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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피늄 Mar 18. 2020

시인의 마음처럼 산다면

창작과 비평 봄호 <시> 리뷰


계간지 <창작과 비평>을 읽고 감상을 쓰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다양한 글을 읽고 쓰며 깊이 사유하는 시간을
이곳에도 기록하려 한다.



얼마 전 도서관에서 우연히 공광규 시인의 <흰 눈>을 읽고 시의 매력에 푹 빠졌다.

시인의 눈과 마음처럼 산다면, 평범한 일상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시가 좋아졌다.


<창작과 비평> 봄호에는 다양한 형식과 주제를 품은 시 24편이 수록되어있다.


시의 은유가 아직 어렵지만, 시를 향한 관심만큼은 자신 있는 내게 ‘시’ 란은 아주 반가운 페이지였다.

시집을 선물 받은 것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나는 사랑이 끝난 몸을 아무렇게나 던져둔다

물병을 물로 씻는 건 당연한 일인데
사랑이 끝난 몸은 사랑으로 헹궈낼 수 없고

지구는 선택되었다고 한다
아무도 거리로 나와 사랑을 외치지 않으면서
오로지 지구에서만 사람이 살 수 있다고

나는 텅 빈 소행성이고
지구에는 물과 사람과 사랑이 가득하다


류휘석, ‘거울에는 내내 텅 빈 것이 비치고’ 중에서


이별  공허한 마음을 지구와 동떨어진 ‘텅 빈 소행성’으로 표현한 점이 인상 깊었다.

수록된 시 중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맴도는 시였다.



칸칸마다 청구서처럼 입주한 사람들 규격 속에 들어가면 안심이야 도시는 가로수를 세로로 세운다 안구 돌출한 가로등을 심는다 공단 위로 매연을 마시고 양순해진 구름이 떠다닌다

내 잠과 네 잠 사이를 회유하는 귀신고래 등 위에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들러붙은 꿈들 내 불안과 네 불운을 가로지르며 부침하는 섬들


서영처, ‘도시의 규격’ 중에서


쉼표와 마침표가 생략된  시의 호흡처럼 숨 가쁘게 돌아가는 도시의 이면이 떠오른다. 단어의 나열에서 느껴지는 영세하고 고단한 이면. 그래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꿈을 안고 도시의 밤을 밝힌다.



이윽고 더 가까워져 보니
새끼 염소 한 마리,
염소를 따라
작은 노인이 오는 것이었다

천천히 오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염소와 노인이 당도하자
마을의 저녁이 순해졌다

성명진, ‘어느 외지’ 중에서


어스름한 저녁. 어느 외진 시골길.

염소와 노인은 느릿느릿 집을 향해 걸어간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밥 짓는 냄새.


마을의 저녁이 순해졌다


이 한 문장 안에 시골의 고요한 풍경이 담겨있다.

이게 바로 시의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느리게 흘러가고 생활이 단순해져 버렸다.


무기력해지기 쉬운 요즘, 시를 읽으며 일상에 산뜻한 생기를 주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시는 수많은 말을 삼키고 삼켜 단 한 줄로, 한 단어로 혹은 공백으로 읽는 사람의 마음에 꽃을 피운다. 때론 먹먹한 비를 내리기도 하고.


깊은 사색에 잠기게 하는 시.

아름다운 시를 가까이 두고 시인의 마음처럼 일상을 채워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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