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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폴 Oct 19. 2020

변하는 자 머무는 자

영화 <트레인스포팅>

다자는 일자가 되며 그래서 일자만큼 증가한다.

                                        

-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영화 <트레인스포팅>은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를 배경으로 방황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주인공 렌튼과 그의 친구 벡비, 식보이, 스퍼드는 허구한 날 술과 마약, 폭력에 찌든 채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마약 살 돈을 구하려고 절도와 강도를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골칫덩이들이다. 어느 날 차량 절도를 하다가 경찰에게 붙들린 렌튼은 법원으로부터 마약재활훈련 선고를 받는다. 하지만 금단증상을 참지 못해 또다시 마약을 하게 되고 결국 마약 과다복용으로 응급실에 실려 간다. 렌튼은 그의 부모 덕분에 간신히 마약중독에서 벗어난다. 새로운 삶을 살아보라는 여자 친구의 충고에 자극받아 런던의 한 부동산 중개회사에 취직한다. 그러나 안정적이던 그의 삶도 무장강도로 수배 중인 벡비와 마약 밀매상 식보이가 찾아오면서 막을 내린다. 식보이는 렌튼을 포함한 친구들을 마약밀매에 끌어들인다. 마약을 팔아 1만 6천 파운드라는 큰돈을 벌지만 렌튼은 이런 삶에 환멸을 느낀다. 친구들이 잠든 사이 렌튼은 마약을 팔아 번 돈을 몽땅 훔쳐 몰래 호텔을 빠져나온다.  


길을 잃은 청춘들이 마약과 폭력을 찾는다 - 영화 <트레인스포팅>

  

영화는 삶의 의미와 이유를 찾지 못한 채 마약에 찌든 나날을 보내던 한 청년이 기성세대에 편입되는 과정에 겪은 성장통을 그려내고 있다. 세상을 향한 렌튼의 태도는 다분히 냉소적이며 반항적이다. 세상은 다른 사람들처럼 살라고 요구하지만 자신은 그런 뻔한 삶 대신 마약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온통 절망과 좌절뿐인 세상 속에서 마약은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줄 뿐만 아니라 비참한 현실에 맞서는 저항의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비참함 위에 비참함을 쌓고 그 비참함을 수저로 퍼내어 갈아엎는다. 그런 후 곪아 터진 핏속에 계속 뿌려버린다. 훔치고 사기 치고 훔치고 사기 치고, 삶이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망가지는 거다. 아쉬울 게 없는 삶이므로... 결코 풍요로울 수 없는 삶이다. 훔치고 사기 치건 간에 무슨 상관이랴.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반항하는 거다. 

- 렌튼의 독백, 영화 <트레인스포팅> 中 

  

그랬던 렌튼이 영화의 후반부에 가서는 마약과 범죄로 물든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인생을 선택한다. 번듯한 직장을 구하고 성실하게 경력을 쌓아간다. 고향 친구의 압력에 못 이겨 또다시 범죄에 가담하지만 재빠르게 그 길에서 빠져나온다. 범죄자 친구들이 있는 호텔을 빠져나와 도망치는 그의 얼굴엔 새로운 인생을 향한 강렬한 희망과 의지가 가득하다. 반면 렌튼의 친구들은 여전히 과거의 삶으로부터 흘러나온 궤적 위에 머물러 있다. 누군가 피를 흘려야 직성이 풀리는 벡비는 폭력에 중독된 사람처럼 사사건건 주먹질을 하고 여차하면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든다. 돈을 벌기 위해 기껏해야 강도행각을 벌이거나 장물아비 노릇을 하면서 살아간다. 식보이도 별반 다르지 않다. 마약을 밀매하거나 성매매 포주 노릇을 하면서 늘 범죄로 한몫 챙길 궁리만 하고 있다. 이들의 삶은 그저 과거의 연장선에 있을 뿐이다. 삶의 근본적인 변화 가능성은 거의 희박해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렌튼은 범죄자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왜 다른 친구들은 그러지 못했을까? 누군가는 어린 시절 범죄 세계에 발을 담갔다가 어른이 되면서 그 세계를 빠져나온다. 다른 누군가는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범죄를 시작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청소년기에만 잠깐 비행을 저지르고 다른 사람은 일생동안 온갖 범죄를 저지르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도대체 이러한 차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왜 누군가는 변하고 누군가는 변하지 않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범죄자 vs. 비범죄자’의 이분법적 통념을 넘어서야 한다. 특정한 시점을 기준으로 범죄자와 비범죄자로 양분하는 방식으로는 삶이라는 긴 여정 속에서 한 개인이 경험하는 변화의 역동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한 개인의 보다 역동적인 삶으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 우연과 필연이 교차되고 과거와 현재가 조우하는 삶의 여정 속에서 의지적 주체들의 선택들을 추적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인간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성장해 가는 주체로서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변하는 주체


빅토르 위고의 유명한 소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 발장은 마음속 깊이 세상을 향한 원망이 가득 찬 인물이다. 고작 빵을 훔친 죄로 19년이나 감옥살이를 했다는 억울함 때문이다. 하지만 한 주교가 베풀어준 놀라운 은혜에 감동받아 새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 후 마들렌으로 이름을 바꾸고 성실하게 일한 결과 사업가로 큰 성공을 거두고 한 마을의 시장까지 된다. 그는 더 이상 세상을 원망하고 저주하던 과거의 장 발장이 아니다. 시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마들렌 시장과 예전의 전과자 장 발장은 마치 전혀 다른 인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장 발장을 뒤쫓는 자베르 형사의 눈에는 마들렌 시장과 도주한 전과자 장 발장은 동일인물일 뿐이다. 20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그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장 발장의 실체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고 믿는다. 자베르에겐 한번 범죄자는 영원한 범죄자일 뿐, 아무리 개과천선하더라도 바뀌는 건 없다.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세상의 모든 게 끊임없이 변해가는 과정 중에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새로운 게 아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도 ‘인간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로 세상 만물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매 순간 변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세상에 불변의 실재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변화하는 전 과정 그 자체가 바로 실재라고 본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생각을 좀 더 쉽게 이해하고 싶다면 한번 인근의 천년고찰을 찾아가 보라. 그리고 대웅전 뜰에 놓인 석탑을 유심히 바라보라. 군데군데 부서지고 깎여진 모양새와 검붉게 물든 겉면은 석탑이 거쳐 온 천년의 시간을 말해준다. 얼핏 보면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인 것 같지만 내가 쳐다보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도 석탑은 변화를 멈추지 않는다. 비바람과 햇볕에 의한 풍화, 돌 속에 함유된 철성분의 산화, 표면에 서식하는 이끼에 의한 마모는 순간순간 아주 미세한 영향을 미치며 석탑을 변화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석탑의 실재가 지금 한 순간 마주한 모습 속에 있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최초로 석탑이 만들어지고 지금까지 변화해 오고 또 앞으로 변화할 모든 ‘과정’으로서 실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는 않을까? 

  

사물에 불과한 석탑도 변하는데 사람이 예외일리 없다. 사람 역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끊임없이 변한다. 오래전 한 TV광고 속 여자 주인공이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고 외쳤던 것처럼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았던 사랑도 세월이 가면 변한다. 그런데 단지 사람의 마음 정도가 아니라 사람의 주체성마저 시시각각 변한다는 게 화이트헤드의 생각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주체로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그리고 내일의 나의 정체성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주 어릴 적 촬영된 동영상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상한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현재 성인으로서 현재 자신의 정체성과 상당한 거리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영상 속 아이의 생김새,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 그리고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을 고려하면 분명 나 자신이 맞다. 하지만 영상 속에서 마냥 천진난만하게 뛰어놀고 있는 그 아이를 1인칭이 아닌 3인칭 시점으로 쳐다보고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분명 나 자신인데도 타인처럼 바라보게 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 정체성이 일치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화이트헤드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주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가 관심을 둔 대상의 실체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그동안 철학자들이 실체를 ‘고정되어 불변하는 무엇’으로만 인식한 것은 잘못이다. 고대에 최초의 철학적 질문이 바로 ‘세상 만물의 공통적 요소는 무엇인가?’였다. 불변의 실체에 대한 질문이다. 고대 철학자들은 물, 불, 공기, 원자 등에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했다. 플라톤은 눈에 보이는 개별적 사물들의 이면에 존재하는 원본으로서 이데아를 불변의 실체로 제시했다. 데카르트 역시 모든 지각되는 것들을 의심한 끝에 인식의 주체, 코기토를 찾아내고 인간 주체성을 확립했다. 


그러나 이처럼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실체, 근본, 본질이 존재한다고 전제하고 대상을 분석하려 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매 순간 변화하고 움직이는 대상을 억지로 멈춰 세워서 한 지점에 붙들어 매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마치 한 그루의 나무에서 새순이 돋아 꽃과 잎이 피어나고 열매가 맺힌 후 단풍이 든 뒤 잎이 떨어지는 변화의 전 과정을 무시한 채, 단순히 잎이 무성할 때 찍은 한 장의 사진만으로 나무의 본질은 논하려는 태도와 같다고나 할까? 아니면 폴짝폴짝 뛰는 생생한 개구리를 붙잡아다가 포르말린에 담근 채 개구리의 참모습을 관찰하려는 태도와 유사하다고나 할까? 

  

우리가 인간을 바라볼 때 빠지기 쉬운 착각이나 오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언뜻 보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동일성을 유지해온 ‘불변의 일자(一者)’라는 게 존재하는 것 같다. 그것이 그 사람의 실체이며 정체성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유치원 시절의 정체성, 고등학생 때 정체성, 결혼 이후 정체성, 그리고 현재의 정체성이 같다고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하나의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실재하는 것은 ‘다자(多者)적 사건들로 구성된 과정’이며 한 사람의 실체는 이러한 과정의 산물일 뿐이다. 그럼에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키는 인간의 존재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느 한 시점에 붙박인 존재처럼 인간을 취급하는 게 우리들이 쉽게 빠지는 오류 중 하나이다. 


자베르 형사가 바로 이러한 오류에 빠진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20년이란 긴 시간이 흘렀지만 자베르 형사의 시선은 여전히 과거 장 발장을 만난 그 시점에 머물러 있다. 자베르가 뒤쫓는 자는 과거의 장 발장이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변해버렸다. 범죄자 장 발장은 가고 시장 마들렌이 남았다. 그가 찾는 장 발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자베르 형사는 과거의 허상을 좇고 있는 것이다.



과거는 흔적을 남긴다


사람은 변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과 경험, 지난날의 모습과 완전히 독립적으로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없다. 과거라는 시간은 그냥 흘러가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니다. 현재의 주체 안에 흔적과 기억으로 남아 있다. 분명 현재의 나는 예전의 나와 구별되는 정체성을 지닌다. 그럼에도 과거의 일부는 여전히 현재의 주체 안에 머물러 계속 영향을 미친다. 

  

영화 <메멘토>는 과거의 흔적이 주체에게 미치는 영향을 일련의 인과적 과정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인공 레너드는 사고로 인해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린 인물이다. 그의 기억력은 10분 이상을 지속하지 못한다. 레너드에게 남아 있는 최후의 기억은 아내가 성폭행을 당한 후 살해되는 장면이다. 그의 기억에 문제가 생긴 것도 바로 그날 아내를 구하려다가 살인범에게 당한 공격 때문이다 레너드가 원하는 바는 단 한 가지, 아내의 복수. 기억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불과 1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범인에 관한 단서를 찾아 서둘러 즉석사진을 찍어 메모에 남기고 중요한 정보는 몸에 문신으로 새긴다. 곧이어 기억은 말끔히 지워지고 레너드는 메모와 문신을 통해 과거로부터 전달된 파편화된 정보에 의지해 다음 행동을 취한다. 


과거가 현재에게 말을 건다 - 영화 <메멘토>


과거가 남겨 놓은 흔적은 현재의 레너드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친다. 누구를 믿고 누구를 믿지 말지는 전적으로 메모의 내용에 따라 결정된다. 그가 살아가는 이유도 과거의 흔적 속에서 찾아야 한다. 거울 앞에 선 레너드의 가슴엔 ‘그를 찾아 죽여라’(Find him and kill him)는 문신이 새겨져 있다. 잊지 않기 위해 과거 어느 시점에 스스로 몸에 새겨 놓은 글귀다. 그에겐 절대적 행동지침이자 삶의 목표이고 존재의 이유가 된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범죄자로 성장하는 과정은 마치 레너드가 과거가 남겨 놓은 단서에 반응하고 그 반응의 결과 새로운 단서가 만들어져 다음 시간에 일어날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연쇄반응과 흡사하다. 임상심리학자 테리 모핏(Terrie E. Moffitt)은 생애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평생 지속형’ 범죄자로 지칭했다. 문제는 아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시작될 수 있다. 산모의 음주, 마약 복용, 과도한 스트레스는 태아에게 신경심리적 장애를 유발할 위험이 있다. 이러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유아기와 아동기에 문제행동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부모가 체벌이나 학대로 문제행동에 대응하고 그 결과 아이는 부모와 정서적 친밀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게 된다.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분노장애, 행동장애가 더욱 악화되고 낮은 학업성취도, 잦은 일탈행위로 이어진다. 이제 청소년기의 비뚤어진 삶은 성인기의 경험에 영향을 미친다. 학업중단, 가출, 소년원 수용으로 점철된 삶은 취업과 결혼에 있어서 기회를 제약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범죄학자 로버트 샘슨(Robert J. Sampson)과 존 라웁(John Laub)은 과거의 원인과 현재의 반응이 어우러져 일종의 ‘범죄 궤적’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제시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사회와의 결속이 느슨해지거나 끊어질 때 사람은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데 동시에 범죄는 사회와의 결속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마치 사회와의 결속과 범죄행위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식으로 영향을 미치며 그 과정 속에서 하나의 일관된 삶의 패턴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타고난 기질 탓에 자꾸 말썽을 피우는 아이는 부모와 선생님에게 자주 혼나게 되고 그 결과 가정 및 학교와의 유대관계가 약해진다. 이렇게 약해진 유대관계는 일탈행위를 더욱 부추겨서 아이는 학업을 더욱 멀리하고 비행 친구들과 어울리며 각종 범죄행위에 가담하게 된다. 결국 범죄행위가 발각되어 소년원에 수용되게 되고 주류사회로부터 더욱 멀어진다. 사회로 복귀하더라도 쉽게 사회제도 속에 편입되지 못한다. 취업, 결혼 그리고 성공의 기회는 제약당한다. 그 결과 사회 속에 깊숙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사회적 유목민’(social nomad)이 되어 주류사회의 변두리를 떠돌게 된다. 이렇게 사회와의 비연결 상태에 머물러 있을수록 범죄의 위험성은 높아진다. 범행, 교도소 수감, 전과자, 사회와의 단절, 그리고 재범으로 이어지는 인과적 순환과정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반복되고 범죄자로서의 삶은 하나의 궤적을 그리며 지속된다.

  

영화 <사회에의 위협>은 이러한 범죄의 궤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한 청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 캐인은 미국 LA시의 흑인 밀집지역에서 조부모와 살고 있다. 아빠는 마약을 밀매하다가 총에 맞아 죽었고 엄마도 오래전에 마약중독으로 죽었다. 어린 시절부터 마약을 파는 아빠의 모습, 심지어 집에서 사람을 죽이는 모습마저 보면서 자랐다. 아빠 친구들은 꼬마 캐빈에게 총 잡는 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청년으로 성장한 캐인의 모습 속에는 과거가 남긴 흔적들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는 태어나고 자란 지역을 벗어나지 못한 채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마약을 팔고, 자동차를 훔치고, 때론 사람도 죽이면서 살아가고 있다. 물론 그의 주변에도 선한 영향력은 있다. 신실한 기독교인인 조부모는 성경말씀과 사랑으로 캐인이 범죄자의 길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하려 한다. 캐인을 염려하는 주위의 몇몇 사람들도 변화된 삶을 살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캐인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온 삶의 궤적에서 끝내 빠져나오지 못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총격으로 죽어가는 캐인은 이렇게 되뇐다. “돌이킬 수 없는 내 잘못들이 내 삶을 가로막고 있어. 내가 저지른 일들이 결국 내 발목을 잡고 말았어.” 과거의 경험, 사건, 생각, 그리고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간섭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의 영향력을 잘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당장 눈앞에 펼쳐진 현재라는 시간만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과거는 이미 흘러가 사라져 버린 것쯤 취급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범죄의 궤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정체성에 담긴 ‘역사성’을 자각해야 한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경험과 흔적들이 쌓이고 쌓인 결과물, 즉 시간이라는 파도가 만든 퇴적물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러한 자각이 있을 때 비로소 새로운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 안타깝게도 캐인의 경우 이러한 깨달음이 찾아왔을 때에는 이미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새 것 되기


사람은 과거로부터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할 잠재력을 지닌 존재다. 지나온 시간의 무수한 흔적들이 차곡차곡 쌓이다가 어느 순간에 이르면 사람은 과거로부터 주어진 모든 여건(data)을 종합해서 이전과 다른 주체로 거듭난다. 화이트헤드는 이와 같은 새로운 주체로의 갱신을 ‘다 함께 성장함’이라는 뜻을 가진 ‘concrescence’로 표현했는데 우리말로는 ‘합생’(合生)이라고 번역된다. 합생이 가능한 이유는 실존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취하는 독특한 존재방식 때문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순간까지 어떤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존재이다. 인간 외의 어떤 다른 존재도 이러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고양이는 본능에 충실한 채로 고양이로서의 삶을 살아갈 뿐 존재의 의미를 찾거나 이를 위해 어떤 다른 존재가 되려 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문제다.

  

<트레인스포팅>의 스코틀랜드 청년들에게서도, <사회에의 위협>의 캐인에게서도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욕구가 드러난다. 자기 초월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 거듭나고자 하는 갈망이 그들 마음속에 꿈틀댄다. 하지만 변화는 쉬운 일이 아니다. 과거의 흔적이 이루어놓은 현재의 모습과 이루고자 하는 미래의 정체성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함을 번번이 깨달을 뿐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일탈과 방황의 모습은 의미 있는 정체성을 추구하는 과정에 수반되는 존재론적 불안정성의 발현이다. 한편으로는 과거로부터의 영향력에 붙들려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의 자신을 초월하고자 하는 창조성에 이끌린다. 그래서 자기 초월의 의지를 가진 존재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자기 초월은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무리 험난하고 불행하고 비참한 과거일지라도 현재의 나를 형성하며 또한 새로운 나의 근거가 된다. 과거는 미래의 토대다. 화이트헤드가 말한 합생은 완전히 새로운 주체의 생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 근거를 둔 주체의 변화라고 보는 게 옳다. 

  

영화 <프레셔스>는 새로운 존재가 되길 꿈꾸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 프레셔스는 뉴욕시의 할렘 지역에 사는 열여섯 살 학생이다. 멋진 남자 친구와 사귀고, 잡지 표지 모델도 되고,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하고 싶지만 이 모든 게 그저 공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란 걸 잘 알고 있다. 그녀를 둘러싼 현실은 온통 절망뿐이다. 학교에서 아무하고도 어울리지 못하는 뚱뚱한 외모의 외톨이 신세다. 가출한 아빠는 가끔씩 찾아와 프레셔스를 강간하고 두 번씩이나 임신시킨다. 엄마는 이런 딸을 보호해주기는커녕 딸에게 남편을 뺏겼다며 그녀를 미워하고 괴롭힌다. 프레셔스를 향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년’이라고 욕설을 퍼붓다가 감정이 폭발하면 다짜고짜 폭행을 가한다. 


그러던 어느 날 프레셔스는 대안학교로 보내어지는데 그곳에서 그녀의 멘토가 되어 줄 레인 선생님을 만난다. 전혀 글을 읽을 줄도 모르던 그녀가 선생님의 도움으로 차츰 배움의 기쁨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둘째 아들이 태어나고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품는다. 프레셔스의 엄마는 정부 보조금을 받을 욕심에 딸과 손주들을 곁에 붙들어두려고 하지만 프레셔스는 두 아이를 데리고 엄마 곁을 떠난다. 

  

프레셔스의 삶은 어긋난 가족관계로 인해 짓눌려 있다. 딸을 강간하는 아빠와 이를 묵인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딸을 질투하는 엄마. 프레셔스(Precious)란 이름은 영어로 ‘소중하다’는 의미지만 세상 어느 누구도 그녀를 소중하게 대하지 않는다. 비참하고 절망적인 현실은 그녀로 하여금 세상과 소통하기를 멈춘 채 그저 공상의 세계 속에 머물게 할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참한 현실이 그녀가 기억도 하지 못하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누적되어 온 결과라는 사실을 그녀는 모르고 있다. 그러기에 스스로를 자책하고 비하할 뿐이다. 그러다가 비로소 엄마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의 불행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알게 된다. 


프레셔스가 세 살 때에 처음으로 아빠가 어린 프레셔스의 몸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엄마는 이를 알고도 남편이 자신을 떠나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말리지 못하고 그냥 묵인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엄마는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지는 않는 이유를 모두 딸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엄마의 이야기기 끝나는 순간 프레셔스는 자신이 겪고 있는 불행의 근원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자신의 현재 삶 속에 농축되어 있는 역사성을 알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변화를 향한 의지가 생겨난다. 현재라는 시간 속에 갇혀 있던 주체가 새로운 나를 찾아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된다. 정체성의 변화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시작된다. 

  

한 개인이 범죄의 궤적에서 이탈하는 것은 정체성의 변환을 의미한다. 단순히 범죄행위를 그치는 정도를 넘어서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이 리모델링되는 것을 말한다. 스스로를 범죄자로 인식하기를 멈추어야 하며 새로운 비범죄적 정체성으로 갱신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변환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 계기는 보통 새로운 상황이나 기회의 형태로 찾아온다. 


사회심리학자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은 어떤 사람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 그리고 그의 일상적인 일과 행동이 바로 그 사람의 정체성이라고 말한 바 있다. 새로운 환경과 제도에 속해서 새로운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때 정체성 변환이 발생한다. 범죄자로서의 정체성이 변환될 때에도 새로운 상황이 필요한데 이를 범죄학 이론에서는 ‘인생의 변곡점’(turning point)이라고 부른다. 범죄학자들이 제시하는 중요한 인생의 변곡점으로는 결혼, 임신, 취업, 군 입대, 교육, 종교 등이 있다. 인생 과정에 찾아오는 새로운 상황들은 사회적 지지를 얻고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미련할 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 참여하는 활동의 유형과 성격을 바꾼다.  

  

영화 <프레셔스>가 보여주듯 한 여성이 출산을 통해 엄마가 된다는 것은 정체성의 변환을 가져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엄마로서의 지위와 역할을 수용하게 되면서 나타나는 변화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실시한 한 연구에서 성매매 경험이 있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심층면접을 한 적이 있다. 성매매 여성으로서의 삶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는지 묻자 첫 번째 원인으로 꼽는 것이 결혼과 임신이었다. 새로운 삶을 안정적으로 지지해 줄 반려자의 등장과 아기의 출산이 내면적 변화를 가져온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들 말했다. 


종교적 회심은 교도소에 수감된 범죄자들이 바뀌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 출소자들의 재범률을 낮추기 위한 교화 프로그램에도 신앙을 통한 정체성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 경우들이 있다. 신앙생활은 범죄자나 전과자라는 부정적 표지를 대체할만한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고, 교도소 내의 삶에 특별한 목적과 의미를 불어넣어준다. 또한 절대적 존재인 신을 매개로 죄를 범한 과거의 자기 자신과 진심 어린 화해를 할 수도 있다. 


삶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가치 없고 내가 해 온 모든 일들이 잘못되었다는 걸 느껴요. 기독교가 나에게 말해준 한 가지는 ‘너는 죄를 용서받았으니 이제 그 길에서 떠나서 다시 시작하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저는 신이 나의 죄를 용서해줬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 죄를 모두 잊어버렸다는 걸 믿기 때문이죠. 이런 사실을 믿을 때 다시 시작하고 모든 걸 바로잡을 수 있는 엄청난 기회가 제공되는 겁니다. 

- 어떤 재소자   

  

영국의 범죄학자 섀드 마루나(Shadd Maruna)는 재소자들이 출소 후 성공적으로 사회에 복귀하여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과거 모습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마루나의 이론에 등장하는 ‘구원 서사’(redemptive narrative)을 통해 과거의 실패를 현재와 미래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 서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어야 한다. 


첫째, 스스로의 내면에 선하고 정상적인 ‘진정한 자아’, ‘진짜 나’가 존재함을 확인한다. 둘째, 과거 저지른 범죄는 본질적 자아가 아닌 ‘나쁜 무엇’, 즉 범죄에 책임이 있는 어떤 상황과 조건으로 인함을 확인하여 죄책감과 수치심에 빠지지 않는다. 셋째, 자신의 잠재력과 진정한 가치를 알고 있는 누군가가 자신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넷째, 과거의 범죄는 더 나은 현재와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 중에 거쳐야만 했던 일종의 통과의례라는 사실을 깨우친다. 즉 현재 자신의 정체성은 구원받은 자아, 속죄된 자아로서 과거의 부정적인 자신과 미래의 긍정적인 자신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고 인식한다. 마지막으로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데 관심을 갖게 되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필요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난다. 비슷한 의미의 개념으로서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이 제시한 ‘생성감’(generativity)이 있다. 사람이 중년의 나이가 되면 생성감이 형성되는데, 이는 후세대를 양육하고 지도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뭔가 가치 있는 일을 추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영화 속 프레셔스가 써 내려가는 자신의 이야기가 바로 마루나 교수가 말한 구원 서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프레셔스는 레인 선생님과의 만남, 참된 교육의 기회, 그리고 새 생명의 탄생이라는 중요한 인생의 변곡점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감춰진 진정한 자아의 소중함과 가치를 깨닫는다. 그녀는 두 번이나 친부의 아이를 임신했던 과거를 더 이상 수치스러운 실패의 흔적으로 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스스로가 주변 사람들에 의해 사랑받고 있고 또한 사랑받을만한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무엇보다 과거에 자신에게 벌어졌던 일들과 진정한 화해를 하게 되면서 그녀의 자아는 구원을 얻는다. 더 나아가 이제 자신의 자녀가 더 나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새로운 소망을 품고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어느 날 예수가 예루살렘에 있는 베네스다라는 이름의 연못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 연못 주변에는 수많은 불치병 환자들과 장애인들이 누워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아주 가끔씩 하늘에서 천사가 연못에 내려오는데 그때마다 물이 움직이고 제일 먼저 물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도 나을 수 있다. 연못 주변의 사람들은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그곳에서 38년 동안이나 앓고 있는 어떤 병자에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러자 병자가 말한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에 예수가 명한다. “일어나 걸어가라.” 그러자 병자는 즉시 병이 나아서 걷기 시작했다. 

  

신약성경의 복음서에 등장하는 이 이야기는 예수가 행한 수많은 치유사역 중의 한 장면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예수와 병자 사이의 대화에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연못가에 누워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중증환자들로서 혹시나 기적이라도 일어나서 병이 나을까 노심초사 기다리는 자들이다. 그런 사실을 뻔히 아는 예수가 무려 38년 동안 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병이 낫길 원하는지 묻고 있다. 물으나마나 뻔한 질문 아닌가? 그런데 더욱 신기한 점은 이런 뻔한 질문에 대한 병자의 반응이다. 그는 예수의 질문에 엉뚱한 소리를 한다. 병을 낫고 싶다고 말하는 대신 옆에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하소연한다. 그렇다면 예수는 도대체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한 것일까? 

  

예수는 그 병자가 치료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려 한 것이다. 아니 어쩌면 병자에게 그러한 의지가 없음을 미리 간파하고 치료에 대한 의지를 가지라고 촉구하기 위한 목적이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가 그에게 묻기 전에 이미 그의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알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가 알아차린 그의 병은 단순히 육신의 질병만이 아니다. 그 사람 내면의 병도 함께 본 것이다. 진정 치유되어야 할 병은 지난 38년의 삶을 통해 그에게 남겨진 실패의 흔적이다. 


오로지 병이 낫기만을 바라며 연못가에 누운 채 그 긴 세월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거듭된 실패와 좌절을 맛보았을 것이다. 어쩌다 한번 오는 치료의 기회조차도 옆에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번번이 놓쳐야만 했을 것이다. 그럴수록 그의 마음속으로부터 완치에 대한 희망과 의지가 증발해갔을 것이다. 패배의식에 젖어 그저 지난 수십 년 동안 매일 해오던 것처럼 그날도 습관대로 누워 있었을 것이다. 정곡을 찌르는 예수의 질문에 그가 앓고 있는 마음의 병증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현재의 불행한 처지를 자신을 돕지 않는 다른 사람들의 탓으로 돌렸다. 실패의 기억과 흔적이 쌓인 곳에 패배주의자의 변명과 절망만이 존재한다. 예수가 바로 이걸 간파한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말한 합생은 사람의 주체적 결단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과거의 여건들이 종합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주체가 능동적인 힘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체는 과거로부터의 영향력에 수동적으로 이끌려 다니는 대신 당당히 맞서야 하며, 과거의 여건들을 자신의 관점에 따라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주체적 결단에 의한 행위를 ‘주체적 지향’(subjective aim)이라고 칭한다. 주체적 지향은 자기 초월적 존재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과거의 여건들을 각양각색의 종잇조각이라고 생각해보자. 도화지 위에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종잇조각들은 보는 눈만 혼란스럽게 할 뿐 어떤 의미도 주지 못한다. 하지만 모양과 색상에 따라 잘 배열하여 도화지에 붙이면 멋진 모자이크 그림이 탄생한다. 어떤 그림으로 표현될지는 전적으로 화가에게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종잇조각들을 가지고 있더라도 화가가 지향하는 바에 따라 전혀 다른 그림들이 탄생할 수 있다. 자기 초월적 존재는 어지러이 널려 있는 종잇조각과 같은 과거의 여건들을 종합해서 새로운 무언가를 생성하려는 의지를 가진 자이다. 과거로부터의 정보에 의지해서 새로운 미래를 추구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범죄의 궤적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도 주체의 의지적 결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로버트 샘슨과 존 라웁은 초창기 이론에서는 범죄자의 삶을 변화시키는 요인으로 단순히 결혼, 취직, 군 입대 등과 같은 인생의 변곡점만을 제시했다. 하지만 후속 연구에서는 인생의 변곡점이 범죄자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행위주체인 범죄자의 개인적 의지와 의도적 선택 행위에 달려 있다고 기존의 이론을 보완한다. 설령 어떤 계기로 변화에 필요한 상황과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범죄자가 주체적 결단으로 변화를 선택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의미한다. 

  

<트레인스포팅>의 주인공 렌튼은 의지적으로 변화를 선택한 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약에 찌는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보라는 여자 친구의 충고에 자극을 받아 부동산 중개업체에 취직을 한다. 하지만 어느 날 예전 친구들이 그가 어렵게 마련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침범해 온다. 이 친구들은 변화를 지향하는 렌튼을 끈질기게 붙들고 놔주지 않으려는 과거의 고집이다. 이에 대해 렌튼은 친구들을 배신하고 그들과 절연하는 방식으로 맞선다. 


"프레셔스, 들어올 거니?" - 영화 <프레셔스>


프레셔스 역시 새롭게 변화된 인생을 선택한 인물이다. 프레셔스가 처음으로 대안학교를 찾은 날 레인 선생은 복도에서 맥 빠진 모습으로 앉아 있는 그녀를 발견한다. 프레셔스에게 수업에 들어올지 물자 그녀가 주저한다. 그러자 레인 선생은 그녀에게 20초 후에는 교실 문을 닫는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진다. 베네스다 연못가에서 예수가 병자에게 병이 낫기를 원하는지 물어보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레인 선생은 프레셔스에게 스스로의 의지로 교실문 턱을 넘으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주체의 의지와 결단이 전제되지 않으면 교육을 통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문헌

정혜원, 성매매 탈출의 전환점 연구, 한국범죄학, 제11권, 제1호(2017)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유기체적 세계관의 구상」, 오영환 옮김(민음사, 2003)

Erik H. Erikson & Joan M. Erikson, The Life Cycle Completed (W.W. Norton & Company, 1998)

John H. Laub & Robert J. Sampson, Shared Beginnings, Divergent Lives: Delinquent Boys to Age 70 (Harvard University Press, 2009)

Robert J. Sampson & John H. Laub, Crime in the Making: Pathways and Turning Points through Life (Harvard University Press, 1995)

Shadd Maruna, Making Good: How Ex-Convicts Reform and Rebuild Their Lives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Books, 2001)

Shadd Maruna, Louise Wilson, & Kathryn Curran, “Why God is Often Found Behind Bars: Prison Conversions and the Crisis of Self-Narrative,” Research in Human Development, Vol. 3, No. 2&3(2006)

Terrie E. Moffitt, “Adolescent-Limited and Life-Course-Persistent Antisocial Behavior: A Developmental Taxonomy,” Psychological Review, Vol. 100, No. 4(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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