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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폴 Oct 19. 2020

물신숭배의 종말

영화 <돈의 맛>

맘몬, 하늘에서 떨어진 가장 저속한 영, 하늘에 있을 때도 그의 시선과 생각은 언제나 아래로 향해, 하나님 뵙고서 즐기는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보다는 황금을 밟는 천국 도로의 부를 더욱 찬탄했었다. 처음에는 인간들도 그에게 이끌려, 그의 암시를 받아 지구를 뒤져 묻어두는 게 좋을 뻔한 보물을 찾느라고 불효의 손으로 어머니인 대지의 내장을 뒤졌다. 


- 실낙원




영화 <돈의 맛>의 윤 회장은 젊은 시절 돈 욕심에 이끌려 재벌가 상속녀와 결혼한 뒤 평생 데릴사위로 살아온 인물이다. 호칭만 회장일 뿐 실제 집안의 실세는 그의 아내인 백여사다. 윤희장이 하는 일이라곤 회사 경영 과정에 발생하는 불법과 탈법을 무마하기 위해 정치권력과 사법기관을 매수하는 것이다. 평생 돈, 술, 여자에 중독된 채 살아온 그가 필리핀 가정부 에바와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아내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고자 시도한다. 백여사는 사람들을 시켜 에바를 납치해 죽이고 이에 충격을 받은 윤 회장은 자살을 한다. 이 집안의 비서실장인 주 실장은 처음엔 윤 회장 밑에서 일했지만 점차 백여사의 수족이 되어가면서 돈과 권력의 맛을 알게 된다. 하지만 윤 회장과 에바의 죽음을 목격한 후 돈의 맛에 중독된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끼고 그들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영화의 마지막, 주 실장은 윤 회장의 딸 나미와 함께 에바의 딸과 아들이 있는 필리핀을 찾아간다.     

 

다소 도발적인 제목처럼 이 영화는 사람들에게 ‘과연 돈이 어떤 맛일까?’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영화가 묘사하는 돈의 맛은 마치 두 가지 맛이 나는 아이스바와 같다. 봉지를 뜯고 아이스바에 혀끝을 갖다 대면 자극적인 달콤함이 먼저 느껴진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그 맛에 빠져 계속 핥게 된다. 그런데 얼마 후 아이스바의 겉면이 녹아서 사라질 때 즈음 두 번째 맛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 맛은 처음과 달리 거북스럽고 불편한 맛이다. 하지만 처음 느꼈던 달콤한 맛이 워낙 강렬하기 때문에 핥기를 멈출 수 없다. 달콤한 맛 사이로 간간히 느껴지는 두 번째 맛이 신경 쓰이기는 해도 핥기를 멈추게 할 정도는 아니다. 그나마도 시간이 흐르면 거북함이나 불편함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상태가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돈의 맛은 거부하기에 너무 강렬하고 매혹적이다. 영화의 초반 윤 회장을 따라 금고에 들어간 주 실장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돈다발을 발견한다. 슬쩍 몇 다발 챙겨 두라는 윤 회장의 말에 잠시 갈등하지만 양심을 지키기 위해 끝내 돈에 손을 대지 않는다. 하지만 나중에 혼자서 다시 금고를 찾았을 때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정신없이 돈을 주워 담는다. 돈의 맛은 강렬한 만큼 중독성도 강하다. 일단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결코 쉽지 않다. 윤 회장은 젊은 시절 돈에 이끌리어 사랑 없는 결혼을 했다. 그가 평생토록 불행한 결혼생활을 청산하지 못한 채 술과 외도에 빠져 허우적대며 살아온 이유도 결국 돈이 제공하는 삶의 풍요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벗어나기엔 이미 돈의 맛에 너무 푹 빠져버린 탓이다. 


돈 앞에 무릎 꿇은 인간이 느끼는 건 바로 모욕감이다 - 영화 <돈의 맛>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돈의 달콤한 맛 이면에 또 다른 맛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고발하는데 집중한다. 한 번은 윤 회장이 주 실장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돈 펑펑 썼지. 원 없이. 근데, 그게 그렇게 모욕적이더라고.” 왜 돈을 펑펑 쓰는데 모욕감을 느꼈던 걸까? 우리는 돈을 수단으로 세상을 지배하고자 한다. 돈을 이용해 원하는 모든 것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람들을 조종하고 싶어 한다. 세상의 지배자이자 주인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사실은 내가 아닌 돈이 바로 세상의 지배자이고 주인이라는 사실을. 자신도 기껏해야 돈의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어느 틈엔가 돈의 노예로 전락한 사람들은 저 높은 자리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며 비웃고 있는 돈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모욕감이 밀려오는 때가 바로 그 순간이다. 돈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인식할 때 한 인간 존재로서 느끼게 되는 감정이 모욕감이다. 


영화 속에는 주 실장이 금고에서 몰래 훔쳐 온 돈다발을 쌓아 높고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아있는 장면이 나온다. 거울에 비친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다가 주 실장은 돈의 노예가 되어버린 스스로를 깨닫고 흐느껴 운다. 세상을 돈으로 지배하려는 인간은 도리어 돈의 지배 아래에 놓이는 처지가 된다. 영화는 그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탐욕은 선한 것


왜 이토록 우리는 돈을 열망하는 걸까? 돈을 향한 우리의 욕망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겨난 걸까? 칼 마르크스는 화폐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징 속에서 부의 증식을 향한 끊임없는 욕망의 근원을 찾는다. 화폐는 모든 상품들의 가치를 측정하는 기준이 되며 서로 다른 상품들 간의 교환을 중개한다. 경제학 용어로 말하면 화폐는 ‘일반적 등가물’이다. 예를 들어, 아파트와 자동차는 전혀 다른 가치를 가진 상품이다. 아파트는 주거공간으로서, 자동차는 이동수단으로써 본래의 가치를 가진다. 하지만 만약 아파트와 자동차 모두에게 각각 1억 원이라는 가격이 매겨졌다면 시장에서는 동등한 가치를 지닌 상품으로 거래된다. 평생 무주택자로 살아온 어떤 사람에게는 아파트 한 채가 고가의 자동차와는 상대가 안 될 정도의 가치를 지닐 수 있다. 반면에 수십억 원짜리 아파트를 여러 채 가진 사람에게 한정판 모델의 고가 수입자동차 한 대가 더 가치 있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화폐를 매개로 부여되는 교환가치 차원에서 보면 아파트와 자동차의 가치에는 별 차이가 없다. 화폐는 모든 상품에 내재된 고유한 질적 가치를 획일적인 양적 가치로 대체하는 기능을 한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이 담뿍 담긴 소중한 금반지라고 해도 보석상에게 가져가면 무게와 순도에 따라 값어치가 결정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화폐는 모든 상품의 가치척도로서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한다. 

  

또한 화폐는 그 자체가 하나의 상품으로서 다른 모든 상품들과 교환이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는 원하기만 하면 돈으로 무엇이든지 살 수 있다. 돈은 직접 교환을 통해 호화 별장으로, 최고급 요트로, 뉴욕 맨해튼의 펜트하우스로도 쉽게 변신할 수 있다. 그러나 돈은 항상 한도가 분명한 특징을 가진다. 예를 들어 1억 원으로는 1억 원짜리 아파트를 살 수 있을 뿐 2억 원짜리 아파트를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수중에 있는 돈의 한계를 느끼게 되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그 한계를 뛰어넘기를 소망한다. 1억을 가진 사람의 눈은 항상 2억 원짜리 아파트를, 2억 원을 소유한 사람의 눈은 3억 원짜리 아파트를 향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이 무한대로 확장되는 이면에는 이와 같이 화폐에 내재된 이중성이 존재한다. 마르크스의 말을 빌려 ‘화폐의 질적인 무제한’과 ‘화폐의 양적인 제한’ 사이의 모순이다. 

- 칼 마르크스, '자본'


화폐는 모든 상품과 직접 교환될 수 있으므로 질적으로나 형태적으로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즉 화폐는 물질적 부의 일반적인 대표자이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의 화폐액은 모두 양적으로 제한되어 있고 따라서 효력이 제한되어 있는 구매수단일 뿐이다. 화폐의 양적인 제한과 질적인 무제한 사이의 이런 모순은 화폐 축장자를 끊임없는 축적이라는 시시포스의 노동으로 몰아넣는다. 그는 아무리 새로운 국가를 정복하여 국토를 넓혀도 여전히 새로운 국경에 맞닥뜨리게 되는 세계 정복자와 마찬가지의 운명이 된다.

  

그리스 신화 속 시시포스는 저승에서 큰 바위를 굴려 가파른 언덕의 정상까지 옮겨야 하는 벌을 받았다. 그런데 정상에 다다르자마자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 내려가 원래 위치로 돌아오고 그러면 시시포스는 다시 돌을 밀어 올리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무한히 반복되는 시시포스의 노동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들은 일정한 수준의 부를 손에 넣자마자 더 큰 부를 위해 내달리는 존재다. 예를 들어, 1억 원을 가진 사람이 투자를 통해 1억 원의 수익을 내 2억 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자. 처음에는 원금 1억 원과 추가된 수익 1억 원을 확실히 구분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머지않아 사라지고 만다. 그러고는 현재 자신의 수중에 있는 2억 원이 전체로서의 금액으로 여겨진다. 그것도 양적인 제한이 분명한 하나의 금액. 사실 한정적 가치일 뿐이라는 점에서 1억과 2억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가치를 증식시키려는 과정이 1억 원에서 시작해서 2억 원에서 끝났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가치증식 과정이 다시 시작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처럼 축재를 향한 욕망의 무한궤도는 멈추지 않는 법이다. 

  

돈과 물질적 풍요만을 탐욕스럽게 추구하는 풍조를 ‘맘모니즘’이라고 부른다.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을 묘사할 때 자주 등장하는 용어다. 맘몬(mammon)은 히브리어에 유래한 단어로 돈과 부를 의미한다. 신약성경 속 흔히 산상수훈이라고 불리는 장면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는데 이때 탐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때 재물에 해당되는 원래 단어가 맘몬이다. 중세시대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으로 맘몬에 인격성이 부여되어 인간의 마음에 탐욕을 일으키는 악마로 여겨졌다. 존 밀턴의 「실낙원」에서 맘몬은 타락한 천사 중 몸이 가장 구부정한 존재로 묘사된다. 그가 하늘나라에 있을 때조차도 바닥에 떨어진 금이나 돈을 찾기 위해 항상 눈이 아래로 향해 있었기 때문에 등이 굽은 것이다. 맘모니즘이 팽배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기꺼이 맘몬을 신으로 숭배한다. 탐욕의 달콤한 맛에 중독된 사람들은 맘몬의 노예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영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는 맘몬의 노예가 된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한때 뉴욕 월스트리트를 무대로 악명을 떨치던 주식 브로커 조던 벨포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특유의 타고난 언변을 발휘하여 불과 26세의 나이에 주식거래를 통해 4천9백만 달러를 벌어들여 유명해진 인물이다. 그는 소규모의 투자은행을 설립하고 직원들로 하여금 저가의 위험성이 높은 투기적인 주식들을 온갖 감언이설로 팔아넘겨 거액의 수수료를 챙기는 방식으로 순식간에 억만장자가 되었다. 반면에 이들의 말에 속아 ‘쓰레기’ 주식을 산 고객들은 수 억 달러의 손실을 떠안아야 했다. 회사의 급속한 성장에 벨포트와 일당의 불법행위가 증권거래위원회와 FBI의 주목을 끌게 되고, 벨포트는 수사를 피하기 위해 수사관을 매수하려 하지만 망신만 당한다. 점차 수사망이 좁혀오자 다급해진 그는 스위스 차명계좌로 재산을 빼돌리려고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하지만 결국 주식사기와 주가조작 등의 혐의로 체포되고 사기에 가담한 공범들에 대해 증언하는 조건으로 감형을 받아 징역형 22개월을 선고받는다. 

  

영화는 벨포트의 돈에 대한 탐욕을 마약에 중독된 상태, 섹스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병렬적으로 배치하여 보여준다. ‘돈=마약=섹스’의 등식은 이들 세 가지 대상 사이의 공통점에서 비롯된다. 일단 탐닉하게 되면 끊기가 어렵다. 또한 자꾸 빠져들수록 더욱 강렬한 자극을 원하게 된다. 은행의 잔고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쌓여갈수록 마약에 대한 의존성도 더 심각해지고 급기야 과도한 마약 복용으로 뇌사상태에 근접하기에 이른다. 섹스 역시 점차 정상의 범주를 벗어나 회사 사무실과 비행기 안에서 광란의 섹스파티를 열기도 하고 촛농을 이용한 변태적인 성행위를 즐기기도 한다. 


'돈이 너희를 구원하리라!' - 영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벨포트는 틈만 나면 직원들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세일즈를 독려하기 위한 연설을 한다. 스크린 속 그의 모습은 마치 신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교주처럼 비친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돈이 너희를 구원하리라’이다. 현실의 미천하고 보잘것없고 불안한 삶으로부터 인간을 구해 줄 유일한 구세주는 바로 ‘돈’이다. 구원받은 자들은 약속의 땅으로 인도된다. 그곳은 물질적 풍요와 육체적 쾌락이 마르지 않는 물처럼 샘솟는 가나안 땅이다. 벨포트에 의해 돈은 세상 만물을 지배하는 유일신으로 격상된다. 마약과 섹스는 이러한 유일신을 감각적으로,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그런 점에서 돈, 마약, 섹스는 기독교 삼위일체 개념의 변주에 해당한다. 도덕적으로도 탐욕은 정당화된다. 탐욕은 돈을 향한 열망이며 신을 향한 경배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월 스트리트>의 주인공 고든 게코가 내뱉은 유명한 대사처럼 ‘탐욕은 선한 것이고 옳은 것’이다. 벨포트는 인간의 탐욕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대는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질타한다.          

궁핍함 속에 고귀함은 없어. 나는 가난한 적도 있었고 부자인 적도 있었지. 하지만 나는 매번 부자가 되기를 선택할 거야... 내가 너무 얄팍하고 물질주의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어서 맥도널드에 가서 알바나 뛰어. 거기가 바로 네가 있어야 할 곳이니까. 

- 벨포드의 강연, 영화 <울프 오프 월스트리트> 中

  

최초로 자본주의 사회 속 탐욕의 문제를 범죄와 결부시켜 설명한 사람은 네덜란드의 범죄학자 빌렘 봉거(Willem A. Bonger)다. 그에 의해 마르크스 이론이 본격적으로 범죄학과 만나게 되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원시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의 목적이 사회적 소비였는데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생산은 교환을 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봉거는 이러한 변화로 인해 범죄가 증가하기에 유리한 토양이 형성되었고 말한다. 과거에는 공동체에서 소비할 목적으로 생산을 했기 때문에 이타심과 같은 사회적 본성을 독려하는 사회적 환경이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모든 상품들은 거래를 위한 화폐가치로 환산되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교환을 통해 돈을 축적하는데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럴수록 이타심은 점차 퇴색되어갔다. 자본주의가 번성하면 할수록 이타심이 사라져 버린 자리를 탐욕으로 대표되는 이기적 본성이 차지해갔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라면 반사회적이고 비도덕적인 행위라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범죄학자 로버트 머튼(Robert K. Merton)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자본주의 사회 내 탐욕의 문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미국 사회의 범죄문제 중심에 ‘아메리칸드림’으로 대표되는 성공지상주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일차적으로 물질적 성공만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사회풍조가 문제라는 것이었다. 더욱이 물질적 성공을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고 달성하기 위해 혼신을 다해야 할 보편적 목표로 간주하는데 심각성이 있었다. 머튼이 이론을 발표할 당시 미국에서는 명문 대학에 진학해서 고소득 직업을 갖고 가족과 함께 교외의 부촌에서 살면서 고급 승용차를 타고 여유롭게 레저를 즐기는 모습은 성공한 삶의 표준이자 최고의 덕목이었다. 미국은 기회의 땅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기회의 문이 열려 있다고들 말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맨주먹으로도 갑부가 될 수 있다고들 말했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들 말했다. 이러한 문화적 풍토 속에서 물질적 성공을 향한 열망이 미국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러한 미국 사회 최고의 덕목이 최악의 사회문제인 범죄를 유발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머튼은 말한다. 왜냐하면 누구나 성공의 꿈을 꾸지만 모두에게 공평하게 성공의 기회가 제공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사회적 하위계층의 사람들에게 아메리칸드림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했다. 단지 그림의 떡이었다. 극소수의 성공한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는 옛날 옛적 신화처럼 들릴 뿐 현실세계와는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 사회계층을 막론하고 누구나 성공을 향해 힘껏 달려야 한다는 사회 전반적 압박이 있는 상황에서 하층계급에게는 달리기에 참가할만한 여건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설령 모든 걸 극복하고 경기에 참가한다고 해도 애초부터 패배가 예정된 불공정한 게임에 지나지 않았다.

  

머튼의 주장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흑수저 금수저 논쟁’과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SKY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태어날 때 어떤 숟가락을 입에 물고 나왔는지가 중요하다는 걸 다들 알고 있다. 머튼은 사회문화적으로 성공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수혈받았지만 현실적으로 합법적인 성공의 수단을 갖지 못한 자들에 의해 범죄가 저질러진다고 말한다. 합법적인 방법이 막히니 불법적인 방법이라도 동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머튼이 좀 더 힘주어 말하는 부분은 사실 하층계급의 성공을 가로막는 불평등한 기회구조가 아니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물질적 성공을 삶의 유일무이한 목표로 과대 포장하고 그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질주하라고 박차를 가하는 아메리칸드림 자체라고 진단하고 있다.

  

벨포트와의 인터뷰 후에 포브스 매거진은 그에게 ‘월가의 늑대’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먹잇감을 찾아 들판을 어슬렁대는 굶주린 늑대처럼 벨포트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주식시장을 종횡무진한다. 늑대는 사냥을 홀로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벨포트는 함께 사냥에 나설 늑대들을 훈련한다. 탐욕의 전도사가 되어 직원들의 마음속에 물질적 성공을 위한 욕망을 주입한다. 최고의 자동차, 최고의 집, 최고의 아내, 그리고 최상의 삶을 열망하게 만든다. 허기 진 늑대들은 우두머리 벨포트를 따라 탐욕의 배를 채우기 위해 사냥에 나선다. 

  

그런데 영화는 탐욕에 굶주린 늑대가 비단 이들만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 모두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영화의 마지막, 형기를 마치고 세상에 나온 벨포트는 동기부여 전문강사로 사람들 앞에 다시 선다. 강연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은 동경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가 다름 아닌 희대의 주식 사기꾼이라는 사실이 적어도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누구나 꿈꾸는 물질적 성공의 최고 정점에 도달해 본 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는 단지 선망의 대상일 뿐이다. 만약 벨포트가 저질렀던 범죄 대신 그의 성공이야기에 귀가 더 솔깃하다면, 범죄 때문에 가족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잃고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그의 불행한 삶 대신 한때나마 눈부시게 화려했던 삶을 부러워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배고픈 늑대다. 그렇다면 이제 탐욕의 배를 채우기 위해 사냥에 나서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자본주의에 포획된 욕망


2008년 9월 15일은 미국 4대 투자은행 중 하나였던 리먼 브라더스가 6천억 달러의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산 신청을 한 날이다. 역사는 이 날을 전 세계에 글로벌 금융위기의 충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날로 기록하고 있다.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을 신청하기 하루 전, 백여 년 역사의 세계 최대 투자은행인 메릴린치가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전격 매각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6개월 전에는 우량은행으로 평가받던 월가의 베어스턴스가 자금난을 못 이기고 JP모건 체이스에 헐값으로 팔렸다. 월가에서 촉발된 금융위기는 전 세계를 충격 속에 빠뜨렸다. 사람들은 충격의 정도가 1930년대의 세계 대공항과 맞먹을 정도라고들 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투자자들과 기업들은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했고 그 여파는 대규모 구조조정과 실업률 급증, 실물경제 위축, 성장률 둔화로 이어졌다.  

  

문제의 발단은 2000년대 초반 미국 주택시장에 형성된 부동산 버블이었다. 경기부양을 위해 도입한 저금리 정책으로 주택담보대출이자가 하락하고 정부차원의 주택구입을 위한 자금지원이 확대된데 원인이 있었다. 아메리칸드림의 상징과도 같은 내 집 마련의 꿈을 실현하고자 너도나도 대출을 받아 주택구입에 나섰고 덩달아 주택 가격은 계속 상승했다. 집값 상승률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 대출은행들은 상환능력이 떨어져 신용 등급이 낮은(서브프라임 등급의) 사람들에게도 마구잡이식으로 대출을 해줬다. 이러한 주택담보대출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2004년에 이르러 미국 정부가 저금리 정책을 중단하자 부동산 버블은 꺼지고 2006년부터 주택 가격은 하락세로 돌아서게 된다. 집값은 떨어지고 대출이자는 급증하게 되자 저신용 대출자들은 원리금을 더 이상 갚을 수 없게 되고 결국 대출금 회수에 실패한 모기지은행들이 하나둘 파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단순히 대출은행들의 부실화 또는 파산으로 끝나지 않고 세계 금융시스템 전반을 뒤흔들어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대출채권이 증권화되었기 때문이다. 은행들이 개인에게 주택담보대출을 내주면 대출금을 회수할 수 있는 권리, 즉 ‘주택담보대출채권’을 보유하게 된다. 리먼 브라더스와 같은 투자은행들은 이러한 대출채권으로 ‘부채담보부증권’이라는 투자상품을 만들어 투자자들에게 판매했다. 위험을 분산시키기 위해 주택담보 대출채권과 기업이 발행한 채권 등을 결합하여 새로운 파생상품들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만들어진 금융상품은 다른 금융회사에 판매되었고 그 과정에 투자은행들은 고액의 수수료를 챙겼다. 하나의 파생상품은 또 다른 파생상품을 낳고 나중에는 우량채권과 부실채권을 구분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동산 시장의 거품이 꺼지자 대출은행의 부실화가 연쇄반응을 일으켜 대형 금융회사들이 연이어 파산하게 된 것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한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돈을 향한 인간의 욕망 때문이다. 금융기관들이 부도의 위험이 높은 파생상품을 고수익 투자상품인 것처럼 투자자들에게 판 이유는 두말할 것 없이 돈 때문이다. 직원들의 말만 믿고 파생상품에 투자한 사람들이 원했던 바도 다를 게 없다. 무리해서라도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더 많은 돈을 소유하고 싶었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 자체는 아무 문제 될 게 없어 보인다. 더욱이 부유함 자체가 미덕처럼 여겨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어떤 면에서 인간의 욕망은 자본주의 사회가 굴러가기 위한 원동력이기도 하다. 말이 수레를 끄는 모습을 그려보자. 말의 눈앞에는 장대 끝에 묶인 채 흔들거리는 당근이 있다. 당근을 먹고 싶은 욕망에 이끌려 수레를 끌고 가는 말처럼 돈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이 자본주의 체제를 이끈다. 영화 <울프 오브 스트리트>에서 벨포트가 주식거래를 통해 고객과 주식 브로커가 모두 돈을 버는 게 좋다고 말하자 그의 직장상사는 충고의 말을 건넨다. 고객들이 주식거래로 원하는 만큼 돈을 벌게 그냥 놔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주가가 오르고 내리는 것을 예측하는 게 불가능하며 따라서 주식으로 일확천금을 벌려는 계획 자체가 실체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허상을 좇는 사람들의 욕망 덕택에 주식 브로커들은 두둑하게 수수료를 떼고 기업들은 사업을 운영하고 자본주의 경제는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설명해준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 역시 인간의 욕망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욕망이 끊임없이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려는 긍정적이며 창조적인 힘이자 에너지라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욕망이 특정한 방식으로 유도되고 통제되는 데 있다. 들뢰즈에 의하면 인류 문명사는 인간의 욕망을 통제하는 시스템의 변천과정과 다르지 않다. 욕망이 가진 속성 중 하나는 어느 방향으로 흐를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성이다. 그래서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욕망이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조절하고 통제할 필요가 있다. 이를 들뢰즈는 욕망의 ‘코드화’라고 부른다. 


원시사회에서 고대사 회로 넘어오면서 욕망은 전제군주의 권위에 의해 예속된다. 예전에는 부족들 간에 산재되어 있던 다양한 코드들이 국가에 의해 하나의 코드로 일원화되는 초코드화가 진행된다. 그러다가 자본주의 사회가 등장하면서 일시적으로 욕망이 탈코드화한다. 중세시대 영주가 소유한 토지를 경작하면서 살아가던 소작농들이 대거 도시로 이동하게 된다. 그러면서 기존의 질서와 지배체제로부터 탈주하여 도시에서 자유로운 신분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또한 토지에 고착되었던 노동력이 토지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탈영토화’도 함께 이루어진다. 간단히 말해 노예 신분으로부터의 자유는 탈코드화, 토지로부터의 자유는 탈영토화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렇게 이중적 자유를 획득했던 이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임금노동자로서 자본에 예속되게 된다. 그리고 자본주의 시스템에 포섭되면서 새로운 통제를 받게 된다. 이제 욕망의 흐름은 자본의 증식을 지상과제로 삼는 자본주의 규범에 맞추어 ‘재코드화’된다. 그리고 자본주의 코드는 교육, 가족, 정치, 법률 등 사회의 다양한 제도 위에 뿌리내리는 ‘재영토화’가 이루어진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사람들의 욕망은 자본주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기여하도록 길들여지고 획일화되고 초코드화 된다. 한편으로는 최대한 이윤을 생산하고 싶어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최고의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하고 싶어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대중들의 마음속에 소비욕구를 쉼 없이 샘솟게 만들어야 작동되는 사회다. 더욱 화려하고 더욱 편리하고 더욱 세련된 상품들이 끊임없이 현혹하는 사회 속에서 대중들은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 더 많은 수입을 갈망한다. 들뢰즈는 이러한 욕망이 각자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욕망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의해 의도적으로 생산된 욕망이라고 비판한다. 간단히 말해 지금 우리가 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은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원하라고 명령한 것을 우리가 원하고 있는 것이다. 알고 보면 우리의 욕망은 무한한 가치 증식을 추구하는 자본 자체의 욕망일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본의 욕망이 단지 경제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자본의 욕망이 교육, 정치, 가족 등 각종 사회제도뿐만 아니라 이미 사람들의 일상적 삶 속까지 깊숙이 침범하고 말았다. 학교, 정당, 교회 등 각종 사회기관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각기 다른 역할을 담당하고 고유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본주의 코드에 충실히 순응하고 있을 뿐이다. 


범죄학자 스티븐 메스너(Steven F. Messner)와 리처드 로젠펠드(Richard Rosenfeld)는 자본주의의 획일적 가치가 미국의 높은 범죄율과 관련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로버트 머튼의 이론을 계승하여 물질적 성공만을 추구하도록 부추기는 미국 사회의 문화적 풍토와 이로 인해 발생한 성공에 대한 지나친 집착, 과다경쟁, 상대적 박탈감 등이 일차적으로 범죄를 발생시키는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 추가하여 사회제도적 차원에서 경제제도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져 자본주의 시스템의 시장원리가 가족, 교육, 정치 등 비경제적 사회제도를 지배하는 게 더 큰 문제라고 보았다. 만약 비경제적 사회제도가 본래의 제 역할을 잘 해낸다면 아메리칸드림과 성공지상주의가 유발하는 폐해를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을 텐데 이들 제도들이 모두 경제에 종속되어 버려서 그렇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교육제도는 성숙한 시민에게 필요한 지식과 행동규범을 가르치는 본연의 목적으로부터 너무나 멀어지고 말았다. 그저 고수익 직업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어떤 학생이 받을 수 있는 교육의 품질은 마치 시장의 원리처럼 그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정해진다. 대학은 취업시장에서의 경쟁력을 고려하여 자기 학생들에게 높은 학점을 주기 바쁘고 이로 인해 학점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취업률이 낮은 학과들은 학문적 필요성과 상관없이 통폐합되기 일쑤다. 

  

원래 가족제도는 출산과 양육을 통해 사회 구성원을 재생산하고 가족 구성원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하지만 오늘날 가족제도는 단순히 경제활동인구를 생산하는 제도로 평가절하 되어 버렸다. 가족제도의 역할이 경제적 역할에 종속되는 현상도 빈번히 발생한다. 경제적 부담 때문에 출산을 꺼리거나 업무 차질 등을 이유로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을 제한하는 풍토가 바로 이러한 경제종속의 단편들이다. 

  

정치제도도 예외가 아니다. 원래 정치제도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발생하는 갈등을 균형 있게 조정하고 다양한 가치들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가치가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종종 정치의 우선순위가 경제성장에 있다. 그래서 국가의 경영방식과 추구하는 목적을 사기업과 다르지 않게 생각하기도 한다. ‘CEO 대통령’, ‘경제 대통령’이라는 용어들이 대통령 선거과정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이 시장원리가 지배하고 경제지상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경제 이외의 다른 제도들은 상대적 가치가 저평가되고 고유의 영향력을 상실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돈 되는 것’과 ‘돈 안 되는 것’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마치 진리인양 사회 전반에 확산된다. 2015년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가 전국의 청소년 1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조사에 참여한 고등학생의 56%가 10억 원을 준다면 일 년 동안 교도소에 수감돼도 좋다고 대답했다. 2013년 같은 조사의 47%보다 9% 포인트 증가한 결과이다. 들뢰즈가 자본주의에 의해 포획된 욕망의 위험성을 경고한 이유가 어쩌면 이런 문제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사이드 잡>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배경을 비판적 시각으로 분석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금융자본주의의 고삐 풀린 욕망을 제어하고 통제해야 할 제어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데에서 사상초유의 금융위기가 발생하게 된 원인을 찾고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해 금융권을 견제하기 위해 마련해 놓은 제도적 장치들이 오히려 그들과 결탁하여 위기를 초래한 공범이 되어 버린 과정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000년 미국 의회는 금융시장의 안정성을 해칠 수 있는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상품선물 현대화법’을 통과시키고 말았다. 이로써 파생상품에 대한 거래 규제가 사라지게 되자 거래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투자은행들은 앞을 다투어 부채담보부증권을 만들어 투자자들에게 판매했다. 파생상품에 대한 규제를 무력화시킨 주역은 바로 월가였다. 월가의 금융기관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미국 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치열한 로비를 펼쳐왔었다. 금융기관이 동원한 로비스트가 무려 3,000명이나 되는데 평균적으로 의원 1명 당 로비스트 5명에 이르는 규모다. 1998년부터 2008년 사이에 금융권이 선거 후원과 로비를 위해 지출한 돈이 자그마치 50억 달러 이상(약 6조 원)으로 알려져 있다. 나중에는 파생상품 규제를 없애려는 로비의 주역이 정부의 핵심 경제 관료의 자리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2006년 부시 대통령은 골드만삭스의 회장인 헨리 폴슨을 재무부 장관에 임명한 것이다. 

  

파생상품의 거래가 급증하게 된 데에는 신용평가회사의 역할도 결정적이었다. 투자은행들로부터 부채담보부증권에 대한 평가를 의뢰받은 신용평가회사들은 가장 높은 AAA 등급을 부여했고 투자자들은 이러한 평가를 믿고 구매했던 것이다. 나중에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고 투자자들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그 어떤 신용평가회사도 자신들의 평가결과에 대해 책임지지 않았다. 다만 고액의 평가료만 두둑이 챙겼을 뿐이다. 심지어 이들 신용평가 회사는 투자은행과 모기지 대출은행이 부도나기 직전까지 이들 기관에 대해 투자 적합 등급을 주었다. 연방정부기관으로서 증권시장의 질서를 유지하고 투자자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증권거래위원회도 무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부동산 버블 기간 동안 투자은행들은 더 많은 상품을 만들고자 무리해서 대출을 했기 때문에 부채비율이 급증했다. 이로 인해 투자은행들의 파산 위험수위가 높아져갔지만 증권거래위원회는 사실상 두 손을 놓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금융계와 학계가 금전적 대가를 매개로 결탁하는 모습은 쳐다보기에 가장 불편한 장면 중 하나다.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 경제석학들이 금융계 대형 회사의 이사회에 소속되어 매년 수백만 달러를 받아 온 사실이 드러났다. 또한 이들은 금융회사가 개최하는 행사에서 강연을 하거나 각종 자문활동을 통해 고액의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경제학자는 금융기관으로부터 돈을 받고 신용파생상품의 장점을 소개하는 학술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해당 학자에게 그러한 행위가 금전적 이해충돌의 문제를 발생시키지는 않는지 물어보자 그는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인터뷰하는 사람이 한 가지 예를 들어준다. 의학 분야의 어떤 연구자가 특정한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특정 제약회사에서 생산하는 약을 처방해야 한다는 내용의 신문기사를 발표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연구자가 벌어들이는 수입의 80%가 그 제약회사로부터 나오는데 이러한 사실을 신문기사에 알리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이 문제 될 게 없는지 재차 묻자 그제야 그 경제학자의 낯에 당황한 기색이 스친다.  미국의 경제학자들은 1980년대부터 경제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해 왔는데 대다수는 경제규제를 완화하는 쪽을 지지했다. 그리고 사실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지만 금융위기가 시작될 때까지 제대로 된 경고를 한 경제학자가 거의 없었다.     

  

자본주의에 포획된 욕망에는 브레이크가 없다. 탐욕의 열차는 스스로 속도를 제어하지 못한 채 폭주할 뿐이다. 마침내 한계의 벽과 충돌하여 엄청난 폭발과 함께 파국을 맞이할 때까지 위험한 질주는 계속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외부의 제어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화 속에서 도미니크 스트라우스-칸 IMF 전 총재는 은행의 CEO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들로부터 듣게 된 흥미로운 얘기를 인터뷰 도중 꺼내놓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너무 욕심을 부리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곤 재무부 장관을 돌아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규제를 더 많이 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린 너무 욕심이 많으니까요. 우린 그걸 피할 수 없어요.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더 많은 규제뿐입니다.”

- 도미니크 스트라우스-칸 IMF 전 총재의 말, 영화 <인사이드 잡> 



인간성 상실의 시대


영화 <화차>의 주인공 선영은 실종된 아버지가 진 사채 빚을 대신 떠안고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사채업자들의 빚 독촉 때문에 이혼까지 당하고 급기야 사창가에 팔려가 만신창이가 된다. 간신히 도망쳐 나온 그녀는 자신을 감추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고 피해자의 신분을 도용해서 살아간다. 어느 날 신분이 발각될 위험에 놓이자 결혼을 앞두고 갑자기 모습을 감춘다. 선영을 사랑하는 약혼자는 미친 듯이 그녀를 뒤쫓고 마침내 둘은 다시 만나게 된다. 선영을 뒤쫓는 과정에 그녀에 관한 모든 비밀을 알게 된 약혼자가 묻는다. “네가 사람이야? 너 뭐야?” 무심한 표정으로 선영은 대답한다. “난 사람이 아니야. 쓰레기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는 경제적 가치로 환산된다. 미국 메이저리그 특급 투수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수입은 하늘과 땅 차이다. 바로 그 차이가 두 사람의 가치에 있어서의 차이다. 수입의 규모는 한 사람이 소비를 위해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을 반영한다. 간단히 말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 있는 인간이란 많이 벌고 많이 쓰는 자를 말한다. 이러한 가치척도에 의하면 노동력을 상실하거나 노동할 의사가 없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 살아가야 하는 노숙인, 만성 실업자는 최저 가치의 존재들이다. 마르크스는 이들을 ‘룸펜 프롤레타리아’라고 불렀고 범죄학자 스티븐 스핏쳐(Steven Spitzer)는 ‘사회적 폐기물’(social junk)이라고 불렀다. 영화 속 선영은 어쩌면 이보다도 더 무가치한 존재다. 자본주의의 절대적 규범이라고 할 자본의 증식에 전혀 기여하지 못할 뿐 아니라 타인의 자본을 축내면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손해만 끼친다는 의미에서는 일종의 ‘마이너스 인간’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로 ‘물신숭배’(fetishism)를 지목한다. 상품과 화폐는 인간이 만들어낸 사물에 불과하지만 거꾸로 이들에 의해 인간의 존재가치가 부여되고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가 규정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 인간의 가치는 그가 지닌 노동력의 가치에 의해 결정되며 인간들은 각자가 보유한 노동력에 따라 가격표를 붙이고 상품처럼 시장에서 거래된다. 이때 가치를 상실한 자들은 재고상품이 폐기 처분되듯이 사회 속에서 버려진다. 그렇기 때문에 물신숭배는 사회 전반에 걸쳐 인간성 상실을 초래한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하고 개별적인 가치가 하나의 획일적인 금전적 가치로 대체되면서 사람들은 인격성을 박탈당한다. 개인만의 차이나 개성은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한다. 모든 사람은 언제든지 동일한 가치를 지닌 다른 사람에 의해 대체 가능한 존재일 뿐이다. 

  

더 나아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비인격화된다. 인간관계의 성격이 사회적인 것에서 물질적인 것으로 변질된다. 심지어 가족관계도 마찬가지다. 영화 ‘돈의 맛’에서 윤 회장은 돈 때문에 결혼하고 돈의 맛에 중독되어 이혼하지도 못한다. 결혼 관계가 철저히 금전적 가치로 환산된 결과다. 윤 회장의 아들인 재벌 3세 윤철은 아내와 이혼 후 딸을 양육하고 있지만 실제로 아빠로서의 역할은 외면하고 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자신이 물려받을 회사와 투자로 벌어들일 이익에만 쏠려있다. 모든 인간관계가 물질적으로 평가될 때 아빠와 딸의 관계조차 왜곡되기 쉽다.


부르주아 계급은 상전의 지위를 타고는 이들에게 사람들을 묶어놓던 잡다한 색깔의 봉건적 끈들을 무자비하게 잡아 뜯어 버렸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거벗은 이해관계와 냉혹한 ‘현금 계산’ 외에는 아무런 끈도 남겨놓지 않았다... 인격적 존엄성을 교환가치로 해소시켜 버렸으며, 문서로 인증되고 정당하게 얻어진 자유를 단 하나의 양심 없는 상업적 자유로 바꾸어 놓았다... 가족관계에서 심금을 울리는 감상적 장막을 찢어 버리고 그것을 순전한 화폐 관계로 환원시켰다.

- 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영화 <천주정>은 인간성 상실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중국 자본주의 속에 내재된 사회적 병폐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영화 속 이야기는 대부분 실제 중국에서 발생했던 사건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마을 전체의 이익을 불법적인 방법으로 독점한 재력가 앞에서 마을 주민들은 항의하기는커녕 혹시라도 경제적 과실이 자신들에게도 떨어질까 기대하며 굽실거리기에 바쁘다. 부당함을 호소하던 남자는 도리어 린치를 당하고 마을 주민들을 그런 그를 조롱한다. 유흥업소의 카운터에서 일하는 여성은 손님으로부터 성매매를 강요받는다. 거절하는 그녀에게 손님은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디 있냐며 돈다발로 그녀의 뺨을 후려갈긴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유흥업소에서 몸을 파는 소녀와 그녀를 사랑하는 한 소년이 등장한다. 어디 다른 곳으로 함께 떠나자는 소년의 제안에 소녀는 부양해야 할 어린 딸이 있어서 안 된다고 말한다. 절망한 소년에게 엄마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고 수화기를 통해 생활비를 빨리 보내지 않는다고 다그치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돈다발로 뺨을 후려치는 세상 - 영화 <천주정>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자본주의라는 덫에 걸려 허우적대는 존재들로 묘사되고 있다. 돈으로 모든 것이 평가되는 사회 속에서 주인공들은 자본주의가 정한 규칙에 복종하도록 강요받는다. 그 속에서 공정성과 정의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동원된 폭력으로 잠재워진다. 끝까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몸부림에 세상은 따귀를 갈기며 ‘정신 차리라’고 훈계한다. 사랑에 빠진 청춘들은 뭐든지 자신을 상품처럼 팔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준엄한 현실 앞에 무릎 꿇는다. 정의, 인간 존엄성, 사랑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들이 자본에 의해 점령당한 비정한 세상 속에서 이들은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최후의 저항을 감행한다. 부조리한 세상에 분노한 남자는 장총을 들고 사람들에게 응징의 방아쇠를 당긴다. 돈다발로 따귀를 맞은 여자는 참을 수 없는 굴욕감에 칼을 빼어 들어 상대방의 몸을 난자해버린다. 인간관계가 단절되고 한낱 자본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소년은 극단적 소외감과 절망감을 끌어안고 건물 아래로 몸을 던진다.  

 

미국의 철학자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은 그의 저서에서 경제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을 향해 날 선 비판을 가한다. 세상에는 돈으로 거래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강력해질수록 이러한 것들이 돈의 힘에 밀려 쫓겨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든 사례 중 프로스포츠 분야의 ‘스카이박스화’가 있다. 야구, 미식축구, 농구 등 프로스포츠는 단순히 운동경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같은 팀을 응원할 때 경험하는 동질감으로 인해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연결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양키즈 스타디움에서 함께 어울려 응원할 때면 인종, 피부색, 연령, 출신 국가, 종교에 구애받지 않고 양키즈 팬이라면 누구라도 뉴욕 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지난 수십 년 동안 돈의 영향력이 스포츠계에도 점차 막강해졌다. 대도시마다, 대학교마다 경기장에 호사스러운 스카이박스가 등장했다. 돈 있는 사람들은 고액의 연회비를 지불하고 특별히 설치된 관람석에서 샴페인을 마시면서 경기를 관람했다. 경기장 측에서는 이러한 스카이박스가 훌륭한 수입원이었다. 일반석 또한 입장료에 따라 좌석 배열의 계층화가 갈수록 심각해졌다. 지불능력에 따라 서열화된 관중들은 경기장에 들어서자마자 공간적으로 엄격하게 분리 배치되었다. 이런 조건 하에서 같은 경기장에서 같은 팀을 응원하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예전만큼 공동체 의식을 느낄 수 없다는 게 마이클 샌델의 진단이다. 돈이 모든 걸 결정하는 자본주의 원리가 스포츠 경기장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느끼며 경기장에 온 사람들은 씁쓸한 표정으로 각자의 지정된 자리를 찾아 움직일 뿐이다. 

  

예술분야도 마찬가지다. 상품의 사용가치가 교환가치로 변환되는 자본주의의 원리가 지배하고 있다.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는 물신숭배의 영향으로 음악회에 가는 사람들이 음악 자체가 아니라 입장권 구입을 위해 자신이 지불한 돈으로부터 만족감을 느낀다고 주장한다. 예술성 높은 음악 자체가 사용가치이고 음악회의 입장권 가격은 교환가치다. 그런데 사람들은 상품의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로부터 즐거움을 얻기 때문에 입장료의 가격에 비례하여 소비가 주는 쾌감도 함께 증가한다. 야구경기를 관람하는 묘미는 선수들의 화려한 플레이, 승부를 둘러싼 팽팽한 긴장감 등 경기 자체에 있다. 하지만 스카이박스화가 진행될수록 사람들은 경기 자체의 즐거움을 빼앗기고 그 대신 특별회원권과 입장권 가격이 주는 가상의 만족감을 추구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삶 전반에 걸쳐 나타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어쩌면 우리는 돈이 주는 가짜 기쁨에 익숙해져서 삶이 주는 풍부하고도 진정한 기쁨과 맛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참고문헌

신혜경, 「대중문화의 기만 혹은 해방」(김영사, 2009)

마이클 샌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안기순 옮김(와이즈베리, 2012)

존 밀턴, 「실낙원」, 안덕주 옮김(홍신문화사, 2012)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앙띠 오이디푸스 –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최명관 옮김(민음사, 2000)

칼 마르크스, 「자본」, 강신준 옮김(길, 2008)

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선언」, 강유원 옮김(이론과 실천, 2008)

Robert K. Merton, “Social Structure and Anomie,”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Vol. 3, No. 5(1938)

Steven F. Messner & Richard Rosenfeld, Crime and the American Dream (Wadsworth, 2013)

Willem A. Bonger & Austin T. Turk, Criminality and Economic Conditions (Indiana University Press,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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