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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피늄 Dec 04. 2019

시들어버린 평원에서 꾸는 꿈

옌롄커, 딩씨 마을의 꿈



p.79

딩씨 마을은 피를 팔면서 점차 피에 미쳐갔다.
평원에서 피를 팔면서 피에 미쳐갔다.
십 년 후에는 하루도 쉬지 않고 내리는 궂은비처럼 열병이 쏟아져 내렸고, 피를 팔았던 사람들은 모두 열병에 걸렸다. 열병에 걸린 사람들은 개가 죽은 것처럼, 개미가 죽은 것처럼 그렇게 죽어 나갔다.

나뭇잎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등불이 꺼지자 사람들은 이 세상을 떠났다.



홰나무 아래 잠시 누워 피 한 병 뽑고 나면 백 위안 지폐가 손에 쥐어진다. 피는 샘물과 같아서 팔면 팔수록 더 많아지며, 이미 이웃 마을 사람들은 피를 팔아 번 돈으로 서양식 주택을 지어 살고 있다는 딩후이의 외침은 피를 뽑고 나서 마시는 설탕물 같았다. 힘들게 농사를 지으며 근근이 살아가는 딩씨 마을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달콤한 제안이었다.


딩씨 마을의 모든 비극은 딩수이양의 장남 딩후이로부터 시작된다. 돈 냄새를 잘 맡는 딩후이는 언제나 마을 사람들 머리 위에 앉아있었다. 딩후이의 검은 속내를 알아차리기엔 아직 세상 물정에 어두운, 너무나 순박한 마을 사람들이었다.



p.38

그때 딩후이는 채혈을 하면서 약솜 하나로 세 사람의 팔을 닦았어요. 약솜 하나로 아홉 번을 문지른 셈이지요. 지금은 그런 말을 해도 소용없지만요. 솜 하나로 아홉 번이나 문지르는데도 저는 매번 딩후이에게만 피를 팔았어요. 모두들 그에게 피를 팔았지요. 그에게 피를 팔았는데 지금은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저와 이야기하는 걸 꺼려요.
이제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게 되었지만요.
다 지나간 일이에요.



결국 딩씨 마을에는 열병이 폭발했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절규 속에서 딩수이양은 홀로 마을을 지킨다.

죽기 전 사람들 앞에서 창 몇 가락 부르고 싶다는 마샹린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딩수이양은 삼백 명에 가까운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그를 위한 무대를 만들어준다. 관인을 찾지 못해 눈도 못 감고 죽은 촌장 리싼런을 위해 새로 판 도장과 인주를 그의 관 속에 넣어주고 명복을 빈다.

어차피 죽을 몸, 하루를 살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다는 딩량과 링링을 간통이라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로부터 지켜준다.


이는 모두 아버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장남 딩후이의 끝없는 계략에 희생당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사죄하는 심정으로, 아들을 잘못 가르친 죄인의 심정으로 하루하루 묵묵히 살아가는 딩수이양이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타고난 딩후이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아무도 그를 이길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을 밟고 올라선 그는 열병위원회의 주임 자리에 앉았다. 그는 피를 뽑아 번 돈으로 호의호식을 누리며 살았고, 그에게 피를 판 사람들은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끝에서 억울함에 몸부림쳤다.


그 한가운데 딩수이양이 있었다.


그는 딩씨 마을의 어른이자 딩후이의 아버지였다. 휘몰아치는 열병의 소용돌이 속에서 딩수이양은 점점 지쳐갔다. 싱그러운 평원을 품고 있던 마을은 적막하고 쓸쓸한 묘지가 되어갔다.






옌롄커는 위화, 모옌과 더불어 중국의 3대 문호로 불리는 세계적인 작가이다. 매년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될 만큼 그의 작품은 전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지만, 정작 중국은 그를 반기지 않는다. 그의 책들은 금서로 지정되었으며 <딩씨 마을의 꿈>도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판금조치가 내려졌다.

그리고 이 책을 낸 중국 출판사는 옌롄커를 고소했다. 국가의 명예를 손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출판사에 거대한 정치적, 경제적 손실을 끼쳤다는 이유로 그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딩씨 마을의 꿈>은  중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에이즈 집단 발병 사태를 다루고 있다.

1990년대 중국 공산당이 ‘혈장 경제 사업’을 시행했고, 허난성에서 수많은 농민들이 ‘피를 팔아 부자가 되자’는 이 운동에 동참했다.

당시 위생 개념이 부족했던 탓에 헌혈 바늘을 여러 번 사용하는 일이 잦았고, 혈장을 빼낸 나머지 혈액을 다시 주입시키는 과정에서 수백 명의 피가 한데 섞이는 바람에 에이즈가 급속도로 번졌다. 허난성은 지금까지도 ‘에이즈 마을’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한 채 빈곤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옌롄커는 <딩씨 마을의 꿈>에서 중국이 감추고 싶어 하는 그늘진 사회의 민낯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한편 죽음과 인생의 희로애락을 서정적인 문체로 애절하게 그려냈다.



<딩씨 마을의 꿈>은 현실을 쓴 것인 동시에 꿈을 쓴 것이고, 어둠을 쓴 것인 동시에 빛을 쓴 것이며, 환멸을 쓴 것인 동시에 여명을 쓴 것입니다.
제가 쓰고자 한 것은 사랑과 위대한 인성이었고, 생명의 연약함과 탐욕의 강대함이었습니다.

-첫 페이지, 한국 독자들께 드리는 글 중에서






책을 덮는 순간, 어지러운 꿈속을 헤매다 깨어난 것 같았다. 가슴이 먹먹했다.  붉은 노을이 지는 평원과 밤바람을 타고 퍼지는 붉은 피의 냄새. 모든 것이 메말라버린 마을의 적막한 공기가 한동안 내 주위를 맴돌았다.


이 책을 시작으로 옌롄커의 작품들을 하나씩 읽어 볼 생각이다. 책의 첫 페이지를 여는 글, ‘비상을 다투는 새의 울음’이라는 제목처럼 그의 글은 비상을 쟁취하기 위해 어떻게 울부짖고 있는지 궁금하다.


<딩씨 마을의 꿈>은 아름답고 몽환적인 문장으로 어두운 현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이기적인 자본주의 앞에 무너지는 인간의 존엄성을 작가만의 섬세한 감각으로 이야기한다.


책을 읽는 내내 모든 것이 소중했다.

소설이 주는 묵직한 감동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던, 그 고요한 시간들과 여운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다행히 그날 밤, 또 비가 내렸다.

그 쏟아붓는 것 같은 소나기 속에서 할아버지는 드넓게 펼쳐진 평원 위에 한 여인이 손에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버드나무 가지에 진흙을 묻혀 높이 흔들고 있었다. 한번 흔들자 땅에 수많은 진흙 인간들이 생겨났다.
다시 한번 진흙을 묻혀 흔들자 또다시 땅 위에 수천수백의 진흙 인간이 생겨났다.

쉬지 않고 진흙을 묻혀 쉬지 않고 흔들어댔다. 땅 위에 온통 진흙 인간들이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진흙 인간은 비 오는 땅에 물방울만큼이나 많았다. 할아버지는 새롭게 펄쩍펄쩍 뛰기 시작하는 평원을 보았다.

새롭게 펄쩍펄쩍 뛰는 세상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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