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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피늄 Apr 11. 2020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

창작과 비평 봄호 <소설> 리뷰




인스타그램 속 사람들은 언제나 밝고 활기차다.

빛나는 일상의 순간을 기록하는 것이 SNS의 당연한 기능이지만, 때론 공허해진 마음의 틈 사이로 불편한 허상이 비집고 들어오기도 한다.






소설 속 승아는 친구 민영의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충동적으로 뉴욕 여행을 결심한다. 새로 이사 갈 집에 페인트칠을 하는 사진 속 민영의 모습은 여유로워 보였다. 뉴욕은 월세도 비쌀 텐데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 민영의 모습이 승아를 자극했다.


승아는 다음 주면 계약직이 끝나고 회사를 나와야 한다. 2년 동안 부은 적금도 이젠 유지할 능력이 없으니 어차피 깨야 했고 그 돈으로 뉴욕에 다녀올 생각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JFK공항에 도착한 승아.

마중 나온 민영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지만 어째서인지 돌아오는 대답이 건조하다. 인스타그램에서 보았던 민영의 활기찬 얼굴과는 달리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승아의 눈에 보이는 뉴욕은, 더 이상 화려한 도시의 낭만을 품은 곳이 아니었다. 상상과는 다른 모습에 실망했고 음식도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예민해 보이는 민영이 자꾸 신경 쓰인다. 사소한 일로 말다툼까지 오갔다. 승아는 항공사 홈페이지에 돌아가는 일정을 앞당길 수 있는지 문의글을 남기고 불편한 잠을 청한다.



p.186

조금씩 어두워져 가는 실내에서 승아는 자신이 왜 커튼조차 열 수 없는 이국의 낯선 방에 혼자 앉아 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떠나오기 전 그녀는 주변의 모든 것이 자신을 밀어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떠나온 지금은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아는 사람인 민영에게 거부당하는 기분이었다.






멀리 뉴욕까지 와준 친구 승아가 무척 반갑고 고마웠다. 하지만 거기까지일 뿐 민영은 지금 마음에 여유가 없다. 부푼 기대를 안고 이곳에 온 승아에게 혼란스러운 자신의 속마음을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앞만 보며 달려온 민영에게 마이크는 큰 힘이 되어준 남자였다. 외롭고 고단한 민영에게 먼저 따뜻한 손을 내밀어주었고, 그런 마이크와 가까워지면서 민영은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다.


동료였다가 어떤 날은 연인 같기도 한,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어이없는 사건으로 어느 날 갑자기 사이가 멀어져 버린다. 마이크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허탈하고 우울한 감정 속으로 민영은 무겁게 가라앉는다.



p.194

조금씩 뒷걸음질 치던 마이크가 그 벽 뒤의 자기가 속한 세계로 퇴장해버린 느낌마저 들었다.
그동안 마이크에 대해 안다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 또한 마이크와는 다른 나의 사고체계 안에서의 자의적인 해석이었을까.

민영은 하루 종일 자신과 마이크를 가르는 사고방식의 차이를 생각했고 한편으로 마이크가 다시 전화를 걸어 오리라는 기대를 밤늦게까지도 포기하지 않았다.

연락은 끝내 없었다.






같은 공간과 시간 속의 사람들. 그들 각자의 생각을 세밀하게 그려낸 이야기를 좋아한다.


<창작과 비평> 봄호에 수록된 은희경 작가의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는 그런 내 취향에 딱 맞는 소설이었다.


승아와 민영에게서 내 모습이 얼핏 보였고, 친구와 나눴던 대화들이 문득 떠올랐다.

20~30대의 고민과 현실이 섬세한 문장으로 그려져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붉은 구름이 퍼져가는 노을 진 하늘 아래, 승아와 민영이 나눈 대화가 인상 깊었다.



p.215

여기서 오래 혼자 살다 보면 그냥 친절한 건지 특별한 감정인지 잘 구별 못하게 돼. 자기들끼리 선을 그어놓고 그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보이려는 사람들이 좀 있거든.

그건 어디 살든 마찬가지 아냐? 승아가 대꾸했다. 다음 순간 승아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그럴 때면 말이야. 왜 얼마 동안 어디에를 생각해봐. 거기에 대답만 잘하면 문을 통과할 수 있어.

민영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겨 있는 눈치였다. 둘은 묵묵히 강 건너를 바라보며 샌드위치를 씹었다.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무엇이고, 얼마 동안이나 여기에 머물러야 하는 걸까.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면, 어디를 향해 걸어가야 할까.


승아와 민영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곳 뉴욕에서 찾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저 흘러가는 대로 욕심 없이 순응하며 살아온 승아는 점점 현실에 지쳐갔다. 그런 승아에게 뉴욕은 새로운 문이 열려있는 곳처럼 느껴졌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현실을 훌훌 털어버리고 개운한 마음으로 다시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의 기대와 뒷바라지를 져버릴 수 없었던 민영은 안간힘을 쓰며 뉴욕에서의 생활을 이어간다.

인스타그램의 이면처럼, 누군가에겐 부러움의 대상이었을지 몰라도 현실은 달랐다.

마이크와 멀어진 것은 단순히 남녀관계의 문제가 아닌, 이곳 사람들에게 거부당한 것 같은 깊은 상처로 남았다.



p.216

노을이 사라진 하늘과 강에는 어둠이 깔려 있었다. 강 건너편 건물들은 마지막 빛에 의지하여 검은색 조형물처럼 변하더니 어둠이 더 깊어지자 점점 화려한 불빛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불빛의 그림자가 강물에 반사돼 어둠을 밀어내듯 더욱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었다.

근데 저기 건너편은 어디니? 승아가 물었다.

맨해튼.
여기에서 보아야 한눈에 볼 수 있어. 가까이 가면 너무 크니까.

승아는 머릿속으로 이 도시에서 남은 시간을 헤아렸다. 이틀은 더 맨해튼을 볼 수 있었다.



강 건너편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맨해튼은 마치 이상향의 ‘상징’처럼 더욱 아름답게 반짝인다.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나는 그곳.


왜 얼마 동안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고요히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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