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의 감성으로 들여다보기
아침에 일어나 습관처럼 리모컨을 들고 13번을 누른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소리에 잠이 깬 아이는 터덜터덜 거실로 나와 소파에 기댄다. 가볍게 아침 식사를 끝내고 아이에게 칫솔을 건넨다. 머리를 빗겨주고 손톱 발톱이 얼마나 자랐나 한 번 들여다본다.
이제부터 고비다. 핑크 공주가 되겠다는 확고한 패션 철학을 가진 일곱 살 딸과 부끄러움이 앞서 차마 그렇게 입혀 보낼 수 없는 나 사이의 지루한 전쟁 혹은 타협.
내가 골라놓은 옷은 무조건 싫다고 한다. 엄마가 고른 옷은 일단 다 맘에 안 든다고 뾰로통한 표정이 말해준다. 아이는 계절과 날씨에 상관없이 그날 아침 문득 입고 싶어진 옷을 꺼낸다. 아니면 머리핀부터 구두까지 모두 핑크색으로 맞추거나.
지난 7월이었다.
아이는 원피스 위에 카디건을 입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날따라 왜 이리도 말을 안 듣는 건지. 그렇다고 아침부터 기분 상하게 잔소리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럴 기운도 없었다.
그래, 가서 더우면 벗으면 되니까 입고 가.
그렇게 아이는 아침부터 푹푹 찌는 7월의 여름날, 쌀쌀한 간절기에 걸쳐 입는 카디건을 단추 하나하나 꼼꼼히 채우고 집을 나섰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사뿐사뿐 새침데기 공주 스텝으로 계속 걸어갔다. 유치원에 늦든 말든 오늘은 카디건 공주니까.
하원 시간에 맞춰 유치원에 도착했다. 그런데 저기 보이는 아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버릴 것 같은 땅콩입을 하고서 걸어온다. 친구랑 싸웠나? 왜 그러지?
무슨 일 있었냐는 내 물음에도 아이는 아무 말없이 신발을 신었다. 울 듯 말 듯 붉어진 얼굴은 차에 타자마자 터져버렸다. 울음이 터졌다.
엄마 나 팔에 뭐 났어. 으아아아아아아앙!!!!!
아이는 아까부터 계속 오른팔을 붙잡고 있었다. 소매를 걷어 확인해보려 해도, 카디건을 벗어 보라고 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빨간 게 생겼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건드리지 못하게 자꾸만 몸을 돌려버렸다.
집에 들어와서도 아이의 기분은 진정되지 않았다. 땀과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에 머리카락은 미역처럼 찰싹 붙어버렸고, 카디건은 절대 안 벗겠다며 의문스러운 오른팔을 붙잡고선 등을 돌려 앉았다.
알겠어. 기분 괜찮아지면 엄마가 도와줄 테니까 그때 엄마 불러.
실컷 울고 난 뒤 아이는 나를 찾았다. 땀으로 눅눅해진 카디건을 벗고 오른팔을 살폈다. 땀띠로 보이는 빨간 반점이 팔꿈치 아래로 넓게 퍼져있었다.
혹시 유치원에서 이거 한 번도 안 벗었어?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야 말문을 열었다.
카디건이 마냥 좋았던 아이는 입은 채로 신나게 뛰어놀았다. 그러다 팔이 간지러워서 봤는데 빨간 게 갑자기 나 있어서 덜컥 겁이 났고, 더워도 무서워서 벗지를 못했던 거였다. 땀띠를 난생처음 본 순간 얼마나 놀랬을까. 유치원에 있는 내내 마음 졸였을 모습이 눈에 그려져 짠하고 안쓰러웠다. 아이를 씻기고 연고를 듬뿍 발라주었다. 자고 일어나니 다행히 땀띠는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날 이후로 아침이 평화로워졌다. 의도치 않게 휴전 상태가 되었다.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아이의 패션 철학이 조금은 느슨해졌고 내가 골라준 옷을 별 말없이 입는다. 본의 아니게 그날의 땀띠가 아이에게 옷을 제대로 입어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었다.
아이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왠지 오늘따라 마음이 가는 옷과 립스틱, 향수를 입고 외출하면 기분이 상쾌하다. 아이도 나와 같을 거라 생각한다. 이왕이면 좋아하는 옷과 머리핀을 하고서 유치원에 가면 선생님이 읽어주는 책이 귀에 더 쏙쏙 들어오지 않을까. 밥도 더 맛있고 놀이도 훨씬 신이 나고.
그렇게 기분 좋은 아침을 열어주는 엄마가 되고 싶다. 일곱 살의 감성을 존중하는 작은 여유만으로도 아이의 하루는 달라진다.
요즘은 같이 쇼핑한다. 예전엔 내가 사온 옷을 맘에 들어하길 바랐지만 이젠 머리핀부터 옷, 신발, 양말까지 함께 고른다. 이건 어떤지 물어보면서 서로의 취향이 만나는 옷을 찾는다. 기특하게도 아이는 떼쓰지 않고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 그 모습이 고맙고 예쁘다.
유치원 가기 전, 아이는 거울 앞에 서서 부지런히 단장을 한다. 더듬이처럼 앞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내게 어떠냐고 묻는다. 90년대 걸그룹을 떠올리게 하는 머리를 하고서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묻는다. 나름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 그 어설픈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터진다.
오늘도 예쁘다는 나의 대답에 신이 난 아이의 발걸음이 가볍다. 아이의 싱그러운 미소가 아침을 산뜻하게 물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