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이지 뭐하나라도 얻어와서
동양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두 달을 넘긴 초보 of 초보다.
일주일에 한 번, 두 시간씩 화방에 가서 그림을 배우고 오는데, 정규 교육 과정을 거치면서 미술 수업을 듣긴 했지만 동양화를 내가 직접 해볼 거라곤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기 때문에 이 시간이 매우 신기하고 흥미롭다. 교과서에서 보기만 했던 그림을, 심지어 흥미를 느껴본 적 없던 동양화를 스스로 배워볼 생각을 하다니 인생은 참 알 수가 없다.
사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건 시간과 돈이 모두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프리랜서로 일하면서는 남의 일처럼 느껴진 시간이 많았다. 일을 할 땐 돈이 있어도 밤낮 없는 스케줄 때문에 고정적인 수업을 듣기가 어렵고, 일을 쉴 땐 월급이 안 들어온다는 부담감 때문에 쪼들려서 시간이 넘쳐도 쉽사리 용기가 나지 않는다. 지금도 예상보다 긴 백수 생활에 부담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림에 집중하는 순간이 좋아서 멈출 수가 없다.
지금은 도안을 받쳐놓고 모사하고 선생님이 섞어준 동양화 물감으로 채색하는 게 전부지만, 열심히 배워서 언젠가는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는 게 목표가 됐다. 백수인 상태로 35살을 맞이할 생각을 하면 눈앞이 캄캄하지만, 그 위에 채색을 할 생각을 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고 있다.
사실 동양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매우 사소했다. 몇 달 전, 잠시 했던 아르바이트가 시작점이었다. 공공기관에서 의뢰한 유튜브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해주는 일이었는데, 친한 작가 언니가 같이 일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나름 큰 공공기관에서 연예인까지 섭외해서 진행하는 큰 프로젝트였는데, 요즘 유튜브 시장이 그렇듯 방송작가는 최후의 순간에(일 시키는 기간만큼 돈이니 최대한 줄이기 위해) 투입돼 짧은 시간에 모든 일을 마쳐야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일할 수 있는 연차에 서로 잘 알고 손발이 맞는 사람과 함께 일해야 수월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본격적인 회의도, 준비도 된 건 없지만 최대한 빨리(가능하면 한 달 내) 끝내기를 바라는 조건이 까다롭긴 했지만, 늘어지는 것보다야 단기간에 바짝 일하고 빠지는 게 좋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매우 설득력 있었고 바로 그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매일 출근할 필요도 없고 함께 일하는 사람도 편하고, 이 일을 끝내고 바로 다음 일을 구하면 페이 끊길 일도 없겠구나 싶었다. 늘 그렇듯이 내 계획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었지만 말이다.
일을 하기로 하고 일주일에 한두 번 회의를 하러 서울에 갔다. 그 외의 날은 아이템을 찾고 구성을 하고 촬영용 스튜디오를 알아보며 구체화시키는 작업을 했다. 한국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전통들을 찾아보고 영상 콘텐츠로 어떻게 접목시키면 좋을지에 대해 고민했는데 기관에서 원하는 아이템 목록 중에 동양화가 있었다.
사실 이번 일을 하기 전까지 한 번도 동양화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 아빠가 미술을 하셨기 때문에 지금도 집안 곳곳에 미술 관련 아이템들이 있고, 나도 어릴 때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꼬마였지만 모두 서양화와 관련된 것들이었지 동양화와 연관된 건 하나도 없었다.
주변에 미술을 전공한 친구들이 있었지만 입시미술의 90%는 서양화였고, 자연히 동양화는 미술책에서 접하는 게 전부였다. 심지어 미술책에도 시험에 나오는 수묵화나 몇 세기 전에 그려진 그림들(화선지가 낡고 채색이 벗겨진)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나에게 동양화는 은은하고 조금 낡은 이미지였다.
그래서 동양화를 그리는 콘텐츠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속으로 놀랐다. 미술 자체가 너무 정적이기 때문에 영상 콘텐츠 소재로 잘 안 쓰이기도 하고, 조금만 칠해도 색감이 진한 아크릴 물감이나 파스텔이 아닌 은은한 동양화를 그린다는 게 어떻게 구현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위에서 결정한 일에 나는 발언권이 없었으므로 걱정을 접고 그때부터 어떻게 동양화를 영상에 접목시킬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감이 안 와서 동양화를 검색해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다가 원데이 클래스, 동양화 전문 공방 등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찾아봤다. 그리고 아이템을 찾아볼수록 내 편견과 다른 부분이 많다는 점에 매우 놀랐다.
일단 흐리고 은은하다는 인상과 달리 색감이 옅은 것부터 진한 것까지 다양했고, 어떤 채색 도구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느낌도 많이 달랐다. 그림으로 다루는 주제도 다양했고 현대화를 동양화 느낌으로 재현한 것도 많았다. 무엇보다 오래 봐도 눈이 피로하지 않은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신선했다.
'생각보다 예쁘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찍지'
이쯤 되니 왜 위에서 동양화 아이템을 고집했는지 알 것 같았다. 태어나서 처음 검색해본 동양화의 아름다움에 매우 공감하면서도, 머리 한쪽에서는 이걸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끊임없이 일 레이더가 가동됐다. 그렇다 보니 표면적인 예쁨 외에 진지하게 감상할 시간이 덧없이 부족했다. 긴 시간을 두고 채색을 쌓아야 하는데 그렇게 촬영이 가능할 리도 없으니 이 문제부터 해결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건 없으므로 데이터와 아이디어를 더해 아이템 페이퍼를 수정했다. 원래 회의라는 게 반복하고 자료를 찾으면서 구체적인 방안을 맞춰나가는 일이니까.
그런데 이 작업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소소한 문제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제작진 회의가 몇 번씩 거듭됐지만 구체적인 사안에서는 전혀 진전이 없었다. 촬영 내용에 대한 것은커녕 구체적인 날짜도, 어떤 아이템을 할 것인지에 대한 것도 회의만 반복됐지 정해지는 게 없어서 답답했다. 제자리를 뱅뱅 도는 느낌이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공공기관이니까, 모든 것에 신중해서 시간이 더 필요한가 보다 생각했다.
그리고 문제의 그날 쌓인 불만이 모두 폭발했다. 그날은 아침부터 밤까지 여러 회의가 잡혀있었는데, 제작진 회의, 공공기관 쪽 담당자가 참여하는 회의, 연예인 소속사 관계자와의 미팅까지 이 일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만나는 날이었다. 물론 연예인 쪽 담당자와 미팅을 한다는 건 그날 아침 제작진 회의에서 알게 되긴 했지만.
'이런 걸 왜 미리 이야기 안 해주는 거야?'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니라 빠르게 가라앉혔다. 이 일에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만나는 날이니 오늘 하루 고생하면 일에 상당한 진전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당시는 예상 촬영을 2~3주 정도 남긴 시점이었는데 (2~3주라고 표현한 건 촬영 날짜조차 안 정해졌기 때문이다) 속절없이 가는 시간에 속이 타던 시점이라 뭐든 정리되길 바라고 바랬다.
하지만 늘 그렇듯 내 예상대로 되는 건 없었다. 오전 10시쯤 시작된 제작진 회의에서는 이전과는 별 다를 것 없는 '글쎄요''나쁘지 않네요''생각해보시죠'만 반복되고 끝났다. 구체적인 촬영 일정과 콘셉트를 이야기하던 나와 선배는 곧 포기했고, 오후 회의 때는 다를 것이라며 서로를 다독였다.
무한 루프에 갇힌 기분을 애써 달래며 오후 회의(라고 쓰고 밥도 안 주고 하는 점심 회의)에 참석했다. 하지만 그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 일이 아니어도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인 공공기관 관계자는 우리가 보낸 아이템을 처음 보는 듯이 반응했고 최대한 빨리 업로드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빨리 찍으려면 그쪽에서 결정을 해줘야 한다며 구체적인 사안을 짚으며 이야기하자, 내부에 보고해서 회의 후에 알려주겠다며 보고용 자료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때 우리가 내민 자료는 방송에서 사용하던 보고양식 자료였고, 이 이상 어떤 자료를 만들어 달라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자 다른 프로젝트에서 만든 듯한 프로젝트 파일이 넘어왔다. 누가 봐도 전문가를 고용해 오랜 시간 공들여 나온 대외 홍보용 자료였다. 내부 보고 및 회의용 자료라곤 믿을 수 없는 퀄리티에 '이렇게 까지 해야 컨펌이 나는 거야?' 하는 의문이 다시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렇게 하면 되겠네요. 프로젝트 파일로 만들어서 주세요."
피디는 당연히 우리 일이라는 듯이 프로젝트 파일을 우리에게 넘겼다. 이곳은 방송국이 아니다는 생각을 하며 수없이 마음을 억누르려고 했지만 너무 화가 나서 얼굴이 굳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소속사 미팅을 마치고 나서도 이건 아닌 것 같다는 결론이 났고, 그나마 나보다 이성적인 선배가 최대한 돌려 우리의 의사를 전달했다.
오늘 회의한 내용으로 촬영 준비에 들어가되 프로젝트 파일을 만드는 건 전문가에게 맡겨야 할 것 같다. 오늘 받은 피피티는 전문가가 제작한 수준인데 이런 디자인 작업은 전문가가 필요하다. 다만 안에 들어가야 할 타이틀과 관련 내용은 주말에 모두 정리해서 넘기겠다고.
하지만 이 절충안은 바로 거절됐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왜 안 하냐는 이야기까지 나왔고, 그 반응에 우리는 그럼 프로젝트 파일 만들 수 있는 작가를 찾아보라 말하고 지금까지 만들어둔 자료를 싹 다 정리해서 넘기고 그 일에서 손을 뗐다. 한 달간 일한 건 아깝지만 이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라는 게 우리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아침부터 숨 가쁘게 달렸건만 한순간에 모든 일이 사라졌고, 금요일 저녁 나는 꽉 막힌 도로 정체에 끼어 집으로 향했다. 지금까지 일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시간과 에너지만 소모한 느낌에 허무했다. 무엇보다 다들 작가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한숨이 나왔다.
집에 돌아와서 업무용 파일을 다시 보는데, 동양화가 눈에 띄었다. 글과 그림이 함께 있으면 이해가 더 쉽기 때문에 아이템 자료에 예시로 넣어둔 그림이었다.
'그림이나 배워볼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 동양화의 아름다움에 치유받겠다 이런 건 아니고 울컥하는 마음이 컸다. 내가 돈 좀 벌어보겠다고 이걸 계속 들여다보면서 밤늦게까지 고민했는데, 하루아침에 아무것도 아닌 게 되다니. 한 달간 쏟은 내 시간과 노력이 사라지게 두지 않겠단 심산이었다.
집 근처에 검색을 해보니 동양화를 가르쳐주는 화방이 눈에 띄었고, 바로 등록했다. 한 달을 허비했으니 한 달은 공들여 배워보자 다짐했다. 동양화로 그림 그리는 아이템 그거 내가 해서 올릴 거야 뭐 그런 마음이었다.
전혀 순수하지 않은 마음을 갖고 찾아간 공방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분위기였다. 모두가 집중해서 자기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상냥한 선생님은 내가 세필붓으로 줄만 그어도 잘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숨만 쉬어도 칭찬받는 분위기가 어색하면서도 내심 좋았던 나는 더 칭찬받겠다는 의지로 세필붓을 사서 집에서도 붓에 적응하는 연습을 반복했다.
세필붓에 적응한 후에는 그림 도안을 하나 골라 모사를 시작했다. 묽은 먹으로 윤곽을 따고, 선생님이 그림에 맞게 만들어준 물감을 채색 붓에 칠해 알려준 방식대로 칠한다. 거의 선생님이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지만 칭찬받겠다는 일념으로 집중해서 그림을 그려나갔다.
평일 오전 시간 수업이라 다른 수강생들은 거의 엄마 또래의 중년 여성분들이셨는데, 훨씬 고난도의 화려한 그림을 그리시면서 내 그림을 보고 한 번씩 '첫 수업인데 잘하네''곱다'같은 칭찬을 해주셨고 쑥스러움을 잘 타는 소심한 관종인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감사 인사를 대신했다.
한 달로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민 끝에 세 달을 연장했고, 지금은 첫 번째 그림을 마치고 두 번째 작품에 들어갔다. 일을 시작하면 스케줄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스스로 그릴 수 있는 실력이 될 때까지 가능하면 포기하지 말고 계속 배워보자는 마음이다. 마음 같아선 미술 재료를 몽땅 사다가 방구석에 화방을 차려놓고 싶은데, 돈도 없고 공간도 없기 때문에 마음을 누르며 참는 중이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때 일한 돈은 못 받고 있다. 주겠다 이야기는 하는데 과연 언제 줄지, 주기는 할 건지 미지수인데, 물론 일한 돈은 받아야 하지만 지금은 못 받으면 어쩔 수 없지라는 마음이 더 강하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내가 스스로 동양화를 배우겠다는 생각을 했을 리 없고, 채색을 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일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이 취미가 나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 모르겠지만, 하나를 잃고 하나를 얻었으니 그림을 통해 뭔가 또 얻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인생이란 게 원래 그런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