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이 밝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새해가 시작되고도 10분이 넘어갈 때까지 2022년이 된 줄 몰랐다. 가족이 가져온 휴대용 전동 그라인더가 원두를 가는 모습을 엄청 신기하게 구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공간에 있었던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한 명은 설거지를 하고 나머지는 강아지와 노느라 아무도 새해가 시작됐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나마 핸드폰을 만지고 있던 내가 상단에 뜬 시간을 보고 '야 12시 지났는데?'하고 말했고 그제야 다들 '언제?''벌써?'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다시 자신이 하던 일에 집중했다. 그렇게 2022년 싱겁고,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왔다.
어릴 때는 새해에 온갖 의미를 부여했었다. 부모님 손에 이끌려 다니던 어린 시절에는 어른들을 따라 미사를 하며 새해를 맞이했었다. 천주교에서 가장 큰 행사인 크리스마스와 새해 첫날은 일주일밖에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 12월 중순부터는 거의 성당에서 살다시피 했던 기억이 많다. 매주 가던 성당이 그 시즌이 되면 반짝반짝거리고 모두 기분 좋은 웃음을 짓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조금 더 큰 후에는 친구들과 새해를 축하했다. 10대 시절에는 여전히 성당에서 새해를 맞았지만, 부모님이 아닌 또래 친구들과 함께 있었고, 성인이 된 후에는 명동이나 정동진으로 향했다. 물론 나는 타고난 집순이 었고 이벤트를 좋아하는 마음보다 추운 겨울에 집 밖에 나가는 게 귀찮다는 마음이 좀 더 이기는 성격을 타고났기 때문에 특정 장소에서 새해를 맞은 이벤트는 손에 꼽을 수 있는 정도였고 대부분의 해는 집에서 TV를 보며 새해를 맞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화려하게 꾸민 연예인들이 강추위에 코가 빨개진 상황에도 힘차게 외치는 카운트다운을 따라 하고, 보신각 종이 치면 박수를 쳤다. ocn이나 채널 cgv 같은 영화채널에서 새해 정각에 맞춰 '해피 뉴 이어'란 대사가 나올 수 있게 영화를 편성해주면 그 순간을 기다리기도 했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새해에 처음 듣는 노래가 올해의 주제곡이라는 이야기가 유행할 때는 며칠간 심혈을 기울여 고른 새해 송을 정각에 틀었다. 혹시 다른 노래는 트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방문을 닫고 카운트다운 보라는 말에도 거절하며 플레이 버튼만 뚫어져라 바라봤는데 중요한 건 내가 그때 어떤 노래를 들었는지 도통 기억이 안 난단 것이다. 창의력이 없는 편이니 분명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새해 송 중 평소에 좋아하는 노래를 골랐을 것이다.
내가 밖에 있든, 안에 있든, 가족과 있든, 친구와 있든, 혼자 있든 새해를 맞이하는 순간은 늘 설렜고, 가슴이 벅찼다. 지긋지긋하고 되는 게 하나도 없던 과거와는 이별하고 희망찬 새 시대를 열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 분명 지난해도 올해도 비슷할 텐데, 학습된 희망은 조건반사처럼 새해 되면 튀어나와 내 마음을 흔들었고 꽤 오래 여운을 남겼었다.
그랬던 연말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정확히는 새해를 맞이하는 특별한 퍼포먼스가 필요하지 않다고 느낀 시점 말이다. 여전히 새해가 되면 과거에 꼬였던 모든 일들이 착착 풀리고 새로운 인생이 열릴 것 같은 희망이 들지만, 예전에는 그 희망이 1월 내내 갔다면 이제는 1,2분 가나?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메시지를 주고받고 나면 휘발되어 버리는 것 같다.
아니, 당장 며칠 전의 내가 원두가 갈아지는 걸 구경하다 새해가 놓친 걸 생각해보면 이미 새해 정각을 기다리는 게 나에게 큰 의미가 아니게 됐단 뜻 같다. 그게 아니었다면 원두를 보면서도 틈틈이 시간을 확인했겠지.
새해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염세적이 됐다던가 세상 비관적이 됐단 뜻은 아니다. 그저 몇십 년을 겪다 보니 무덤덤해진 것도 있고, 한 해가 지나갔다는 사실보단 평범한 하루가 지나가고 다시 시작됐다는 개념이 나에게 더 와닿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시계가 11시 59분에서 12시로 바뀌었다고 해서 황금마차가 유리구두가 사라지지 않듯이.
갑자기 흰머리가 늘어난다거나, 없던 일자리가 생기지도 않듯이.
그저 어제와 똑같이 24시간이 지났고, 시간은 성실히 흘러가며 고만고만한 하루들이 이어질 것이고, 그 흐름이 이어지다 보면 우리는 또 새해를 맞이할 것이다. 요란할 것 없다. 자연스럽게 흘러 나에게 온 새해를 인지하고 그 순간 바로 흘려보내 주면 된다.
새해가 왔다고, 방금 전이 1년 전이 됐다고, 나는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데 또 시간이 이렇게 흘러버렸다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나는 지금 내가 사는 이 순간, 현재에 집중하고 싶다.
그동안 너무 많은 시간을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을 걱정하며 산 것 같다. 분명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내가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지만, 특정 시제의 시간을 생각하느라 지금뿐인 현재를 놓치고 산 시간이 너무 많다.
어른이 된 우리는 여전히 새해에 설레고, 희망을 품는다.
하지만 새해를 맞이하는 태도는 분명히 달라졌다.
어디서 무엇을 누구와 하고 있든, 현재에 집중하는 것.
새해를 축하하고 지난해를 홀가분하게 던져버리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사실이다.
내 현재 시간, 눈앞의 순간에 집중하다가 새해를 깨달으면 "새해 복 많이 받아"하고 말을 건네고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만이다.
내가 어른이 됐다고 느껴본 적이 별로 없고, 여전히 지금도 과거를 지긋지긋해하고 미래를 두려워하지만, 새해가 됐을 때 그라인더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처럼 어쩌면, 올 한 해는 좀 더 현재에 집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올해 나의 목표는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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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버티는 것만으로도 기적인 시절을 잘 견딘 우리는 지나간 이 순간을 웃으며 이야기하는
현재를 사는 어른이 될 거예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