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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기작 Nov 17. 2021

짜친 일상 루틴의 힘

무슨 일이 있든 나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하는 이유


사고가 났다.


좁은 골목에서 후진으로 차를 빼다가 길 맞은편에 주차되어 있던 차와 부딪친 것이다. 좁은 이차선 길에 골목도 많고, 차도, 사람도, 강아지도, 자전거도 많은 곳이라 크고 작은 사고가 거의 매일 일어나는 곳이었다. 최근에 일 때문에 이곳을 찾을 때가 많았는데, 워낙 돌발 상황이 많은 곳이라 평소보다 주의를 더 기울이는 편인데도 사고가 나는 순간은 정말 귀신같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4km 미만의 아주 느린 속도로 천천히 차를 빼고 있던 상황이었다는 것이고, 덕분에 두 차가 닿는 순간 바로 멈출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편 차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예전에 차 사이에 미세한 접촉은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단 말을 들었는데, 이번 사고를 겪어본 입장으로썬 글쎄다. 소리도 거의 나지 않을 정도의 경미한 접촉사고여도 차끼리 닿는 순간 오감으로 사고가 났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지 않아도 '망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왱왱 울리는데 모를 수 있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급하게 비상등을 켜고 상대 차에 적힌 전화번호를 확인해 상대방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나온 차주에게 사과와 함께 사고 경위를 설명하고 함께 사고 현장을 확인한 후, 사진을 찍고 보험 접수를 했다. 대한민국 인프라가 얼마나 잘되어 있는지를 느끼는 건 이런 예외의 순간인 것 같은데, 밤 10시가 넘은 늦은 시간이었지만 10분도 안 돼 도착한 보험사 직원이 현장을 확인하고 접수를 도와주고 상황을 정리해주었다.


사고가 나고, 보험 접수를 마치고, 상대 차주가 먼저 떠나고 모든 상황을 끝내는데 든 시간은 1시간 남짓. 심지어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지라 궁금한 것을 죄다 물어보느라 보험사 직원을 붙잡고 있었던 시간이 꽤 됐던 거 감안하면 1시간도 안 돼서 모든 일이 끝났다는 것이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사고가 일어난 게 맞는지, 이 모든 상황이 꿈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이 모든 게 현실이라는 걸 깨달은 건 내가 집으로 오는 내내 어떤 노래도 듣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다. 짧은 거리를 운전해도 노래든 팟캐스트든 꼭 틀어놓는 내가 아무 노래도 듣지 않다니. 사고의 규모와 관계없이 멘털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늦은 시간 집에 도착했다. 부모님께는 이미 사고 소식을 알렸기 때문에, 이것저것 물어보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다행히(?) 두 분 다 큰 반응이 없었다. 아마 일부러 배려해서 묻지 않은 듯하다. 그 마음에 감사를 전할 기력도 없어서 잠자리에 일찍 누웠다.


어떤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고,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사람이 다치지 않아서, 더 큰 사고가 나지 않아서 너무 다행이란 생각과 분명 확인하고 또 확인했는데 왜 사고가 났을까 하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은 알 수가 없어서, 그날 밤은 자다 깨다를 반복 하며 보냈다.


지구가 두쪽 나도 해가 뜨듯이, 다음 날도 평소처럼 울리는 알람에 눈을 떴다. 생각의 관성이라는 건 기묘해서 눈을 뜸과 동시에 '왜?'라는 질문이 제일 먼저 고개를 들었다. 머릿속에 '왜'를 매단 채로 이미 하루를 시작한 가족들이 떠나고 텅 빈 집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까'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차라리 출근을 하든 뭘 배우러 가든 강제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스케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원래 계획한 오늘의 일정은 있지만, 꼭 오늘 해야만 하는 강제적인 스케줄은 하나도 없는 날이었다. 그 말은 내가 오늘 하루를 뭉개기로 마음먹는다면 그대로 TV와 한 몸이 된 채로 보험 전화를 기다리는 것으로 오늘 하루를 삭제해버릴 수 있단 뜻이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아서 아무 생각도 안 드는 상태로 멍하니 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어떤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어서 멍하니 있으려니 심란한 생각들만 떠올랐다. 이 나이에 시간과 돈을 펑펑 낭비하면서 다니다가 사고나 치고 말이야. 나는 뭘 원해서 남들 다 일하러 가는 시간에 집에 앉아서 이미 벌어진 사고를 생각하고 있지?


분명 방금 전까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급격히 땅굴을 파고 들어가고 싶어 져서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 잠시 머뭇거리다 생각을 멈추고 겉옷과 차키를 챙겨 들고 무작정 집 밖으로 나왔다. 이대로 집안에 가만히 있으면 온갖 우울한 생각에 발목이 묶여버릴 것 같았다. 우울함이 베이스가 된 고요하고 정적인 시간에 주저앉아있는 것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이미 일어난 거 어쩔 거야. 커피나 사 오자.'


어플에 원래 오늘 하려던 계획들을 확인했다.

기름이 거의 떨어져서 주유를 해야 하고, 저녁에 미용실 예약을 해두었다. 읽던 책도 반납이 얼마 안 남아서 빨리 마저 읽어야 한다. 그럴듯한 계획들이지만 사실 굳이 오늘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굳이 미룰 만한 마음 상태도 아니었으므로, 시간을 깨기 위해서라도 움직여야겠단 결론이 들었다.


어차피 보험회사에서 상황 확인 후 연락을 줄 거고 내가 백수인 상황은 사고 전이나 후나 똑같음으로 굳이 그걸 상기시킬 필요는 없다. 예상 못한 사고로 시끄러운 속을 잠재우는 데는 몸을 움직이는 게 제격이었다.


차로 가서 사고 부위를 한 번 더 체크하고 주유소로 이동했다. 기름값이 가장 싼 주유소에서 주유를 하고 다시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평소 궁금했던 카페의 커피와 디저트를 사들고 집에 돌아왔다. 책을 읽고, 원래 계획대로 러닝을 뛰고, 머리를 잘랐다.


미용실을 다녀온 후에는 어젯밤 이후의 연락에 답장을 했다. 지난밤에는 정신력이 딸려 못했던 연락에 자연스럽게 답하며 대화를 이어가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미용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보험사에서 연락 와서 사고 관련 통화를 했고, 문득 시계를 보니 오늘 하루가 다 지나가 있었다.


물론 시간이 빌 때마다 '왜?'라는 질문과 사고 순간이 불쑥 튀어나오긴 했다. 하지만 깜짝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든 누군가가 열 때까지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듯이, 내가 소소한 일상을 하며 움직이고 있을 때는 잠잠히 의식 밑바닥에 눌려 기다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잠시 시간이 비고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확 튀어나와 나를 놀라게 하고 다시 '왜'라는 질문을 떠올리게 만들었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서 내가 상자를 닫으려고 하면 순순히 그 안에 들어가서 다음 순간을 기다려주었다.


24시간 머리 한쪽을 지배하고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던 존재를 상자 안에 넣어 잠시 의식 밑으로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게가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분명 내 발아래 풀리지 않은 의문과 나를 괴롭게 하는 사고의 순간들이 존재하지만, 무방비하게 풀어져있는 것과 보호막이 있다는 건 분명 달랐다.


그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다다음 날. 여전히 강제성은 전혀 없고 나와 내가 약속한 소소한 일상을 진행했고 상자의 크기와 존재감은 급격히 작아졌다. 존재감이 작아진 사고 순간은 갑자기 떠올라도 처음처럼 충격적이거나 속이 쓰리지 않았다.


며칠 만에 사고 장소에 다시 갔을 때도(동생 일을 도와줘야 해서 계속 가야 하는 곳이다) '아 맞다 더 조심해야지', '그런 문제가 안 생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하고 생각했다. 이 상황을 알고 있는 지인이 알려준 안전한 주차방법을 실행해보며 '이런 상황에선 이렇게 해야 하는구나'를 채득 했다. 아마 처음의 마음에 눌려 있었다면, 운전도 하기 싫고, 사고가 났던 장소에 똑같이 주차를 해야 하는 상황이 지옥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뭔갈 배우거나 바꿔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 내 성격상 한 번 '왜?', '어째서?'라는 생각이 들면 그 사고에 잠식되어 버린다. 작은 사고를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며 엄청나게 부풀리고, 스스로 만든 질문과 우울의 감오에 갇혀 이 분노를 핑계 삼아 화를 내고 음주를 하며 자기 연민에 빠졌을 것이다. 물론 여전히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긴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단 마음도 꽤 자란 듯하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거지 어쩌겠어. 그렇게 해서 마음이 풀린다면 그렇게 해. 그런데 그런다고 기분이 좋아졌던가?


도저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아서 멍하니 집에 앉아있을 때 무의식 중에 떠올랐던 말이다. 내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고 하는 그 순간에 사실은 두 개의 마음이 치열하게 대화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본능에 가까운 부정적인 마음에 대항하는 목소리가 생긴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아마 스스로 정한 작은 약속들을 정하고, 일상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들이 쌓여서 생긴 것 아닐까 한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당연한 규칙적인 생활, 긍정적인 생각이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늘어지고 싶은 본능이 끝없이 나를 붙잡고, 어느 정도 그 본능에 굴복하며 살고 있지만 나름대로 스스로에게 규칙을 정하고 규칙적으로 살려고 노력해왔다. 정말 작고 보잘것없는 '오늘 할 일'을 정하고 그걸 지키며 쌓아온 노력들이 예상외의 상황이 생겼을 때 나를 지키고 굴러가게 만들었다.


물론 이번 사고는 매우 작고 빨리 극복할 수 있는 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고, 더 큰일이 생기면 내 삶이 무너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예상외의 상황이 생겼을 때 그 상황에 함몰되지 않고 움직이며 별거 아닌 일상을 충실하게 행했을 때의 효과를 느끼게 된 오늘의 경험은 앞으로 살아가는데 더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5분 책을 읽고, 30분 걷고, 한 줄이라도 글을 쓰고.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내가 정한 매일의 루틴을 정말 사소한 거라도 지키면 분명 힘을 갖게 된다.

오늘 할 일을 미루지 않고, 정말 작고 보잘것없는 약속이라도 지키고, 어떤 일이 생겨도 흔들리지 말고 지킬 것. 나를 잃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다음을 향해 갈 수 있는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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