양쪽 모두 병행해본 결과 내 성향은 철저한 자료조사와 문장력으로 구성을 하는 방향보단 촬영 현장을 뛰어다니면서 생기는 변수들을 어떻게 방송용 재미로 승화할 것인지 고민하는 쪽이 좀 더 잘 맞았다.

반대쪽도 못할 것은 없지만, 먼 미래에 일하는 내 모습을 떠올려 봐도 현장에서 일하는 시간이 더 많았으면 하는 게 현재 내가 꿈꾸는 미래다.


작년에 꽤 유명한 프로그램 면접 기회가 있었다. 예전의 내 경력이었다면 면접 기회도 없었을 프로그램이었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면접을 보는 데까진 성공했지만 그 프로그램 입성에는 실패했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방향을 틀어가며 항해하다 보니 내가 이런 땅도 밟아보는구나 정도의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 면접에서도 과거에 들었던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야외 예능 경력이 적은 게 아쉽네 아무래도 연차가 있다 보니 우린 경력자를 원하는데'



예전이라면 위축되었을 말이지만 여기저기 초보자로 비비적거리고 다니며 나이와 함께 뻔뻔함도 상승한 나는 "선배님 원래 밖에서 이것저것 주워 먹고 다닌 애들이 더 건강하고 적응도 잘해요"라고 이야기했다.

그분들은 그다지 재미없는 농담으로 여긴 듯 하지만 나는 지금도 꽤 만족하는 대답이다.


원하는 걸 얻으려면 끊임없이 내가 뭘 원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항로를 계속 봐야 하고 길을 잘못 들었다 싶으면 과감하게 틀어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여기서 더 업그레이드돼서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고 지금의 경험을 기반으로 앞으로 전진하는 삶을 살고 싶은데 지금 내 레벨대에선 너무 무리인 이야기니 패스.



아프니까 청춘이란 말은 개인적으로 안 좋아한다. 아픈데 왜 그게 청춘이야. 초보가 되는 건 매우 구질구질하고 힘들고 아프고, 아프지 않을 수 있으면 최대한 안 아픈 게 좋다. 하지만 인생을 살다 보면 생각보다 지금 가진 걸 두고 자발적으로 뉴비가 되어야 하는 일이 많은 것 같다. 인생은 장애물 천지니까. 크기도 알 수 없다. 아주 큰 일부터 자잘한 일까지 수없는 암초의 연속이다.


그럴 때마다 손이 짜릿하고 설렘보단 아프고 짜증 나는 일이 더 많겠지만

이건 타고난 태생이니 어쩔 수 없는 거고 무수히 반복하다 보면 역치가 조금은 낮아지지 않을까?

똑같은 이야기에   능글맞게 대답할  있게  것처럼


어휴 진짜 어렵다. 아득하다 아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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