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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노래 Sep 06. 2024

불어라 책바람

읽고 쓰는 것에 대하여 

“내가 보내준 소설 읽어봤어?” “응 읽었지” “어때?” “재미없어” “아니 재미없는 건 당연하니까 그거 말고 다른 평가”


“음… 있잖아” “응” “다 좋은데, 수능 문학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올드하다고, 어디 고3 국어 문제집에 있을 거 같아”


한여름 주말 저녁에 여자 친구와 마라탕을 시켜 먹으며 나눈 대화다. 나는 소설 수업 과제로 제출할 작품에 대한 1차 평가를 여자 친구에게 맡긴 참이었다. 여자 친구는 MBTI로 따지면 T 중의 T라, 제아무리 남자 친구라도 눈에 콩깍지가 끼지 않고 냉철하게 평가해 줄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없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올드한 수능 문학 같다니 좀 이해가 잘 안됐다. 마라탕 그릇에서 부지런히 푸주(중국식 건두부)를 건져 먹던 여친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되묻는 나에게 심드렁하게 “네 글은 요즘 현대 소설 같은 느낌이 없어, 되게 옛날 사람이 쓴 글 같아. 그냥 그렇다고”라고 했다. 정말 열심히 쓴 소설인데 옛날 사람이라니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여자 친구의 말이 틀린 게 하나 없었다. 교열 기자로 십수 년을 지내면서 신문 기사나 칼럼을 많이 읽은 거지 문학은 한참을 놓고 살았기 때문이다. 결국 내 머릿속에 남은 문학이란 고3 시절 부지런히 읽었던 근대소설이 다일 테고, 문체나 전개 방식이 그 소설들의 경향을 따라갈 것임은 필연이었다.


여자 친구와 그렇게 얘기하고 난 뒤부터 마음에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나는 21세기의 작가로 등단하고 싶은데 낡았다니 너무하잖아’ 생각이 듦과 동시에 뭔가 현대적인 세련된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치솟았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문체를 세련되게 다듬을 수 있는지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 걸 강제로 교정하는 법을 배운 바도 없었다. 고민하던 와중에 소설 담당 김종광 교수님이 “각종 수상 작품을 한 100권쯤 읽으면 글눈이 트일 거예요”라고 얘기한 것이 문득 떠올랐다. 그래서 ‘아 일단 많이 읽으면 되겠구나’ 단순하게 생각하고, 다음 날 바로 회사 근처 서울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자료실 컴퓨터로 무턱대고 ‘문학상’ ‘수상집’ ‘수상작’ 등을 검색했다. 그러자 컴퓨터가 기호 813번쯤 코너에 가면 이상문학상 수상집도 있고 현대문학상 수상집도 있을 테니 가서 읽어보라고 안내해 주었다. 그날로 나는 ‘책바람’이 났다. 소설 작가들이 일상과 비슷한 공간에 어디선가 만나봤을 법한 인물들을 척척 데려다 놓고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마치 연극 무대 같았다. 그중 특히 기억나는 작품은 조해진의 「사물과의 작별」 및 「허공의 셔틀콕」이다. 「사물과의 작별」은 군사정권의 폭압으로 사랑을 잃고, 결국엔 치매로 자신까지 잃어버린 고모의 이야기를, 「허공의 셔틀콕」은 입양아인 데이비드가 한국의 어머니를 찾으며 겪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특히 데이비드를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허공에서 부지런히 양쪽을 오가는 셔틀콕에 비유한 것은 가슴을 쿵 때렸다. 


요즘 MZ세대 사이에 독서가 유행이라고 한다. 문화체육관광부 조사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성인 연간 종합 독서율은 47.5%였는데, 20대 청년층의 독서 참여율은 78.1%에 달했다는 것이다. 또 20대들은 책 소개나 책 읽는 사진 등을 인스타그램 등 SNS에 올리며 독서를 힙한(멋있는) 일로 여긴다고 한다. 아이돌 가수 뉴진스 멤버 민지가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를 읽는 장면이 뮤직비디오에 나오자 해당 책 판매량이 8배 뛰었고 올 서울국제도서전 관람객 70% 이상이 20~30대였다고 하니, 책바람이 불어도 단단히 분 셈이다. 어쩐지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갈 때마다 젊은 친구들이 굉장히 많아 신기했는데 나도 모르게 그 책바람에 같이 올라탄 셈이니 어깨가 좀 으쓱해져, 인스타그램에 책 사진을 찰칵 찍어 올리며 ‘힙하게 책 읽는’ 티를 냈다. ‘힙하게 많이 읽고 많이 쓰다 보면 그럭저럭 쓸모 있는 작가도 될 수 있겠지’ 작은 소망도 한번 가져본다. 불어라, 책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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