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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기작 Oct 28. 2020

잠자는 숲 속의 방송국

여기가 디즈니랜드야? 잠자는 노예들이 왜 이렇게 많아



일하는 방송 작가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 개인 시간]


한 달 간의 평화로운 백수생활을 끝내고 반 강제적으로 일을 시작한 후 내 삶은 또다시 일과 휴식의 경계가 얽히기 시작했다. 복잡하게 꼬인 일은 점점 내 삶을 덮어가고, 낮의 여유를 즐기고 다이어트를 위해 가벼운 음식을 먹고 하루에 일정 시간을 운동에 투자하던 삶이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도 자정이 넘는 시간에 겨우 일을 끝내고 경기 북부에서 남부까지 운전해서 겨우 4시 즈음에 집에 도착했다.

옷 정리할 힘도 없어서 대충 누워서 이 글을 쓰는 중이다. 내일도 할 일이 산더미라 도저히 시간이 안 날 거 같아서다.


일주일 가까이 제대로운동은 하지도 못하고 불규칙적으로 먹어서 애써 뺀 살은 빠르게 찌고 있는 중이다.


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 같이 일하는 모두가 수면부족 시간 부족에 쫓기는 상황이다.


그렇다 보니 문득, 잠에 대한 환장할 이야기가 떠올랐다.

모두가 부족한 잠을 자신만 부족한 듯.

일터에서 일 대신 잠을 선택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두배로 힘들게 만드는 동화 속 주인공들 말이다.






「야 대박 피디 잔다」



촬영 현장에 나가면 다양한 일이 생긴다. 그렇다 보니 이런저런 다양한 연락이 오곤 하는데, 의외로 많이 받는 연락 중의 하나가 촬영 현장에서 누군가 잔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잔다는 피곤해서 살짝 조는 게 아니라 아주 푹 잔다는 뜻이다.


방송일이 워낙 잠도 못 자고 쫓겨다니며 일할 때가 많다 보니 살짝 조는 정도야 안쓰럽고 이해 갈 때가 많다. 그럴 땐 깨우거나 잠시 모르는 척 하기고 하지만, 눈치도 안 보고 딥슬립 할 땐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상대가 일을 못하거나 타인에게 떠넘길  더더욱.



몇 년 전 해외 프로그램을 할 때였다.

출연자들에게 미션을 주고 해외 곳곳을 다니며 힌트를 찾고 조합해서 어딘가에 있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흔하디 흔한 해외 프로그램 중 하나였는데, 준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해외+야외 촬영이 겹친 극강의 난이도를 자랑했다.


촬영 허가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촬영 준비에 필요한 정보를 얻는 것도 국내 촬영보다 훨씬 더디고 어려운 데다가 처음과 이야기가 달라진다거나 낯선 지역을 이동하며 촬영하는 경우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일일이 체크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촬영 아이템과 루트, 정보 정리가 끝나면 사전답사라는 것을 진행한다.


사전답사는 촬영 전 준비된 내용이 맞는지, 인터넷에서는 알 수 없는 현지 상황 정보를 확인하며 계획을 수정하고 필요한 허가를 받는 게 주목적이다. 여기에 덤으로 본 촬영에서는 찍을 수 없는 인서트 컷을 미리 촬영하기도 한다.


[인서트 컷은 편집 요소로 들어가는 장면들을 말한다. 예를 들어 음식을 먹는 장면에서 나오는 세팅된 음식 장면 같은]


사전답사는 실제 촬영처럼 촬영 장소를 찾아가며 진행되는데, 예를 들어 A에서 B지역을 이동해야 할 경우 한국에서 알아간 정보가 버스, 지하철, 기차라면 그 외의 방법은 없는지 알아보고 답사팀이 나눠져서 각자의 방법대로 이동하며 생기는 문제점, 경비, 대안 등을 체크한다.


본 촬영에 생길 수 있는 문제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한국에서 준비한 모든 것을 꼼꼼하게 체크하고 현지 상황을 전달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가는 것이 사전답사인데, 답사를 하러 간 친구에게 담당 피디가 자고 있다는 소식이 온 것이었다.


말도 안 통하는 타지에서 정보 체크하고 장소 이동하느라 바쁜데 잠이라니?


심지어 메시지를 보낸 친구가 자는 피디 때문에 피해를 본 적이 몇 번 있는지라 웃음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버리고 와라. 버리고 오면 본 촬영에선 안 졸겠지.」



그리고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 현실로 일어났다.




2박 3일의 본격적인 해외 촬영이 시작됐다.

출연자부터 촬영팀까지 50여 명이 넘는 대규모의 인원이 움직이는 촬영이었고, 나라를 이동해야 하다 보니 전 제작진이 더 민감하고 조심하게 움직였다.


촬영 순서보다 한 발 앞서 이동해서 사전 세팅을 담당하는 선발대와 본 촬영을 진행하는 본진으로 두 팀이 나뉘었는데, 나는 본진에 합류했다. 그리고 답사를 갔던 친구와 잠을 자던 문제의 피디도 본진에서 함께 이동했다.


그가 본진인 이유는 이 촬영의 메인 피디이기 때문이었다.


메인 피디는 총연출을 담당한다. 선발대와 본진의 상황을 확인하고 컨트롤하고 최종 결정을 해야 하는 담당자. 촬영 현장에서 같이 상황을 체크하고 의논은 해도 최종 지시는 연출자가 하는 편이다.


첫날은 계속 걷고 이동하는 게 촬영의 주 내용이라 큰일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음날 기차 촬영에서 발생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에서 대전 정도의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일이 생겼고 출연자들은 여러 이동수단을 알아본 후 기차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직접 표를 사고 기차를 기다려 탑승하는 모습을 따라가며 찍고 출연자들이 자리에 앉자마자 후다닥 따라 들어가서 카메라 앵글 잡기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기차에 탄 연출진은 카메라 뒤 사각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하필 출연자 중에 그 나라 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지라 기차가 출발하고 나서도 미션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목적지가 맞는지 고민하며 지금 내릴지 말지 의견을 주고받고 미션에 대한 추론이 계속돼서 나와 친구는 인이어로 어떤 대화가 이어지는지를 계속 체크했다. 더불어 실제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어느 역에서 내리는 게 맞는지, 선발대의 준비사항을 확인하며 카톡을 주고받고 있을 때였다.



“야 저기 봐. 피디 잔다.”

“저 사람 이 촬영 총연출 맞냐...?”



친구의 말에 뒤를 돌아보니, 피디가 자고 있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총 연출님께서.


어쩐지 기차에 탄 이후로 말이 없더라니, 맨 뒷자리에서 아주 편하게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마치 이 팀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인 듯.


황당하단 표정으로 피디를 바라보다 친구와 눈이 마주쳤는데, 답사 때부터 자는 피디에게 데인 친구는 이미 초월한 상태였다.



“피디님 자면 어떡해요.”

“아 안자요.”



번갈아가며 깨우기를 몇 번 반복했지만 그때뿐이었고, 금세 다시 잠드는 피디를 보며 ‘지금 여기서 잠 안 모자란 사람이 있냐’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다 카메라팀 팀장님과 시선이 마주쳤고 다들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냥 두고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하자.



「감독님 터널 지나면 왼쪽에 바다 나와요.」

「작가님 출연자들 지도 보니까 한 명 들어가서 어느 포인트 짚는지 찍고 빠질게요.」

「감독님 곧 전광판에 현지어로 목적 지명 뜨는데 출연자들한테 안 들키게 몰래 찍어주세요.」

「작가님 곧 목적지죠? 그럼 안 들키게 지금부터 정차 때마다 내려서 간판만 찍고 다시 탈게요.」



카메라팀과 작가팀이 직접 의견을 주고받으며 촬영을 진행했고 그 사이에도 피디는 편안하게 꿀잠을 즐겼다. 어찌나 잘 자던지, 출연자들이 목적지를 지나치고 이 상황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몸을 흔들어 깨운 다음에야 일어났다.



여기가 어디예요?”



나태 지옥이다 임마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참으며 급하게 피디를 끌고 기차에서 내렸다. 출연자들이 목적지를 지나친 걸 깨닫고 기차에서 내렸기 때문이다.


이후의 촬영도 대략 비슷하게 진행됐다. 현장에서는 총연출인 피디가 디렉팅을 한다는 룰은 저 멀리 걷어차버리고 필요한 부분을 피디한테 이야기하고 듣지 않으면 바로 카메라 감독님한테 요청사항을 이야기했다.


지금 국 룰 따지며 입 다물고 있기엔, 해외 촬영은 지금 이 순간에 놓치면 추가 촬영을 할 수 없고, 그럼 방송이 나갈 때까지 잔소리 폭격을 맞을 게 뻔하니 말이다.



감독님 저기 목적지 간판인데 촬영 ...”

 내리자마자 찍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ㅜㅜ



피디는 뭘 했는지 기억 안 나지만 나와 친구가 직접 연출진과 출연자들과 소통하며 촬영을 진행해도 별 말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그즈음엔 우리 둘 다 피디에게 매우 화가 난 상태라 조금이라도 건들면 싸울테세였는데 싸운 기억이 없는 걸 보아 건드리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가 나서는데 싫진 않았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본업을 건드는데도 너그럽다니, 알고 보니 부처였던 걸까...


아무튼 우리는 부처가 아니었으므로 본 촬영이 모두 끝난 저녁, 한국에 있는 메인작가님께 연락해 이 상황에 대해 보고했다. 그리고 모든 촬영을 다 마치고 무사히 한국에 돌아갔고, 문제의 그 피디는 그 회차를 마지막으로 팀을 그만뒀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편집에 성실히 참여하지 않아 말이 나왔던 걸 보면 그도 부처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 후로 일하면서 잠으로 문제 되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종류도 다양해서 자느라 편집을 안 해서 억지로 붙잡고 깨워가며 편집을 할 때도 있고, 촬영 진행 여부에 관심 없이 구석에서 자서 억지로 깨우려고 시도하다 포기하는 경우, 늦잠 잤다고 아예 연락도 끊고 출근하지 않고 사라지는 사람들도 있고. 그럴 땐 참 잠이 뭔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살다 보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많다. 심지어 잠처럼 본능과 관계된 일은 내 의지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 마냥 그들에게 뭐라고 하고 싶진 않다. 나 역시 잠이 부족해서 촬영 현장에서 졸거나 영혼이 나갈 때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최소한 잠과 싸우려는 의지, 노력은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핫식스를 먹든 계속 몸을 움직이면서 잠을 깨우려고 노력하든, 아니면 잠깨기 위해 잠시 바깥에 나갔다 오던지. 같은 상황에서도 그렇게 노력하고 양해를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화가 나지 않았던 걸 보면 잠보단 '어떻게든 되겠지. 누군간 수습하겠지'란 그 마인드가 더 싫다. 똑같은 상황에서 몰려드는 잠을 참고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는 다른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느낌.


오로라 공주가 잠든 것처럼 물레에 찔리거나, 백설공주처럼 독 바른 사과를 먹은 게 아니면.


피차 똑같이 힘든 상황이니

제발 좀 참으려는 노력이라도 해주길 오늘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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