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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기작 Apr 09. 2020

마음이 불안해서 비즈 반지를 만듭니다

끈기 없는 프리랜서 방송작가가 혼자 노는 법


일주일 전, 마지막 녹화를 했다.

지난해 12월부터 4개월간 이어진 프로그램의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물론 스튜디오 녹화만 끝난 것일 뿐, 아직 방송이 남아있기 때문에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여전히 회의와 후반 작업 등 할 일이 남아있다. 하지만 어쩐지 허전한 느낌이 든다. 마지막 촬영을 하고 나며 항상 겪는 일이다. 그렇게 원하던 자유가 왔는데, 나는 왜 불안할까.


보통 프로그램이 기획되기 시작하면 방송작가들은 초반에 바쁜 편이다. 프로그램 기획부터 아이템 서치, 출연자 섭외 및 미팅 등 작가들은 초반에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정립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디들은 프로그램의 가닥이 잡히고 촬영과 후반 작업이 진행되는 후반에 더 바쁘다. 촬영 후에도 편집, 종편이라는 숙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참 일이 바쁠 때는 A회차 방송 자막을 쓰며, B회차 녹화를 준비하고, C회차에 나갈 아이템을 서치하고 출연자 리스트업을 한다. 시간을 나노 단위로 쪼개며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 수 있는 인간이구나 감탄이 나올 정도로 계획적으로 살게 된다.


마지막 촬영이 끝났다는 것은 이제 나에겐 A회차만 남았다는 뜻이 된다. B회차, C회차를 준비하며 스케줄표를 재정리하고 골머리 앓을 필요가 없단 뜻이다. 이제 남은 것은 편집본을 보며 회의하고 자막을 쓰고 보도자료를 쓰는 정도.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참 바쁘게 달리던 때를 생각하면 매우 여유로운 일정이다.


그리고 나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은 느낌. 내가 이렇게 편하게 먹고 자고 해도 되나? 하지만 다시 일하라고 하면 못 할 거 같은데... 그런데 심심하네. 이런 복잡한 감정들이 한참 마음속을 맴돈다.


프로그램을 하는 동안 그렇게 원했던 자유를 얻었지만, 정작 자유가 주는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는다. 보통 이 직전에 한 방송이 얼마나 빡셌는지에 따라 기간이 달라지는데, 주말 평일도 없이 정신적으로 너무 시달렸을 때는 한 달. 여유가 있었던 경우에는 일주일이며 끝이 난다.


최근에 했던 프로그램은 여러 잡음은 있었어도 팀원들이 좋고, 일정이 바쁘지 않아서인지 프로그램이 끝남과 동시에 심심함을 겪고 있다.


심심하고 무료하고, 특히 요즘처럼 사회적 거리를 두고 있는 시점이면 더욱 마음이 답답해진다. 원래 집순이 성향이라 쫓아내도 집 밖에 안 나가는 성격이지만, 프로그램이 끝나는 시점이 오면 마음이 심란해지고 어디든 나가고 싶어 진다. 하지만 나갈 수 없으니 창밖만 쳐다볼 뿐이다.


이럴 땐 뭔가 해야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비즈 반지를 만들기로 했다.






손재주가 있는 편은 아니다.

오히려 없는 쪽에 속한다. 집중력과 끈기가 있는 편도 아니고, 뭐든 조금 흥미를 가지다가도 몇 번 해보고 금방 흥미를 잃는 편이다. 그래서 매번 프로그램이 끝나면 갖고 노는 아이템도 달라졌다.


한땐 에어팟 키링 만들기에 꽂혔었다. 기성품을 사면 만원이 안 되는 돈으로 원하는 제품을 살 수 있지만, 나는 재료값만 5만 원어치를 들여 신나게 키링을 만들며 놀았다.


지금 남은 아이템들이 서랍 깊숙이 박혀있을 것이다.

그 후에는 슬라임 만들기, 요리 등을 했고 게임 몇 개에 빠져 한참 렙업 했다 손을 놨다.


이 모든 아이템들의 공통점은 끝을 못 봤다는 거다.

끝을 보기 전에 질리는 성격이라 그렇다.



제대로 된 첫 작품. 사이즈 미스로 엄마에게 넘어갔다.



 비즈 반지를 만들기 시작한 지, 4일째. 아마 다음 주쯤 되면 나는 또 흥미를 잃고 다른 놀거리를 찾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 비즈 반지 만들기에 흥미를 느끼고 있고, 시간이 잘 가서 나름 재밌는 놀이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비즈 반지는 여러 가지 디자인이 있는데, 2mm 작은 비즈에 낚싯줄 혹은 우레탄 줄을 끼고 디자인을 만든다. 비즈를 일렬로 꽂고 색깔과 스톤만 배치해 만들기도 하고, 낚싯줄을 여러 번 꼬아 꽃 모양을 만들기도 한다.

내가 즐겨 만드는 디자인은 꽃 모양 반지다.


여기서 내가 간과한 부분이 있다. 꽃 모양을 만들려면 최소 2.2mm 이상 3mm 정도의 큰 비즈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사 온 비즈는 2mm. 애초에 꽃 모양 디자인이 어려운 사이즈다.


제대로 된 정보를 알아보고 갔으면 좋았겠지만 정보를 보고도 흘려보는 스타일인 나는, 지난 월요일 친한 언니와 동대문에 갔을 때 충동적으로 비즈를 샀다. 다양한 사이즈를, 여러 가게를 둘러보고 사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귀찮으니 동대문 부자재 상가에 올라가서 눈 앞에 보이는 가게에서 눈 앞에 보이는 비즈를 샀다.


방송작가를 시작할 때 마냥, 제대로 정보를 알아볼 생각도 안 하고 생각나서 꽂히면 바로 실행한 것이다.

그 결과로 꽃 디자인을 만들려면 한 구멍에 낚싯줄이 세 번 들어가야 하는 구간이 있는데, 그 부분에 정체를 겪고 있다.



뭐든 처음 시작할 때가 제일 재밌다. 2mm짜리 비즈를 눈 아프게 고르고 색 조합할 때 제일 신난다



비즈를 사 온 날 저녁부터 유튜브와 인터넷 도안을 보며 따라 하기를 시도했다. 나름 따라 한다고 했지만 진도는 전혀 안 나갔고, 마구잡이로 밀어 넣다가 거의 다 만든 비즈 반지를 허무하게 터뜨리기를 몇 번 반복했다.

그리고 망친 비즈 반지는 살짝 다듬어 엄마 아빠 동생 손가락에 끼워주며 반강제(!)로 선물했다.


그렇게 손끝이 아픈 걸 참아가며 몇 번 결과물을 낸 후에야

'아 사이즈를 잘못 산 거구나. 애초에 안 되는 걸 우기고 있었네.' 하고 깨달았다.



제대로 알아보고 살걸... 어쩌지? 그냥 하지 말까?



방송작가를 시작할 때 '제대로 알아보고 시작할걸' 하던 후회랑 일맥상통한다.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가 보다.


친구들한테 선물해주겠다고 신나게 떠들어 놓고는, 내가 만든 무덤 앞에 앉아 한참을 고민했다. 이대로 두자니 돈 아깝고, 넘치는 시간은 주체 못 해서 힘들고, 내가 아무리 회유해도 이미 날씬한 낚싯줄이 제 살을 깎아주거나 좁은 비즈 구멍이 커지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테니 무엇이든 답을 찾아야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회의는 금요일이고 그날만 기다리고 있기엔 넷플릭스도, 메이플스토리도 이제 지겨웠다. 난 내가 꽂힌 이 아이템을 당장 어떻게든 성사시키고 싶었다.



'그럼 아래로 줄을 꼬면되지 뭐. 모양만 잡으면 되는 거 아냐.'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비즈 아래 공간에 낚싯줄을 넣어 고정시키는 방법이었다. 원래 비즈에 낚싯줄을 꽂아야 하는 방향 그대로 비즈 아래 빈 공간에 넣어 고정시키는 거였다. 물론 정석처럼 멋진 모양은 나오지 않았다. 줄을 어떻게 넣느냐에 따라 매번 모양이 달라지는 통에 풀고 다시 모양 잡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이렇게 임기응변을 하며 몇 번 만져보니 정석의 예쁜 모양은 아니지만 그럴듯한 디자인이 나오기 시작했다.



'다음에 제대로 된 비즈를 사서 정석은 다시 시도하고 일단 이렇게 만들자'



꽃 중의 꽃은 합리화. 합리화의 달인인 나는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며 만족스럽게 반지 만들기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원하지 않았지만 내가 선물하겠다고 호기롭게 이야기해놨으니, 이 약속을 지켜야만 한다. 물론 내가 비즈 반지를 선물하겠다고 말한 사람 중에 나중에 못 만들었다고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니까.




4일간 만든 결과물♥


그러다 문득 이 며칠간에 비즈 반지 만들기에서 내 인생에 보이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멍하게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무언가가 끝나면 불안함과 조급함을 느끼기 시작하고


눈에 띄는 무언가가 있으면 제대로, 깊게 생각해보지 않고 무작정 들이댄 후에 몇 번이고 실패한 다음 '오 이게 아니구나' 깨닫고 나서 그럴듯하게 가장자리로 돌아 정석과 비슷하게 만들어 놓고 만족하는 삶


누구도 원하지 않았지만, 주변의 인정을 받고 싶어서 혼자 사방팔방에 떠들어 놓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지만,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혼자 머리 싸매며 고민하며 꾸역꾸역 이뤄놓는 삶



엄마의 표현에 의하면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내 나름대로 합리화하자면 <그래도 뭐라도 해놓잖아>


항상 나 자신을 돌이켜 볼 때, 한 번도 정석의 길로 가본 적이 없고, 계획된 반듯한 삶에 대한 동경이 있는데 왜 그런지 알 거 같단 느낌이 든다. 30년 넘게 살아온 내 라이프 스타일로는 그런 정석의 길은 절대 불가능할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정석 대신 임기응변이 강한 삶 정도?


그래도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단, 심심하면 심심한 데로, 인생이 불안하면 불안한 데로,

외면하지 말고 길을 파다 보면 어딘가에 닿지 않을까?

이렇게 깔짝이다 보면 뭐 하나 대박이 날 수도 있는 거고...


적어도 시간이 갑자기 범람해 숨이 막힐 것 같을 때 무언가 손을 움직이고 있으면 그 시간에 잠식되는 위험은 막을 수 있다. 지금까진 그거만으로도 만족한다.


그리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제대로 된 비즈를 사서 정석으로 만드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란 거다.

그전에 먼저 질릴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누가 일하라고 하면 그건 또 싫다고 안 할 거다. 재미없으니까.



혈육을 제외한 첫 고갱님 친구와 17개월 딸의 커플반지를 만들고 있다 얼른 낀 걸 보고 싶다



비즈 반지 만들기가 질리기 전에

엄마 묵주랑 친구에게 만들어주기로 한 비즈 반지를 최대한 많이 만들어 놔야겠단 생각이 든다.


그리고 글 쓰면서 문득 생각난 것인데, 에어팟 키링 사려고 모아둔 아이템으로 팔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갑자기 흥미로워진다.


또 이렇게 창조 놀거리를 하나 더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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