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은하 - ep5 커피

이동조사원 P가 발행한 16개의 기묘한 에피소드

by 이동조사원 P

에피소드 5

커피



나는 된장녀가 아니다. 무슨 말이냐고? 말 그대로다. 나는 누구처럼 점심은 2000원짜리 김밥으로 때우고 별 벌레인지 우리속천사인지에서 그 무슨 5000원짜리 커피를 마시는 된장녀가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나는 커피를 무척 좋아한다. 커피는 내 삶의 가장 소중한 부분의 하나이다. 커피가 없으면 도대체 글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깊은 밤, 글이 막히는 고통스러운 시간이 이어질 때,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올리고 알맞게 로스팅된 원두를 갈고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리고 따뜻하게 데워진 잔에 커피를 붓고 코끝으로 그 진한 향기를 느끼는 순간, 그 고통은 이미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그 짙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향기를 한 모금 목구멍으로 넘기면 다시 글이라는 것이 자기들 나름의 질서대로 정리되기 시작한다. 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가 말이다. 위약효과라는 친구도 있지만 어쨌든 나는 그런 커피를 정말 좋아한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나는 이 고마운 커피 때문에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것은 한 권의 책과 몇 장의 사진 때문이다. 한 권의 책은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고 몇 장의 사진은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사헬, 고난 속의 사람들”이다. 그 내용이 궁금하다면 지금이라도 찾아보고 읽어보라. 충분히 가치가 있는 글과 사진들이다. 나는 그 책과 사진들을 보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대학 시절 광주 민중항쟁 관련 사진을 눈물을 흘리며 보았던 것과 똑같은 세기의 충격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책과 사진을 본 후 커피를 마실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 책의 내용과 사진의 내용들은 커피와는 별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커피를 마실 수 없게 된 것은 아마 나의 알량한 양심의 목소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살가도는 자신의 사진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사진 속의 사람들은 비참한 현실 속에 살고 있는 타인들이 아니라 지구라는 같은 공간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01.jpeg 세바스티앙 살가도 <사헬> 연작

그리고 손택은 또 이렇게 말했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그랬다. 어쩌면 나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거의 매일 마시는 몇 잔의 커피. 그 속에 지금도 커피 원두 생산 현장에서 고생하고 있는 거의 2천만 명에 가까운 저개발국가 노동자들의 피땀이 녹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 들 중 약 3분의 1이 15살 미만의 어린이 노동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손택의 책과 살가도의 사진을 본 후 커피를 즐기는 나 자신이 역겨워졌다. 그동안 마신 모든 커피를 다 토하고 싶었다. 하지만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그들의 삶은 또 어떻게 될 것인가? 진저리가 쳐졌다. “괴물 같은 자본주의!” 그 말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듯했다. 그리고 결론을 짓지 못할 때까지 당분간 커피를 마시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무척 힘든 결정이었다. 커피를 마시지 못하면서 원고도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웃기지도 않네. 그냥 마셔. 뭘 그리 걱정해? 그건 네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

“그게 그렇게 안타깝다면 기부라는 걸 하면 되잖아. 그러면 조금은 양심에 덜 미안한 거 아냐?”

“그래서 난 녹차 마셔.”

친구들의 대답이었다. 일단 NGO에 가입하고 적은 돈이지만 기부금도 꼬박꼬박 내기로 했다. 그러면 누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들 중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위했다. 그리고 커피를 마셔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 역겨움이 가시지 않았다. 녹차로 바꾸어 보았다. 하지만 그 깊고 그윽하다는 녹차의 맛은 이미 커피로 단련된 나의 입에는 그저 밋밋하게만 느껴졌다. 커피를 마시지 못한 덕에 잠은 많이 잤다. 대신 원고는 여전히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마냥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만큼 나에게 커피는 소중했고 반대로 그 알량한 양심이라는 것도 나에겐 외면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런데 바로 어제, 나의 이 우습지도 않은 고민을 해결해 줄 방도를 찾았다. 그것은 바로, “공정무역 커피!” 다국적 기업과 중간 상인을 거치지 않고 열악한 커피 생산 농가에 적정한 수익을 보장하자는 커피. 그것도 생태계 보호를 고려해 유기농으로만 재배한다는 커피. 이름도 멋있지 않은가? “공정무역 커피!”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바로 공정무역 커피를 판매하는 인터넷 쇼핑몰에 가입하고 제품을 주문했다. 우간다의 농민 조합에서 생산된 유기농 아라비카 커피라고 했다. 가슴이 설레었다. 그리고 오늘 나의 그 웃기지도 않은 고민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커피가 그렇게 나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휘파람까지 불며 커피를 내렸다. 아! 그 향기! 나는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는 기분으로 커피 잔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아프리카의 들꽃 향이 일품이라는, 우간다 농민들이 구슬땀으로 키워냈다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자 정말 아프리카의 들꽃 향이 나의 콧속을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들, 우간다 농민들이 숨 쉬고 있는 아프리카의 흙바람마저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작열하는 아프리카의 태양이 그대로 커피에 녹아 있는 것도 같았다. 아! 이렇게 그들과 내가 이어지는구나! 이렇게 나의 “착한 소비”가 시작되는구나! 그런데, 그때였다.

“이봐, 거기! 지금 뭐 하고 있어?”

이건 뭐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익숙한 내 작업실이 아니었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흙먼지가 일어나고 있었다. 숨이 턱턱 막히고 어느새 이마에 땀이 맺혔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곳은 바로 아프리카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나는 단지 커피를 마셨을 뿐인데. 이건 분명 꿈일 거야. 그때 또다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봐! 1달러라도 벌려면 게으름 피우지 말라고.”

나의 허리엔 바구니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바구니엔 선명한 핏빛 커피체리가 들어 있었다. 그곳은 커피 농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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