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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폴 Oct 19. 2020

유전자가 말한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은 차이가 있지

     - 모피어스, 영화 <매트릭스> 中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는 ‘프리크라임’이라는 최첨단 범죄예방 시스템이 등장한다. 선천적으로 예지능력을 타고난 세 명의 아이들이 살인을 저지를 사람과 발생장소를 영상으로 비춰주면 체포 요원들은 신속히 현장으로 출동하여 살인 직전에 범인을 검거하는 방식이다. 예측력이 백 퍼센트에 달해 머지않아 예측시스템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프리크라임의 특수요원 팀장인 존 앤더튼이 프리크라임에 의해 살인범으로 지목된다. 분명코 시스템 오류라고 생각한 앤더튼은 누명을 벗으려고 경찰의 추격을 피해 도망친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예지자들이 화면으로 범행 장소라고 지목한 곳에 도착한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던 사람은 6년 전 자신의 아들을 납치한 범인이 아닌가?  납치범으로부터 아들을 살해한 과정에 대해 듣던 앤더튼은 분노에 휩싸여 미친 듯이 그를 가격한다. 드디어 존의 총구는 서서히 아들의 원수를 향해 움직인다. 이제 방아쇠를 당기면 모든 것이 예언대로 될 터였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예정된 시간이 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총성은 울리지 않는다. 앤더튼이 자신에게 예정된 운명을 거부한 것이다. 그런데 예언이 빗나간 것처럼 여겨지던 바로 그 순간 범인이 총구를 자기 배로 끌어당기고 앤더튼은 실수로 총을 발사하고 만다. 기어코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앤더튼에게 선택권이 있을까? -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


마지막 순간 존 앤더튼이 마주한 문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둘러싼 딜레마이다. 프리크라임은 어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살인이 발생하고야 만다는 철저한 인과율을 따른다. 큐를 떠난 당구공이나 시위를 떠난 화살이 도달할 곳은 이미 큐와 시위를 떠나는 순간에 정해진다. 마찬가지로 예지자들에 의해 무슨 이유에서든 살인범으로 지목되면 운명과 같은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물론 살인행위에 착수하기 직전에 경찰이 현장에 도착하여 체포되기 때문에 살인에 이르지는 못한다. 하지만 일단 살인범으로 지목된 사람은 살인죄로 처벌을 받는다. 경찰이 저지하지 않았다면 어차피 살인을 저질렀을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살인범이나 마찬가지다.

  

영화 속 살인범들은 살인이라는 운명의 굴레를 결코 스스로 벗어던지지 못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는 선택을 할 만한 자유의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프리크라임의 범죄자 예측에 대한 전적인 신뢰에는 이러한 결정론적 인간관이 전제되어 있다. 앤더튼은 스스로가 살인범으로 지목되기 전까지는 결정론적 인간관을 철저히 신봉하던 인물이다. 그런데 아들을 죽인 원수를 눈앞에 두고 자신의 신념이 시험대에 오른다. 방아쇠를 당길지 말지 선택의 기로에 서서 앤더튼은 고뇌한다. 방아쇠를 당겨 원수를 죽이고 프리크라임의 무오류성을 입증할 것인가? 그리하여 자신도 결정론이 지배하는 세계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총구를 거두어 프리크라임의 예언을 정면으로 반박할 것인가? 살인자의 운명을 의지로 바꿀 것인가? 

  

그런데 보다 근본적인 질문은 따로 있다. 애초부터 그에게 이러한 선택권이 있기나 한 것일까? 만약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이 어떤 외부 요인에 의해 미리부터 정해져 있다면 선택을 위한 우리의 고민은 무의미한 정신력 낭비에 불과할 것이다. 요즘 말로 ‘답정너’. 이미 정답은 나와 있으니 그냥 우리는 그 답에 맞추어 행동하면 될 뿐일 것이다.



자유의지는 있다? 없다!


자유의지와 결정론을 둘러싼 철학적 논쟁은 해묵은 숙제와 같다. 그럼에도 여전히 명확한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 논쟁은 인간이란 존재를 어떻게 규정지을 것인가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자아를 구성하는 요소 중 이성의 역할을 중심에 두고 있다. 예를 들어, 갈증을 느끼는 한 남자가 있고 그의 앞에는 물이 담긴 그릇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물속에는 독이 들어 있으며 그 남자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자아의 한 편에서는 물을 마시라고 하고 다른 편에서는 물을 마시지 말라고 한다. 플라톤은 비합리적이고 욕정적인 측면의 자아인 전자가 이성적 자아인 후자에 의해 잘 통제되어야 독이 든 물을 마시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데카르트에 이르면 정신과 신체는 심신 이원론에 따라 더욱 엄격히 분리된다. 데카르트는 의심하고 또 의심한 끝에 가장 확실하고 의심할 여지없는 진리, 즉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신체를 통해 전달되는 감각적 경험은 우리를 쉽게 기만하기 때문에 결코 인식의 토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직 ‘생각하는 나’만이 인식의 주체이자 존재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여겼다. ‘코기토 에르고 숨’. 인간은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고, 생각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본질적으로 나의 신체가 아니라 나의 정신이다. 정신으로서 나는 특정한 신체에 우연히 귀속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설사 내가 나의 신체로부터 분리된다 할지라도, 혹은 내가 다른 신체에 귀속된다 할지라도 여전히 ‘나’ 일 것이다. 

- 르네 데카르트

  

데카르트의 주장을 따르면 물질로 이루어진 신체는 한낱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 대신 정신이 나의 본질이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신체의 정념들을 자유롭게 지배하고 신체를 움직이게 만든다. 데카르트는 인간이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때 완벽함에 도달할 가능성이 열린다고 보았다. 인간이 도덕적인 주체가 될 수 있는 것도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행위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조건이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있다. 육체적 욕구와 본능을 좇아 행동하는 동물에게 도덕적 판단이 무의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데카르트의 주장은 칸트(Immanuel Kant)에 의해 계승되어 의무론적 도덕철학의 토대가 된다. 칸트는 인간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은 이성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능력이야말로 인간과 동물을 구별 짓는 기준이다. 도덕성은 인간이 선하고자 하는 의무감을 가지고 행동하였는가의 문제이다. 행위의 결과에 상관없이 욕망과 충동을 누르고 옳은 행위를 선택하고자 하는 의지, 즉 ‘선의지’가 있었는지가 도덕성을 판단하는 데 결정적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는 반란군 지도자 모피우스로부터 그동안 몰랐던 세상의 감추어진 진실에 대해 듣게 된다. 현재 인류는 AI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으며 여태껏 실재라고 믿었던 세계가 사실은 매트릭스라고 불리는 가상현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뇌는 AI가 만든 프로그램에 의해 조종되고 있으며 컴퓨터를 위한 에너지원이 되어 노예처럼 살고 있는 게 현실세계다. 모피우스는 이 모든 사실을 말한 후 네오에게 색이 다른 두 개의 알약을 내밀며 선택을 요구한다. 빨간약을 먹으면 매트릭스 밖의 세상으로 빠져나와 자유의 몸이 된다. 만약 파란 약을 먹게 되면 매트릭스 속으로 돌아가 예전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아가게 된다. 네오의 최종 선택은 빨간약이었다. 

  

매트릭스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박탈된 세계이다. 생각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나의 의지와는 무관한 세계다. 매트릭스 속에서 내가 하는 모든 선택은 사실 무의미하다. 직업을 고르고 배우자를 선택하는 행위조차 결국 나의 선택이 아니라 프로그램의 아웃풋에 불과하다. 영화 속 네오의 빨간약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상징한다. 그는 빨간 약을 먹음으로써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 매트릭스 세계를 벗어나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이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정말 우리의 모든 행위가 자유의지에 속한 걸까? 얼핏 생각하면 뻔한 질문처럼 보인다. 내가 지금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 때 나의 자유의지에 의하지 않았다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우선 휴대폰을 집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이런 의지가 뇌로 전달되면 뇌는 운동신경을 통해 팔에게 휴대폰을 집으라고 명령할 것이다. 그런데 일찍이 이러한 상식을 뒤엎는 실험 결과가 나와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198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심리학자 벤자민 리벳(Benjamin Libet)은 실험 참가자들을 둥근 시계 앞에 앉히고 자신이 원하는 순간에 앞에 놓인 버튼을 누르라고 시켰다. 그리고 버튼을 누르려고 마음먹은 시간을 기록하도록 했다. 사람들의 머리에는 대뇌의 움직임을 측정하기 위한 장치가 부착되어 있었다. 만약 인간 행위가 자유의지의 결과라면 버튼을 누르겠다고 마음을 먹은 뒤 뇌에서 반응이 일어나고 그다음에 버튼을 누르는 행위가 뒤따르는 것이 옳다. 그런데 수차례 반복 실험을 통해 버튼을 누르려고 마음먹기 0.3초 전에 이미 뇌에서 반응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혹시 그동안 뇌가 자유의지의 지시를 받고 있지 않았던 것인가? 어쩌면 우리가 자유의지라고 믿어왔던 것이 한낱 허상이거나, 기껏해야 뇌의 명령을 받은 정신작용에 불과한 것인가? 

  

사회계약론으로 잘 알려져 있는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는 유물론적 인간관을 제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홉스에 의하면 인간 정신은 신체의 반영이고 신체는 기계와 같다. 생각이란 것도 그저 두뇌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 기계는 신체에서 비롯된 욕망을 가지며 그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존재라는 점에서 다른 일반적인 기계들과 차이가 날 뿐이다. 일단 인간에게서 자유의지라는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기고 나면 이제 남은 것은 발가벗겨진 신체뿐이다. 물질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자연스럽게 자연세계에 포섭되는데 자연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은 인과율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각과 행동은 자유의지나 선택과는 무관하며 원인에서 비롯된 결과일 뿐이다. 철학자 스피노자(Benedito de Spinoza)는 아직까지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인간들의 무지를 다음과 같은 말로 지적한 바 있다. 


인간이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 즉 자신의 자유의지로 어떤 일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견은 단지 그들이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의식하면서도 자신들을 결정한 원인들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것의 표시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자유의 관념은 단지 자신들의 행동의 원인에 대한 무지일 뿐이다. 그들은 물론, 인간의 행동은 의지에 의존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대응하는 관념이 없는 말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는 의지가 무엇인지, 의지가 어떻게 신체를 움직이는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인간은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하고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 그들의 의지를 결정하는 어떤 외적 원인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무언가 욕망하고 그것을 자유롭게 추구한다고 여기지만 욕망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의지는 인간 행동의 인과성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착각이며 실체 없는 가공의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빨간 옷의 금발 여인과 네오와의 만남 - 영화 <매트릭스>

  

영화 <매트릭스> 속 네오는 모피우스를 따라 매트릭스 체험 프로그램 속으로 들어간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빨간 옷의 매력적인 금발 여인에게 순간적으로 마음을 빼앗긴 네오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훈련을 마치고 전투함으로 돌아온 네오에게 반란군 멤버 중의 한 명이 다가와 자신이 빨간 옷의 금발 여인을 디자인했다는 이야기를 자랑삼아 늘어놓는다. 빨간 옷의 금발 여인과 네오와의 만남은 프로그래머가 미리 짜 놓은 각본에 불과했던 것이다. 여인이 흘리는 미소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고개를 돌리면서 네오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의지에 따른 선택적 행동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 네오의 그러한 행동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단지 그 순간 네오만이 그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  



나쁜 피


왜 인간은 범죄를 저지를까? 중세시대에는 구약성경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담과 이브처럼 사탄의 유혹에 빠지거나 악한 영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다고 믿었다. 그래서 세속적인 범죄 crime과 신앙적인 죄 sin을 같은 것으로 취급했었다. 그러다가 근대시대로 넘어오면서 데카르트의 인식론과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인간은 이성적 주체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러한 지적 풍토 속에서 범죄도 행위에 수반되는 쾌락과 고통의 양을 합리적 사고 과정을 거쳐 계산한 결과물로 해석되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중세시대의 신학 중심, 근대 초기의 법학 중심 범죄학은 19세기에 이르러 대대적인 변화를 겪는다. 실증주의와 만나면서 과학의 분야로 탈바꿈한 것이다. 실증주의는 모든 현상에 원인이 있다는 인과론과 과학적 방법으로 이러한 원인을 밝힐 수 있다는 과학적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과학으로 변신한 범죄학의 최우선 과제는 범죄의 원인을 찾는 것이었다. 범죄학자들의 일차적 탐색 대상은 인간의 몸이었다. 그리고 범죄 원인을 찾기 위한 원정대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 이탈리아 법의학자 체사레 롬브로소(Cesare Lombroso)였다. 


롬브로소는 교도소에 수감된 범죄자들의 신체적 특징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강도를 저지르고 복역 중이던 한 늙은 재소자가 교도소 내에서 병으로 사망하자 그의 두개골을 열어보게 되었다. 그런데 척수와 뇌가 만나는 연결부위에서 의외의 발견을 한다. 여우 원숭이과 동물의 뇌에서나 발견되는 직경 2~3센티미터 정도의 동공이 있었던 것이다. 훗날 롬브로소는 발견 당시의 놀라움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그저 하나의 생각이 아니라 계시였다. 그 두개골을 보는 순간 나는 불타는 하늘 아래 펼쳐진 광대한 평원처럼 돌연 모든 것이 밝게 빛나는 것 같았다. 범죄자의 본성은 바로 원시적인 인간성과 열등한 동물의 잔인한 본성이 범죄자에게 재현된 귀선유전 현상이었던 것이다.

- 체사레 롬브로소


롬브로소는 범죄자들의 신체에는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열등한 특징들이 발견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범죄는 일종의 유전적 퇴행현상과 다르지 않았다. 생래적 범죄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적 특징에는 두꺼운 두개골, 유달리 돌출한 안면부, 그리고 낮고 좁은 이마, 긴 팔, 뛰어난 시력, 큰 귀 등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특징들을 조합해보면 어렵지 않게 머릿속에 원숭이를 떠올리게 된다. 사실 롬브로소는 성매매 여성의 발이 원숭이를 닮았고 그 때문에 엄지와 검지 발가락 사이가 벌어져 있어서 발로 쉽게 물건을 집을 수 있다는, 상식적으로 믿기 힘든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어쨌든 롬브로소는 범죄자를 인간과 원숭이의 중간 어딘가에 위치한 존재쯤으로 여겼다. 

  

롬브로소가 제시한 전형적 범죄자의 신체적 특징들은 후대 범죄학자들에 의해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연구방법에 있어서 결정적인 결함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인들 사이에는 여전히 특정 외모를 지칭하는 ‘범죄형’이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영화나 드라마의 악인 역할을 캐스팅할 때도 보편적인 ‘범죄형’ 이미지가 자연스레 반영된다. 심지어 영화 <관상>에서는 얼굴 생김새만 보고도 살인범과 탐관오리를 분별할 수 있는 천재 관상가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타고난 범죄자의 외관상 특징이 단지 사람들의 편견 혹은 영화적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2008년 뉴질랜드 오타고대학교의 연구진은 비행청소년들에 관해 아주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발표한다. 연구진은 뉴질랜드 태생 남자와 여자 일천 여 명을 출생 시점부터 청소년이 될 때까지 추적조사하였다. 그런데 청소년기에 이르러 반사회적 행동 경향성을 보인 청소년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몇 가지 신체적 특징이 발견되었다. 다른 청소년들과 비교해 귀가 좀 더 아래쪽에 위치해 있거나 혀에 주름이 더 많이 잡혀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세 살 때부터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체적 특징들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연구자들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아기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어떤 부정적인 요인으로 인해 신경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거나 장애가 있는 경우 발생하는 특징들이라고 한다. 

  

사실 롬브로소의 주장이 있기 전에도 선대의 범죄성이 후대로 전해질 거라는 믿음은 항상 존재해왔다. 외모와 성격이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전해지듯이 범죄 기질 역시 유전되리라 추측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데 롬브로소의 연구는 사람들에게 대대손손 범죄자의 피가 흐르는 집안에 대한 상상을 자극했다. 과연 살인자의 가문은 존재할까? 

  

심리학자 헨리 고다드(Henry H. Goddard)는 자신의 연구실에 있던 정신장애여성 데보라 칼리카크(가명)의 가계를 조사했다. 데보라의 5대 선조 마틴 칼리카크는 미국독립운동에 참전한 영웅으로 퀘이커교도 여성과 결혼한 후 자손들로부터 존경받으며 풍요로운 삶을 살다 간 인물이었다. 그런데 데보라는 퀘이커교도 여성의 혈통을 이어받지 않았다. 결혼 전 마틴 칼리카크는 우연히 들른 술집에서 정신장애가 있는 여자 종업원을 만나 하룻밤 사랑을 나누게 되는데 이때 계획치 않게 임신을 하게 된다. 이런 사실을 모른 채 마틴 칼리카크는 나중에 좋은 집안의 여성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이와 같이 우연적 만남으로 인해 유전나무가 두 개의 가지로 갈라져 뻗어왔던 것이다. 고다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마틴과 법적 아내 사이에서는 총 490명의 자손이 생겨났고 모두 정상인이었다. 반면에 정신장애여성 사이에서 생겨난 자손 480명 중 정상인에 속한 사람은 불과 46명이었다. 나머지는 범죄자, 정신장애인, 알코올 중독자 등이었다. 데보라는 바로 술집 여자 종업원, 즉 ‘나쁜’ 가지에서 생겨난 자손이었던 것이다. 


살인자 할머니의 유전자는 손녀에게로 - 영화 <나쁜 종자>

  

영화 <나쁜 종자>는 범죄 유전을 더욱 확정적으로 묘사하는데 그 양상은 끔찍하기까지 하다. 여덟 살 로다는 천사 같이 예쁜 미소를 가진 소녀이다. 예의 바르고 싹싹한 성격 탓에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로다는 분통을 터트린다. 글짓기 대회에서 일등을 빼앗겨 갖고 싶던 메달을 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로다는 학교 소풍에서 일등 한 친구를 일부러 물에 빠뜨려 죽인 뒤 기어코 원했던 메달을 차지한다. 나중엔 자신의 범행을 눈치챈 빌라 관리인의 거처에 불을 질러 죽게 만든다. 나중에 딸의 범행사실을 알게 된 엄마는 너무 놀라 어쩔 줄 몰라 하지만 정작 로다는 천연덕스럽기만 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범죄학자는 로다의 엄마에게 선천적으로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지도, 후회나 죄책감을 느끼지도 못하는 범죄자들에 관해 이야기를 해준다. 이런 범죄자들은 어린 나이부터 살인에 있어 천재성을 드러내는데,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 있더라도 타고난 본성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영구 실명으로 태어난 아이가 평생 앞을 못 보며 살아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중에 로다 엄마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로다 내면에 있는 원초적 악의 뿌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알고 보니 로다 엄마는 악명 높은 여자 연쇄살인범의 딸이었다. 결국 격세유전을 통해 ‘나쁜 씨’가 연쇄살인범 할머니로부터 손녀딸에게 전해졌던 것이다.


범죄학자 에이드리언 레인(Adrian Raine)은 그의 저서에서 폭력성의 유전현상을 뒷받침할만한 흥미로운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제프리 랜드리건은 미국 애리조나 주 교도소에 복역 중인 사형수였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친부모에게서 버려졌지만 마침 운 좋게 훌륭한 집안에 입양되어 양부모의 사랑 속에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주 어릴 적부터 문제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두 살 때부터 분노조절에 문제를 나타냈고 열 살이 되자 음주를 시작했으며 청소년기에는 절도와 마약 복용으로 부모의 속을 썩였다. 급기야 홧김에 친구를 칼로 찔러 죽이고 20년형을 선고받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교도소를 탈주한 제프리는 강도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우연한 계기로 인해 제프리의 친부가 아칸소 주의 한 교도소에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수로 복역 중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애리조나 교도소의 한 재소자가 제프리에게 예전에 그와 꼭 닮은 사람을 아칸소 교도소에서 만난 적이 있다는 말을 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제프리의 할아버지 역시 오래전에 편의점에서 강도를 저지르다가 추격하는 경찰의 총을 맞고 사망했다. 알고 보니 삼대에 걸친 범죄자 가문이었던 것이다. 제프리는 한 번도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었지만 폭력성은 몇 세대를 거쳐 전이되었다. 에이드리언 레인은 ‘살인 유전자’는 분명 존재하며 좋은 환경으로도 절대 극복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폭력의 유산을 물려받은 아기가 가난하고 비참한 삶으로부터 사랑으로 양육하는 훌륭한 가정으로 잘 옮겨졌지만 그럼에도 기어코 그 아기가 살인자가 되고야 마는 이 흥미진진한 자연 실험은 유전에 의해 결정되는 폭력성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에이드리언 레인 

  

칼리카크가, 제프리 랜드리건, 그리고 로다의 이야기가 단지 이례적인 사례이거나 영화에나 등장하는 얘기만은 아니다. 여러 과학적 연구들을 통해 범죄성향의 유전 가능성이 입증되어 왔다. 대표적으로 입양아 연구를 들 수 있다. 어릴 적 입양된 아이들의 범죄성은 친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일까, 아니면 양부모로부터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일까? 심리학자 사르노프 메드닉(Sarnoff Mednick)과 동료들은 14,427명의 덴마크 입양아들과 그들의 친부모 및 양부모의 전과기록을 비교해 보았다. 분석 결과 입양아들의 범죄성향은 양부모보다는 친부모 쪽에 더 가까웠다. 처벌 전과 3범 이상의 친부모를 둔 남자 입양아의 수는 전체 남자 입양아의 1%에 불과하지만 전체 범죄의 30%를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낳은 부모가 누구든지 좋은 환경만 주어지면 아이가 올바르게 자라날 것이라 믿고 아이를 입양했거나 입양을 준비 중인 부모들에게는 매우 우려스러운 결과이다. 다만 매드닉은 자신의 연구결과가 확대되어 해석되는데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는 범죄행동 속에 유전적 요소가 있다는 점에 불과하며 유전적 영향이 반사회적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 의학기술의 발달로 인체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지자 상황이 많이 변했다. 최근 들어 범죄의 생물학적 결정론에 대한 기존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점차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특히 뇌과학 분야의 눈부신 발전은 기존의 사회학 중심 범죄학 지형에 상당한 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뇌과학에서 보면 우리의 생각조차도 하나의 커다란 신경세포 덩어리인 뇌 속에서 오고 가는 전기신호에 불과하다. 사람의 생각을 신체와 엄격히 분리하고 존재의 근거로까지 격상시킨 데카르트의 입장에서는 통탄할 노릇이지만 말이다. 최근 들어 범죄의 생물학적 결정론은 뇌 결정론 쪽으로 귀결되어가는 듯하다. 이러한 입장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증거들이 점점 쌓여가면서 뇌와 범죄 간의 인과관계에 대한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법정에 선 뇌


허버트 웨인스타인은 뉴욕 맨해튼에 사는 65세 광고업자였다. 1991년 자녀문제로 말다툼을 하던 중 홧김에 아내를 목 졸라 죽인 후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시신을 12층 아파트 창밖으로 던졌다. 이 사건은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커다란 충격 속에 빠뜨렸다. 평소 모습을 생각하면 결코 그런 끔찍한 짓을 할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신검사와 신경검사를 진행했지만 모두 정상으로 나왔다. 그런데 MRI로 뇌를 스캔했을 때 놀라운 사실이 영상에 잡혔다. 뇌의 좌측 전두엽 부위 거미막에 오렌지 크기의 낭종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웨인스타인의 변호인은 낭종이 발견된 곳이 뇌에서 충동조절을 담당하는 부위인데 아내를 죽일 당시 웨인스타인은 낭종으로 인해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을 제어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웨인스타인은 살인행위에 대한 법적 책임이 없다는 주장을 폈다.

  

형벌은 행위자에게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이 있음을 전제로 부과된다. 형법에서 말하는 책임이란 쉽게 말해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행동했을 때 성립된다. 만약 누군가가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어떤 사람을 칼로 찌르라고 강요해서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형사상 책임을 면제받는다. 또한 사리분별을 전혀 하지 못하는 정신분열증 환자의 범죄행위에 대해서도 형사책임을 묻지 않는다. 분명히 행위 자체는 잘못되었지만 행위자를 비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엄격히 따져보면 행위자의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행위자의 자유의지로 인해 범죄가 발생한 게 아니다. 총을 쏜 사람이 아니라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있는 사람의 의지가 실현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신분열증 환자의 범죄행위는 행위자의 자유의지가 박탈된 상태에서 행해진 것이다. 형사책임에서 말하는 행위주체는 이성적 존재다. 데카르트의 주장을 따른다면 정신이 진짜 나이고 주인이며 신체는 정신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껍데기일 뿐이다. 따라서 자유로운 정신의 명령에 의한 행위가 아니라면 자신의 행위가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도 자연스럽게 면제된다.

  

뇌과학의 발전으로 두뇌와 범죄행위 간의 구체적인 연관성이 점점 밝혀지고 있는 중이다. 뇌 부위 중 전전두엽은 안구의 뒤에 위치하고 있으며 두뇌활동의 사령탑 역할을 맡고 있다. 특히 옳고 그름을 분간하고, 자신의 행동으로 인한 결과를 예측하고, 충동적 행동을 제어하는 능력을 담당한다. 만약 전전두엽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거나 손상을 입으면 판단능력이 떨어지고 행동조절장애를 겪거나 감정이입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잔혹한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들의 뇌기능 영상사진(fMRI)을 보면 종종 전두엽 피질 부분이 일반인들보다 활성화 정도가 현저히 낮음을 알 수 있다. 

  

편도체 역시 범죄행위와 관련성이 높다고 알려져 있는 뇌 부위다. 대뇌변연계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몬드 모양을 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기능이 정서 기억이다. 예를 들어, 끔찍한 범죄를 목격한 사람이 당시 느꼈던 공포심을 기억했다가 다음에 유사한 상황과 마주치면 과거의 두려운 감정을 소환하는 데 편도체가 관여한다. 따라서 편도체에 이상이 있으면 웬만해서는 두려움을 잘 느끼지 않는, 이른바 ‘우르바흐비테증후군’을 겪는다. 이 같은 증상이 있는 사람들은 공포영화를 봐도 감정에 별다른 동요가 생기지 않는다. 또한 타인들의 얼굴에 나타나는 기쁨, 슬픔, 놀람, 공포, 분노 등 다양한 감정을 잘 읽어내지 못한다. 

  

세로토닌 분비와 범죄행위 간의 관련성에 대해서도 이미 많은 연구들이 발표되었다. 세로토닌은 뇌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로서 모노아민 산화효소(monamine oxidase)라고 불리는 효소에 의해 조절된다. 만약 세로토닌 분비에 이상이 생기면 분노를 통제하기 어렵거나 공격적으로 행동할 위험성이 높아진다. 오래전 네덜란드의 한 의사가 아들을 낳을까 봐 출산을 두려워하는 어떤 여성을 진찰하면서 이러한 사실이 밝혀졌다. 그녀는 남편을 비롯한 시댁 쪽 남자들이 모두가 극도로 폭력적인데 자신이 낳은 아들도 그렇게 될까 봐 두렵다고 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그 집안 남자들은 평소엔 아무렇지 않다가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갑자기 이성을 잃고 극단적인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의사는 문제의 집안 남자들에 대해 유전자 검사를 실시했는데 모두에게서 공통적으로 유전적 결함이 발견되었다. 모노아민 산화효소의 유전자에 변이가 있었고 이로 인해 세로토닌이 비정상적으로 분비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뇌기능 장애를 근거로 행위자에게 형사책임이 없다는 주장은 법적으로 얼마나 타당할까? 앞서 봤던 허버트 웨인스타인의 재판에서 변호인은 웨인스타인의 뇌영상 사진을 증거로 제출하려고 했다. 그러자 담당 검사는 배심원들이 뇌영상 사진을 보게 되면 자칫 심신상실에 의한 무죄평결을 내릴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결국 검사는 웨인스타인과 플리바게닝을 통해 일급 살인 대신 이급 살인을 구형했다. 판사도 최소 형량인 7년형만을 선고하여 일정 부분 웨인스타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로써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자백한 살인자의 형량을 감경하는데 뇌 사진이 사용된 사례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뇌기능장애에 의존한 방어 전략이 재판에서 항상 성공적인 것만은 아니다. 스테펜 모블리 사건은 살인 피의자에게 모노아민 산화효소 결핍 검사를 진행한 최초의 사례다. 1991년 모블리는 피자가게에 침입해 강도질을 한 뒤 대학생 점원을 총으로 쏴서 살해한 죄로 재판을 받았다. 재판 과정에 모블리의 변호사는 모블리의 친인척 상당수가 모노아민 산화효소 유전자 변이로 인해 폭력적이고 반사회적 성향을 보일뿐 아니라 다양한 범죄를 저질러 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모블리의 범죄 또한 같은 유전적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형을 감경해달라고 재판부에 요구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와 같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전적 변이와 모블리의 행동 사이에 인과관계를 인정하기에는 아직 연구결과들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현재까지 뇌기능장애와 폭력성 간의 연관성을 입증한 많은 연구들이 발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기능장애는 무죄를 주장하기 위한 법정 증거로서 몇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첫째, 뇌영상 사진이 범행 순간 범죄자의 비정상적인 정신상태를 입증하지는 못한다. 뇌기능장애로 인한 심신상실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범행 당시에 범죄자에게 의사 통제력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쉽게 말해 평소 중증 알코올 중독자라는 사실만으로 범행 당시 만취상태였다고 주장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뇌영상 사진은 단지 범죄자가 비정상적인 뇌를 가졌고 그로 인해 남들보다 더 폭력적이라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 

  

둘째, 변호인 측이 제시하는 뇌기능장애와 폭력성 간의 과학적 증거들은 참고자료는 될 수 있지만 해당 사건의 유무죄 판단에 근거로 사용할 수는 없다. 법정에서는 일반화되고 평균화된 사건을 다루지 않는다. 모든 사건마다 고유한 개별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슷한 사건은 있을지언정 똑같은 사건은 없다. 과학적 연구를 통해 도출된 일반적인 결론을 법정에서 다루는 개별적인 사건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뇌기능장애를 가졌다고 모두가 범죄자가 되지는 않는다. 비슷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살아간다는 사실이 무죄 주장의 설득력을 약화시킨다. 



공존의 길


현대 철학자 샘 해리스(Sam Harris)는 그의 저서 「자유의지」에서 애초부터 자유의지는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자유의지라는 관념 자체를 갖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이유로 자유의지를 전제로 한 현재의 처벌 중심 범죄예방정책으로는 범죄자들을 제어할 수 없다는 점을 들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범죄행위에 대해서 그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도 온당치 않다. 그들로 하여금 범죄를 저지르게 만드는 유전자와 뇌조차도 자신들이 선택한 게 아니라 부모로부터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해리스는 강력한 처벌로 범죄를 막을 수 있다는 헛된 기대를 접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대신 범죄자들을 효과적으로 치료하고 교화할 방법을 강구할 때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이유로는 자유의지라는 관념을 포기할 때 우리가 증오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한다. 그 근거로 해리스는 9·11 테러와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비교한다. 9·11 테러는 미국인들의 마음에 엄청난 분노와 증오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때문에 수많은 생명을 희생해가면서 복수를 해야만 했다. 반면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수천 명의 생명을 앗아가고 천문학적 피해를 초래했지만 사람들은 절망하고 슬퍼할 뿐 분노하지는 않았다. 허리케인이 쓸고 간 자리에서 재건을 위한 노력들과 재발방지를 위한 조치들이 신속하게 이어졌다. 해리스에게 잔혹한 폭력범죄는 자연재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자연현상의 일부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이 범죄자들의 행위가 아무리 잔혹해도 굳이 분개해할 이유도 없고, 아무 예방 효과도 없는데 여론에 떠밀려 엄벌에 처한다고 열을 올릴 필요도 없다. 그럴 시간에 하루라도 빨리 반사회적 행동을 유발하는 유전적 결함에 대한 효과적인 치료책을 찾아내는 편이 옳다. 아무리 허리케인을 증오해 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다. 다음 허리케인 때 바다가 범람하지 않도록 더 견고한 방파제를 쌓아 올리는 게 현명한 것처럼 말이다. 

  

생물학적 결정론의 입지가 확대되는 추세 속에서 자유의지가 설 자리는 과연 어디일까? 미국 유타대학교와 피츠버그대학교의 연구진들이 실시한 한 실험 연구 속에서 해답의 열쇠를 찾아볼 수 있다. 연구진은 실험집단을 둘로 나눈 뒤 자유의지에 관해 각각 다른 입장의 글을 읽게 했다. 한 집단에게는 자유의지가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는 부정적인 내용의 글을, 다른 집단에게는 자유의지에 대해 중립적인 관점이 담긴 글을 읽혔다. 그런 다음 두 집단을 다양한 형태의 유혹에 노출시킨 뒤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했다. 아무 제약 없이 부정행위를 저지를 수 있는 조건에서 수학시험을 치르게 했을 때 자유의지가 환상이라는 글을 접한 집단에서 더 많은 부정행위가 목격되었다. 또한 시험에 대한 보상으로 봉투에서 양심껏 1달러짜리 동전을 꺼내어 가라고 했을 때에도 자유의지가 환상이라고 배운 집단이 동전을 더 많이 꺼내갔다. 

  

철학자 칸트는 인간의 도덕성을 선하고자 하는 의지로 정의했다. 원래 인간은 육체의 욕망과 충동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려는 자연적 존재다. 이런 인간이 도덕적 주체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연적 존재로서의 한계를 의지적으로 뛰어넘어 올바르게 행동하기로 선택하는 것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의지는 도덕적 행위의 필수요소다. 동시에 자유의지는 도덕적으로 살고자 하는 인간이 짊어져야 할 멍에와 같은 것이다. 그 멍에를 내려놓는 순간 사람은 자연적 존재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앞의 실험 연구는 자연적 존재와 자유의지적 존재라는 인간의 이중성을 잘 보여준다. 자유의지에 대한 관념이 느슨해진 상태로 유혹 앞에 섰을 때 사람은 금방 자연적 존재로 회귀하여 도덕성이 잘 작동하지 않는 걸 볼 수 있다.   

  

결정론을 주장하는 입장은 강한 결정론과 약한 결정론으로 나뉜다. 강한 결정론은 샘 해리스처럼 원천적으로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입장이다. 사람의 행동은 철저히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어떤 요인에 의해 지배된다고 간주한다. 반면 약한 결정론은 결정론적 관점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자유의지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 미리 결정되어 있는 부분은 행위의 동기일 뿐 최종적 선택은 행위자의 자유의지에 맡겨져 있다는 입장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도 유전자가 특정 행동을 하라고 명령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유전자는 어떤 행동을 하려는 경향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범죄에 취약한 유전적 결함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반사회적 기질이 더 강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범죄를 저지를 운명을 타고난 건 분명히 아니다. 

  

보다 설득력이 있는 쪽은 약한 결정론이다. 오늘날 생물학적 범죄학 이론도 약한 결정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사람에게서 자유의지를 완전히 박탈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매트릭스>의 네오가 결국 빨간약을 삼켰듯이 사람은 선택의 순간에서 자유의지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운명이라는 거센 파도에 휩쓸려 다닐지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선택의 열쇠를 움켜쥐려는 게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존 앤더튼을 아들의 원수 앞으로 이끈 것은 예정된 운명일지 모른다. 하지만 쉽게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원수에게 총을 겨눈 채 고뇌하는 모습에서 자유의지를 멍에처럼 짊어진 한 인간을 발견한다. 


우리는 흔히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일컬어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라고 부른다. 달리 표현하면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자유의지를 포기한 자’쯤 되지 않을까? 비록 부모로부터 결함이 있는 유전자를 물려받았고 열악한 성장배경 속에 자라났다고 하더라도 행위주체로서의 자유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한 여전히 희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참고문헌

르네 데카르트, 「성찰」, 이현복 옮김(문예출판사, 1997)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에티카」, 황태연 옮김(피앤비, 2011)

에드워드 윌슨, 「인간 본성에 대하여」, 이한음 옮김(사이언스북스, 2011)

토마스 홉스, 「인간론」, 이준호 옮김(지만지, 2009)

Adrian Raine, The Anatomy of Violence: The Biological Roots of Crime(Vintage, 2014)

Henry H. Goddard, The Kallikak Family: A Study in the Heredity of Feeble-Mindedness, (Macmillan,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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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rnoff A. Mednick, William F. Gabrielli Jr., & Barry Hutchings, B., “Genetic Influences in Criminal Convictions: Evidence from an Adoption Cohort,” Science, Vol. 224, Issue 4651(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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