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조사원 P가 발행한 16개의 기묘한 에피소드
에피소드 2
“아직인가요?”
“네, 조금만 있으면 도착합니다.”
택배 기사의 짜증 섞인 목소리였다.
나는 지금 그를 기다리고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파란 우주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타디스, TARDIS. 그것은 영국의 한 유명한 드라마에 등장하는 우주선. 우주선인 동시에 타임머신이다. 나는 그 드라마를 우연히 처음 접한 그 날부터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이른바 폐인이 된 것이다. 2005년의 새로운 시즌 1부터 올해의 시즌 7은 물론이고 스페셜 방송까지 모두 P2P 사이트에서 다운로드해 놓고, 말 그대로 테이프가 늘어날, 아니 하드디스크가 에러 날 정도로 보고 또 보았다.
드라마는 타임로드라는 외계인이 자신의 우주선 겸 타임머신인 타디스를 타고 지구로 와서 지구인 여자를 데리고 다니며, 무수한 시공간에서 무수한 모험을 겪는다는 내용이다. 흔해빠진 타임머신 이야기 아니냐며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온갖 비유와 상징들로 가득한 그 드라마는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엄청난 시청자를 확보하고 있는 세계적인 드라마이다.
내가 그 드라마에 빠진 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바로 그 특유의 상상력 때문이다. 매 회 어쩜 그런 생각을 해냈는지 작가들과 PD들이 존경스러울 따름이었다. 물론 시즌2부터 시즌 4까지 주인공을 맡았던, 말이 엄청나게 빠르고 잘 생긴 영국 배우도 정말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을 온통 빼앗아 버린 건 다름 아닌 60년대 영국 경찰의 비상 전화박스를 본 딴 그 우주선, 타디스였다. 타디스! 타디스! 작은 공간에 큰 공간이 들어간 역설적인 모습의 타임머신. 궁금하면 지금 당장 P2P 사이트에서 다운로드해 보라. 분명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는, 현재 과학으로는 이론적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그 우주선, 타디스는 전 세계 시청자들이 현실에 꼭 존재했으면 하는 가상의 물건 1위라고 한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나도 타디스가 현실에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상상을 수도 없이 했다.
그래서 나는 타디스를 한 대 구입하기로 했다. 물론, 당연히 미니어처란 말이다. 없는 영어 실력에 생전 처음으로 신용카드 해외 결제로 타디스 미니어처를 구입했다. 그런데 그 타디스가 오늘 도착한다는 것이다. 아침 일찍 택배회사에 전화를 해 보니 2시나 4시 사이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무조건 2시까지 갖다 달라고 했다. 나는 긴장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주문을 하고 거의 한 달 정도, 얼마나 가슴을 졸이며 기다렸던가? 과연 타디스는 어떤 모습일까? 겉은 시즌 4의 것을 모델로 했다고 했는데 내부는 또 어떻게 꾸며 놓았을까? 정말 작은 공간에 큰 공간이 들어가 있지는 않겠지? 설마 그가 타고 있으려나? 매일 온갖 즐거운 상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견디지 못하고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 목록에 같은 전화번호가 10개 정도 주욱 올라왔다. 모두 택배기사의 번호였다. 통화 버튼을 한 번 더 눌렀다. 익숙한 신호음. 하지만 다시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래, 이 정도쯤은……. 벌떡 일어서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생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때였다. 딩~동! 아! 그 초인종 소리, 맑고 경쾌하기도 하여라. 나는 빛의 속도로 현관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아가씨, 도대체 이게 뭔데 그래요?”
택배기사는 잔뜩 불만 섞인 표정으로 다짜고짜 쏘아붙였다.
“아저씬 몰라도 돼요.”
택배 상자를 받은 내 심장은 놀랄 정도로 쿵쾅거렸다. 얼른 내 방 침대 위로 모셔왔다. 조심스럽게 택배 포장을 벗겼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잠시 후 드러나는 그 아름다운 파란빛 사진의 제품 포장박스. 생각보다 제법 큰 사이즈였다. 나는 숨을 고르며 포장박스의 스티커를 제거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타디스를 꺼냈다. 타디스, 아! 타디스! 그 타디스가 드디어 내 눈 앞에 우뚝 선 것이다. 정신이 몽롱. 멍해진 상태로 조심조심 타디스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깜찍하게도 들려오는 아! 그 소리! 그것은 타디스가 나타나거나 사라질 때 나는 엔진 소리로 타디스의 숨소리라고 한다. 궁금하면 지금 당장 P2P 사이트에서 다운로드해서 한 번 들어보라. 순간 나는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봐요!”
“이봐요, 아가씨!”
얼마쯤 지났을까? 나는 무척 낯익은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이내 다시 쓰러질 뻔했다. 이럴 수가! 바로 그였다. 마지막 타임로드, “닥터!” 그가 내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건 분명 꿈일 거야.
“아가씨, 난 바쁜 사람이야. 이건 꿈이 아니라고.”
그랬다. 꿈이 아니었다. 볼을 꼬집어보니 분명 아팠다.
“그래, 나야. 나 알지?”
“네, 그런데 어떻게? 이게 도대체 무슨…….”
“글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드라마 속 우주와 지금 아가씨가 살고 있는 우주 사이에 균열이 생긴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이 안 돼. 여기 어딘가에…….”
그러면서 그는 방안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그럴 수가? 하긴 드라마에서도 그랬지? 평행우주였던가? 이 우주와 거의 같은 저 우주가 있다고. 타디스는 두 우주의 균열 사이로 넘나들 수 있다고. 그러고 보니 내가 영어를 쓰는 그와 아무 문제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것 역시 드라마의 내용과 똑같았다. 그것은 타디스의 기능 중 하나였다. 전 우주 수십억 개의 언어를 자동으로 번역해서 들려준다는 기능. 나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럼 정말 당신이?”
“그렇다니까, 나야 닥터. 보고도 모르겠어? 그건 그렇고 여기 어딘가에 분명 균열이 있을 텐데.”
그는 정말 말이 빨랐다. 그러면서 계속 방 안 이곳저곳을 살폈다.
“아하! 바로 저거야.”
그가 가리킨 곳은 벽시계였다. 얼마 전 인터넷 쇼핑몰에서 구매한 “미네르바의 올빼미 시계”. 흔히 보는 뻐꾸기시계가 아니라 올빼미 시계라는 말에, 그것도 미네르바의 올빼미란 말에 그만 지름신이 강림해서 구입한 것이었다. 그것은 남들과 다른, 나의 지식과 교양을 보여줄 수 있는 훌륭한 아이템이었다. 그런데 택배 과정에서 떨어뜨렸는지 아주 가는 실금이 2시와 4시 사이에 나 있었다. 쇼핑몰에 문의해 보니 택배 과정에 생긴 흠집 때문이라면 반품은 절대 안 된단다. 당연히 택배회사에 전화를 했고 이런저런 항의 과정을 거쳐 얼마간의 보상을 받고 그냥 두기로 했던 것이다. 닥터는 바로 그 실금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그 유명한 “소닉 스크루 드라이버”를 꺼내 들더니 파란빛을 내며 그 흠집, 아니 균열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 균열 사이로 드라마에서 보았던 것 같은 뭔지 모를 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도 같았다.
“음, 아가씨, 빨리 준비해야 될 것 같은데?”
“네? 준비라뇨?”
“그래, 당신이 필요해. 이건 당신과 타디스 사이에 뭔가 연관이 있어서 생긴 시공의 균열 같아.”
“네? 그, 그럼 나를 데리고 시간여행을 하겠단 말이에요?”
“그렇다니까. 하지만 단단히 각오해야 될 걸. 이번엔 좀 만만치 않을 것 같으니까.”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드라마 주인공처럼 저 잘생긴 남자와 함께 시간여행을 한다니.
“그런데 당신은 이미 닥터가 아니잖아요?”
그는 지금 방영하고 있는 시즌 10의 주인공이 아니라 시즌 2부터 시즌 4까지의 주인공이었다.
“그것도 마찬가지야. 알고 있겠지? 평행우주는 완전히 같지는 않다는 걸.”
“그럼, 지금 떠나야 되나요?”
“그래, 서둘러.”
나는 신이 났다. 또다시 빛의 속도로 여행 가방을 꾸렸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섰다. 그는 특유의 미소를 띠며 타디스로 향했다. 그런데
“아! 이런! 이런! 이건 아니잖아!”
갑자기 그가 소리쳤다.
“왜요?”
“당신은 안 되겠는 걸.”
“아니, 왜요?”
“이걸 보라고?”
그는 타디스를 가리켰다.
“그건 타디스잖아요?”
“그래. 타디스. 그런데 여기에 당신이 어떻게 들어와.”
그러고 보니 그랬다. 타디스는 여전히 미니어처의 크기 그대로였다. 기껏해야 한 20센티미터 남짓한. 타디스의 입구로는 나의 한쪽 발도 제대로 집어넣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도 작았다. 마치 대인국의 나라에 온 걸리버처럼.
“그럼 어떻게 해요?”
“할 수 없지. 나 혼자 해봐야지.”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난 이미 준비도 마쳤는데.”
“어쩔 수 없어. 이건 나도 타디스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타디스 안이 아무리 넓다 해도 일단 들어갈 수 있어야 되잖아?”
“말도 안 돼!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당신, 인터넷으로 타디스 구입했다고 했지?”
“네.”
“그럼, 당연한 거 아냐? 인터넷 쇼핑이 다 그렇지.”
말을 마치자 그는 타디스 안으로 혼자 들어가 버렸다. 어이가 없었다.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냔 말이다. 그런데 잠시 후, 다시 타디스의 문이 열리더니 그가 특유의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내밀었다.
“참! 알지? 반품은 꿈도 꾸지 마.”
그리고 타디스는 그 특유의 엔진 소리, 아니 숨소리를 내더니 사라져 버렸다. 드라마처럼.
<타디스 - BBC 닥터후 공식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